책을 펼치며 성실하게 하루하루 버티듯이 피해자를 변호했을 뿐이라고 하는 서혜진의 말에 마음이 먼저 가닿았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기 일쑤인 사회에서 서혜진은 젠더폭력이나 아동학대 사건의 피해자를 주로 변호해 왔다. ‘피해자의 침묵을 열고, 정의가 닿지 못한 자리에서 그들을 지키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었겠는가. 한편으로는 그저 버텼다는 말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감당해 왔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고단함이 내 어깨에도 함께 얹히는 듯했다. 그동안 서혜진이 경험한 사례들 중에는 널리 알려진 것도 많지만, 알려지지 않을 만큼 흔한,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듣는 것들이 참 많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우리 사회에 성폭력이나 젠더폭력이 얼마나 흔한지를 다시금 확인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형법으로는 성폭력 범죄를 대처하기 힘들고,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 무렵 나는 국회 법사위원회에 출석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특별법과 관련한 가장 큰 쟁점은 ‘성폭력 범죄를 친고죄로 한 형법 규정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와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할 것인가?’였다. 1994년 1월 5일, 특별법은 출범했으나 친고죄와 비동의 강간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 후 친고죄는 대부분 사라지거나 반의사불벌죄로 대체되었지만, 비동의 강간죄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새 법이 출범하면서 처벌 규정이 강화되는 등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범죄 피해자를 보는 사회의 시각은 달라지지 않았고,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가해자를 고소하는 데는 여전히 크나큰 결단이 필요했다. 법정에 선 피해자는 피고인 측 변호사의 막말에 가까운 질문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답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행히 2013년부터 피해자를 위한 변호사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었다.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미래가 더 우선시되는 가해자 중심의 프레임이 여전히 견고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전 생애를 걸어야 하는데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이 만남에는 언제나 시작과 결말이 존재한다. 서혜진은 피해자 변호사로 겪었던 사례들을 피해자와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이야기하듯 풀어낸다. 거기에 더해 필요한 만큼의 관련 법률과 판례들을 덧붙이고 해설까지 곁들인다. 젠더폭력 등과 관련한 대표적인 사례들을 골고루 담고 있으므로 한 권의 친절한 교과서로 사용하기에도 충분하다. 이런 책 구성도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당장이라도 필사하고 싶어지는 서혜진의 무심한 독백이 곳곳에서 흘러나온다는 점이다. 언뜻 넘겨보아도 이런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삶이 한순간 잿빛이 된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잃어버린 색을 되찾아 주는 것”, “억울함을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보다 억울함을 드러낼 수조차 없는 사람의 편에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 “어떤 것도 당신을 파괴할 만큼의 가치는 없다.” “타인을 돌보는 일은 소진을 전제로 하지 않아야 한다.” “재판은 끝나도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천천히 곱씹고 싶은 문장이 끝이 없다. 그렇다. 『법정 밖의 이름들』은 지식이 되고, 지혜가 되고, 나아가 위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