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팅 이즈 리액팅’이라는 말이 있다. 탁구가 딱 그렇다. 탁구는 상대가 보낸 공에 대한 반응이다. 삶이 딱 그렇다. 그의 삶이 이미 탁구였다. 그 상대는 무자비했다. 서브권을 독점한 것도 모자라 고강도의 회전을 공에 걸어 보냈다. 불행이 삶을 데려왔다. “과부는 아니었지만 과부 같았던” 시절이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시절”로 대물림됐다. 가난, 파경, 실직, 실연. 혁명은 실패했고 노동은 미래가 없고 죽음은 연쇄되고 공정과 정의는 허상이었다. 스카이 서브처럼 강력하다. 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린다. 이토록 편파적인 공을 시인은 계속 받아 왔다. 불행을 면할 수는 없지만 헛된 불행은 면할 수 있다고? 불행을 환대할 수는 있다고? 물음과 울음이 뒤섞였다. 어떻게든 흘러가리라, 살아지리라, 시간만이 신이라는 생각이었다. 이판사판, 동문서답, 시대착오를 즐기며, 시라는 변신 마스크를 쓰고 리액팅했다. 몸이 나이보다 빨리 살았다. 이제 생존을 위해 반려 탁구를 친다. ‘순간’과 ‘하양’을 본다. 하양은 빛의 모든 파장이 반사하여 나타나는 색이 없는 색, 모든 색이 다녀간 ‘순간’ 이후의 색이다. 사람이 다녀갔고, 시절이 지나갔다. 공이 라켓에 닿는 때처럼 불행도 사랑도 순간이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에 극락이 있음을 알기에, 인간도 사랑도 벗고 섬이 되는 몽(夢)에서 돌아와 시를 쓰고 탁구를 친다. 승부를 벗은 이 랠리 속에서 들숨과 날숨, 구원 없는 불행과 부조리, 삶과 죽음이 뒤섞인 검정이 돌아오지 않는 색들을 기다리는 하양, 불행이라는 색마저 그리워하는 하양과 색즉시공으로 어울린다. “무자비가 무(無)를 버린다”는 아픈 유희의 극치를 쓴다. 까마귀보다 검은 밤이다. 불행을 전가하지 않는다. “내 불행은 내가 알아서” 한다. 중력과 권력과 AI와 고독을 반사하며 탁구공이, 시가 미래로 날아간다. 죽음을 하얗게 얻어 간다. 해탈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