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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生時 - 11 제2부 必 당신은 모두 당신이었다 - 15 必 쓰고 있다 - 16 必 한여름이고 한낮이다 - 17 必 꽃이 피어나려 한다 - 18 必 다시 열이틀을 - 19 必 염통을 먹는다 - 20 必 오늘은 좀 슬퍼도 되는데 - 21 必 날도 저물기 전 - 22 必 기약하지 않았는데 -23 必 죽어 간다 - 24 必 고양이가 있다 - 26 必 울음을 다 운 매미들이 - 28 必 비가 오니까 비가 온다 - 29 必 수국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 30 必 첫눈 내린다 - 31 必 꽃이 폈다 진 자리에 - 32 必 뱀눈박각시나방 하나 - 33 제3부 微影 - 37 깨지 않는 꿈 - 38 신묘장구대다라니 - 40 백일몽 - 42 천국을 보는 눈 - 43 간첩이 돌아왔다 - 46 晝夜長川 - 48 盡心 - 50 다시, 사랑한다고 발음하고 있었다 - 51 백년모텔 - 52 부정변증법 - 54 November Rain - 56 사순절 - 58 비 온다 - 59 神統記 - 60 한데서 국수를 먹다 보면 여기가 春川 같기도 하고 長江 같기도 하고 꿈결 같기도 하고 - 61 점심으로 설렁탕 먹으러 가던 길에…… - 62 공원에 앉아 있는데 나비 하나가…… - 63 목요일 저녁 두부를 사 들고…… - 64 回音 - 65 하지 - 66 제4부 必 불가능해졌다 오후가 - 69 必 비가 내린다 - 70 必 2시 3분이다 - 72 必 여름이 여름을 벗고 있다 - 74 必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 - 75 必 다 늦은 저녁이다 - 77 必 개미는 죽은 매미나 잠자리를 발견하면 - 78 必 지난여름 배롱나무 꽃 피었던 - 79 必 흰 개가 지나간다 - 80 必 그래요 다시 오월이에요 - 81 必 당신은 이미 기적이어서 - 83 必 가문비나무 그늘에 앉아 - 84 必 문산 가는 국도변에 한참을 앉아 - 85 必 비니루 한 장 - 86 必 겨우 말하고 있는 것이다 - 87 必 구 년이 지나갔다 - 88 必 붓꽃이 피었다 진 자리 - 89 必 바람이 분다 자야겠다 - 90 必 매염방이 노래를 부른다 - 91 必 라일락이 피고 있다 - 92 제5부 必 납일이다 - 95 必 눈, 저 눈, 저 텅 빈 눈 - 96 해설 조강석 사이를 쓰다 - 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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必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라는 문장은 저녁 바깥에 있다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라는 문장을 쓰는 저녁 바깥의 저녁은 이제 막 저녁이 되려 한다 아직 저녁은 오지 않았는데 그러나 저녁은 저녁 바깥으로부터 오고 나팔꽃은 서둘러 지려 하고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라는 문장을 쓰는 저녁 바깥의 저녁은 온통 저무는 중이다 나팔꽃은 낮과 밤을 언제부터 구분하기 시작했을까 그러나 나팔꽃은 저녁 바깥의 저녁에서 꽃잎을 오므리고 가시거미는 제가 뱉어 놓은 그물 속에서 깨어나려 하고 그러나 가시거미가 깁고 있는 저녁은 저녁이 오기 오래전부터 부서져 내린다 그러나 그런 저녁이 오고 있다라고 쓰는 저녁 바깥의 저녁 거기 당신 오랜만이군요 그러나 누구인가 당신은 왜 저녁 속으로 돌아가지 못하는가 저녁이 오고 있는데 저렇게 오고 있는데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라는 문장을 쓰고 있는 저녁의 바깥에서 내내 서성이기만 하는 당신 잘못 물들인 색화지처럼 저녁의 바깥으로 저며 들고 있는 저녁 그러나 나는 왜 이 문장을 기어이 완성하려 하는가 그러나 저기 분명 저녁이 오고 있는데 저녁이 오고 있다라고 쓰고 다시 고쳐 쓰는 저녁의 바깥은 아무런 뜻도 없이 저녁이 되어 가려 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저녁에서 사라진 당신 주여 내가 만족합니다 당신이 이루지 않고 떠난 저녁 그러나 마침내 저녁이 오고 있다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라는 