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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상우
국내작가 문학가
출생지
경상북도 영주
작가이미지
채상우
국내작가 문학가
경북 영주 출생이다. 2003년 계간 [시작]을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멜랑콜리』, 『리튬』, 『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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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추천

  • 시인이라면 아니 딱히 시인이 아니더라도 그 누구나 자신만의 저녁을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저녁을 두고 “어둠은 토란잎, 호박잎, 오이, 들깻잎을 거쳐 고춧잎으로” 사라진다고(「저녁의 길」) 쓸 수 있는 시인은 가감 없이 말하건대 박춘희 시인밖에 없다. 저 적요함을, 저 막막함을, 저 쓸쓸함을, 그리고 저 하릴없음과 속수무책을 대체 어떻게 달리 번안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저 도리 없는 아득함은 단지 날마다 스며드는 어둠 앞에 선 자의 부질없는 망연자실이 아니다. 그 저녁 속엔 “티눈으로 단단히 박”힌 “얽히고설킨 뿌리의 가계”와(「감자밭 가계」) 지금도 여전한, 신산한 하루하루가 맺혀 있다. 예컨대 그 저녁엔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어머니의 맨발과 통풍에 시달리시던 아버지의 부은 발”이(「감자밭 가계」), “아카시아나무로 입안”이 헌 “소죽솥 아궁이”가(「아버지의 겨울 2」), “저수지 곁에서 종일 서서 생선을 굽다가 무릎이 다 닳아빠진” 어떤 이의 일생이(「생선구잇집 이 씨」), “벌집 지하방 칸칸마다” “일벌마냥 들락거리”던 여인들의 “알뜰하다 못해 지독한” 생계가(「만리동 연가」), “막차를 놓치고 힘이 쭉 빠져 있는” 사내의 덧없는 비장이(「어떤 귀가」), “염생식물”처럼 발갛게 “터진”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의 “손등”이(「공단으로 오는 봄」) 얼룩져 있다. 그러니 “누군가 불러 주지 않으면 영영 잊힐 것 같은” 마을 이름들(“짐막골, 싱골, 먹골, 밤나무골, 바른골, 사늘, 소진골” 등등)과 온갖 나물의 이름들(“삽딱주, 이밥추, 나물취, 미역취, 수리취” 등등), 그리고 시집 곳곳에 옹그리고 앉은 경북 봉화의 말들은 그 하나하나가 “늦도록” “다정한 이름들”인 게 분명하지만(「어떤 기록」), 곰곰이 셈해 보자면 처연하고 비참한 누대의 고통이 “독한 마음을 먹고” 애를 태우다 겨우 “아문 자리”라고 말하는 게 옳다. 그리고 그것이 “상처 위에도 오롯이 솟는 생의 그리움”이 뜻하는 바일 것이다.(「쥐똥나무」) 이제야 알겠다. 왜 “저녁”이 아니라 “어둠”이 “토란잎, 호박잎, 오이, 들깻잎을 거쳐 고춧잎으로 사라지네”라고 시인이 적었는지 말이다. 저녁은 그저 어두워지는 시간이 아니라 어두워짐으로써 비로소 어둠이 사라지는 때다. 쥐똥나무는 그때가 되어서야 “수만 송이 환한 꽃가지”를 버리고 “쥐똥 같은 열매를 쏟아 내”고(「쥐똥나무」), “옛집”은 “생생한” “숨을 담는 집”이 된다(「옛집 2」). 이 시집이 정녕 지극한 까닭이다.
  • [밤실 오디세이]에는 [오디세이]와 ?도화원기?가 포개져 있다. 예컨대 ?밤실 오디세이 - 얀테?에는 “나 돌아가리라/무릉도원 둥지 튼/밤실”, 이렇게 적시되어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오디세이]는 귀환의 서사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우여곡절 끝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다. 이에 비해 ?도화원기?는 방문의 서사이며 안타깝게도 실패담이다. 즉 도화림(桃花林)을 잠시 다녀온 무릉의 어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복숭아꽃들로 찬연한 숲 너머의 마을을 다시는 찾지 못한다. 이처럼 이타카와 도화림은 겹쳐질 수 없는 공간이며, 그 의미의 자장과 벡터는 다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박종현 시인은 이 두 곳을 ‘밤실’로 끌어당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밤실’이 과거 시인의 실제 고향이자 지금은 “마음속 지도” “세상 한가운데”이기 때문이다(?밤실 오디세이 - 밤실?). “세상 한가운데” 곧 시인의 내면 중심에 자리한 ‘밤실’의 중력은 이타카와 도화림의 시공간을 휘어 버릴 만큼 강력하다. 요컨대 ‘밤실’은 박종현 시인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이자 종국엔 돌아가길 희망하는 귀착지이지만 그곳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잃어버린 미래다. 그런데 박종현 시인의 이 낭만적 상실감은 고통(노스탤지어(nostalgia)의 한 축인 ‘알고스(algos)’ 혹은 ?도화원기? 끄트머리에 적혀 있는 유자기가 앓는 ‘병(病)’) 속으로 휘말리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이에 대해서는 단박에 말할 수 있는 소이연이 있는데, 바로 시인의 ‘어머니’다.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된 시인의 ‘어머니’는 봄이면 “꽃다지” “그 노랑을 가꾸기 위해” “또 봄을 몰고 오”시는 분이며(?밤실 오디세이 - 봄을 몰고 오시는 어머니?), “살아생전” “시 한 편도 읽지 않았”지만 “아들의 시는 안 읽고도 다” 아시는 분이다(?밤실 오디세이 - 시 읽는 별?).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바로 저 ‘어머니’가 이타카이자 무릉도원이며 ‘밤실’이라고, 그리고 다름 아닌 ‘시’라고 말이다. 따라서 박종현 시인의 시 쓰기는 그리고 그가 쓴 시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오디세이일 수밖에. 다만 갸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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