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가 꺼진 은신처』는 일급 킬러 ‘나’가 암살 의뢰를 수행하는 사흘간의 행적을 뼈대로, 그 수행 과정에 연루된 인물들의 짧은 사연을 모자이크식으로 엮은 이야기다. 이 인물들의 사연 속에서 또 다른 인물들이 꼬리를 물며 등장해 충돌하고 굴절하며 점점 이야기의 그물코가 촘촘해진다. 우리는 서사의 결말에서 매끈하게 짜인 그물의 완성을 보고 싶게 마련이고 그것이 미스터리 장르의 관습적 규칙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세 번의 변주와 다성음악적 구성을 통해 그물의 완성을 계속 늦춤으로써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주인공 킬러를 포함해 수많은 조역들은 모두 비슷한 딜레마를 갖고 있다. 1) 누군가로부터 수수께끼 같은 일을 제안받는다, 2) 그 대가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요긴한 물질적 보상이다, 3)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사태는 뜻하지 않게 흘러간다. 여기서 실제의 우리 삶이 이 같은 우연과 필연, 선택과 강제, 의심과 맹목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음을 연상하는 것이 아주 엉뚱하지는 않겠다. 이 소설이 이야기의 완성을 ‘목격’하려 달려나가는 우리의 욕망을 잡아끌어 다른 방향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예술적 힘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