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부터 판사로 일했으며 2020년 23년간의 법관 생활을 마무리했다. 칼럼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로 전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바 있으며,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악마판사〉 〈프로보노〉의 대본을 집필했다. 현재는 전업작가로 활동하며 드라마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나로 살 결심』 『개인주의자 선언』 『최소한의 선의』 『판사유감』 『미스 함무라비』 『쾌락독서』 등이 있다.
법은 사적 복수를 금지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종식하기 위해 시민들은 국가에 폭력을 독점시켰다. 법은 제도화된 폭력이다. 군과 경찰만이 법치주의의 통제하에서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법치주의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국민의 법감정, 정의 감정을 다 채워주지 못한다. 최대한이 아니라 최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충분하지 않은 응보야말로 국가보안법 위반처럼 보아 엄벌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닐까. 응보는 단순히 국민 감정에 휘둘리는 사법 포퓰리즘이 아니다. 오히려 사법이 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일 수도 있다. 법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탁이 아니다. 법은 인간을 위한 도구다. 법은 인간사회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 로
위기는 자유를 사치로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자유는 위기의 시대일수록 소중히 지켜야 그것을 영영 잃어버리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목적이 정당하고, 방법 면에서 매우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는 필요 최소한이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과잉금지 원칙은 개인들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가장 세심하고 사려 깊은 사람도 세상사 모두를 예상하고 대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가장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법도 세상사 모든 사안에서 명확한 정의의 지침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법은 장래 발생 가능한 다양한 사안을 예상하고 미리 만들어두는 일종의 기성복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다양한 치수의 옷을 만들어두어도 예상을 넘어 팔이 더 길거나 짧은 사람이 나오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내리기 어려운 이유도, 세상 온갖 이슈에 대해 공정하다 불공정하다 죽자고 싸우지만 입장이 좁혀지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각자에게 이미 정해진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불과하다’는 말은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정의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기는 게 정의고 내게 유리한 게 정의니까.
법은 오히려 인간사회 속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가치들의 충돌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노력의 산물이다. 자유의 보장과 제한에 관한 수많은 법리들이 발전해온 과정, 형식적 평등에서 실질적 평등으로 발전해온 과정,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웠던 근대적 헌법이 수정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복지국가 헌법으로 발전해온 과정이 다 그렇다. 법은 종교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법은 타협
절대를 고집하지 않는다. 법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다. 법은 인간사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는 근본적인 질문들만 햄릿처럼 반복하고 있을 수 없다. 인간 세상에 백 퍼센트 명확한 일은 드물지만 법정에서는 언제나 승패를 가려야 한다. 판사는 모르겠다는 이유로 재판을 거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