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한라산 숲, 백 살이 넘은 서어나무 그늘 아래서 깊은 상념에 빠진 그녀의 순간을 훔쳐본 적이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고, 오늘 여기에 담긴 시편들을 통해 답을 듣는다. 김진숙의 시는 정성스럽게 먹을 묻히고 조심스럽게 떠낸 탁본(本)처럼 고요하고 흐트러짐이 없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풀어내는 담백함이 오히려 깊은 울림이 된다. 첫 시집 『미스킴라일락』에 이어 한층 깊어지고 단단해진 시편들에 슬픔과 회한, 고통의 기억조차도 넘치지 않게 담아내어 오롯하다. 내가 아는 김진숙은 그녀가 지향하는 삶의 궤적 앞에서 단 한 번도 뒤로 물러서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녀가 필요한 자리에서 항상 제몫을 기꺼이 감내해온 시인이다. ‘눈물이 싱겁다’는 고백은 차라리 살아있어서 아픈 것들에 대한 위로로 읽힌다. 노을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 제 손을 호주머니 속으로 감추는 저 고요한 반성이라니, 그 겸손함이 나를 뉘우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