문장은 끝끝내 저녁 바깥에 있고 지은 적 없는 죄가 불현듯 선명해지려 한다 백년모텔 열두 해 전에 헤어졌던 여자가 병이 들어 찾아왔다 오늘은 낮이 가장 긴 날이고 내일은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찾아 머리를 감는 날이다 나는 아직 모른다 낙숫물 소리는 여전히 가난하다 워킹팜은 일 년에 십 센티미터씩 움직인다 그러고는 일 년 전의 뿌리를 미련 없이 잘라 낸다 나는 아직 모른다 닭내장탕을 먹다 보면 삼양동 골목길이 떠오른다 내가 쓴 문장들은 서로를 조금씩 오독한다 한번 시작된 생은 멈추지 않는다 그래 인정한다 너는 나보다 조금 덜 미쳤던 거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성교를 끝낸 뒤 슬픔을 느낀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방금 전까진 개였는데 비로소 개가 된 느낌적 느낌이랄까 개로 오십 생을 살고 나면 인간이 된다고 한다 나는 아직 모른다 평생을 조롱받으며 사는 덴 딱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오늘을 과연 무슨 요일이라고 말해야 할까 마야인들이 남긴 일력에 따르자면 우리는 이미 죽어 있다 자신을 모욕하는 일은 참 쉬운 일이다 그날 본 꽃의 이름을 나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 다행이다 나만 나를 증오한 게 아니었다 나는 아직 모른다 모나크나비는 독풀 위에 알을 낳는다 내게 남은 건 머리카락 몇 올이 전부다 손가락이 자꾸 파래진다 벽지 속의 물고기가 화석이 되어 간다 나는 아직 알아서는 안 된다 오늘도 사랑할 사람이 생기려 한다 아직 세지 못한 은전들이 낭려하다 나는 선택했다 내 세월 속에 남기로 그러나 나는 모른다 작약을 심었던 마당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모든 길의 끝에는 무덤이 있다 쓰고 버린 이름들을 태운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또 백 년이 시작되는 중이다 나는 결코 모른다 내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름다웠을 여자 다 기억나려 한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必 눈, 저 눈, 저 텅 빈 눈, 저 텅 비고 새까만 눈, 공활한 눈, 티끌 하나 없는 눈, 유리구슬 같은 눈, 한때 하늘을 날아다녔던 눈, 이젠 지저귀지도 울지도 않는 눈, 더 이상 눈이 아닌 눈, 너무 말이 없는 눈, 너무 의미가 없는 눈, 천 개의 눈동자를 가진 눈, 흑색 왜성, 수백억 수천억 년 동안 사라지고 있는 눈, 꼼짝하지 않는 눈, 어떤 다짐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는 눈, 숨도 쉬지 않는 눈, 눈뿐인 눈, 오로지 눈인 눈, 눈만 남은 눈, 녹지도 썩지도 않는 눈, 죽었는데 죽지도 않는 눈, 죽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눈, 바라보기만 하는 눈, 내가 이 길을 지나갈 때까지 내가 이 길을 지나가다 잠시 멈춰 설 때까지 내가 이 길을 지나가다 잠시 멈춰 서서 문득 쳐다볼 때까지 영원인 듯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눈, 속절없이 대책 없이 눈뜨고 있는 눈, 내 눈을 관통하고 있는 눈, 내 해골을 꿰뚫고 있는 눈, 맞바라보다 불타 죽을 것만 같은 눈, 저 눈, 처음부터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고 있는, 눈, 완벽한, 눈, 滅, 다시 滿開하는, 꽃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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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비가 온다 비가 온다라고 쓴다 고양이가 지나가고 있다 고양이가 지나가고 있다라고 쓴다 정말 고양이가 비를 맞으면서 지나간다 모처럼 아프다 아프니까 착해진다 아프니까 착한 마음으로 쓴다 공들여 쓴다 오늘은 하루 종일 구름을 볼 수 있겠구나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다라고 쓴다 오랜만에 착한 마음으로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본다 바라본다라고 쓴다 당신처럼 바라본다 당신이 나를 바라보았듯이 바라본다라고 쓴다 이 문장은 나흘째 내리는 빗소리보다 어둡다 아직 그 사람은 어두운 여인숙에서 바쿠닌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어떤 문장은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기어이 써야만 한다 반드시라고 쓴다 必은 평생 심장에 꽂힌 칼을 본떠 만든 것이다 이를 악문다 이를 악문다라고 쓴다 이가 아프다 정말 아프다 아프니까 또렷해진다 또렷한 정신으로 라일락을 심으러 갈 것이다 이 비가 그치기 전에 그러나 비는 비가 온다라는 문장과 상관없이 그치지 않는다 그치지 않는 빗속에서 라일락이 꽃을 피운다 라일락이 피는 덴 아무 이유가 없다 그러나 한번 잘못 쓴 문장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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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必)’은 ‘반드시’, ‘기필코’, ‘틀림없이’라는 뜻이고, “평생 심장에 꽂힌 칼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심장에 꽂힌 칼”이라니, 그것은 필시 ‘회한’의 한 형상일 듯하다. 물그릇을 들고 자빠진 사람처럼 후회란 두 가지 아이러니에 직면해 있다. 한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엎질러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책망감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몇 번이고 다시 엎지르게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반복과 지속은 회한의 방법이자 목표다. ‘대화공원 앞 삼사 차선에 로드킬된 고양이’부터 ‘뱀눈박각시나방을 떠메고 가는 개미’까지, ‘떨어져 터진 살구 알’에서 ‘십육 년을 함께 살다 죽은 개’까지 죽음은 시집 도처에서 나타나고 반복된다. 죽음이 편재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각각의 죽음이 회한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저녁의 어스름이나 끝도 없이 내리는 비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죽음과 저녁과 비의 영원회귀가 새겨 놓은 회한의 형상이 ‘필(必)’이다. 회한 속에서 완수하지 못한 혁명과 연애와 무수한 생사고락이 ‘자기’를 벗고 다시 태어난다. 여름이 여름을 벗고, 참나무가 참나무를, 그늘이 그늘을, 붉은괭이밥이 붉은괭이밥을 벗고, ‘자기’가 되려 한다. 이 회한은 단지 지난 시간의 기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생되는 기억이기에 “生前과 死前은 같은 말이다”. 그래서 구 년은 하루 같고, 십사 년 동안 강릉엔 비가 내리고, 사월의 비는 오월까지 내리며, 이십일 년 전 삼양교회 중등부는 크리스마스캐럴을 아직까지 부르고, 스물여덟 해 전의 그 사람은 여태 차비가 없다. 같은 이유로 그는 “깨지 않는 꿈”속에서 찢긴 깃발을 부여잡고 서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오늘 내리는 비가 오로지 비 오는 오늘을 완성’해 가듯이 ‘스스로 그러한’ 자재함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로 한 문장(세계)을 완성해 놓았다. 거기에는 살이 녹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도 붙들어야 할 이유가 있고, 그 세계는 마치 세상을 버린 사람의 노래처럼 가없이 슬프고 처연하게 가라앉는다. ‘틀림없이’ 아름답고 ‘마침내’ 아프다. - 이현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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