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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삶이 위대한 것을 - 11 유거(幽居) - 12 일비 오는 날 - 14 꽃망울 부푸는 뜨락에서 - 16 찬 꽃 한 채 - 17 끈 - 18 영겁회귀 - 19 경칩 어름에서 - 20 모루는 내 안에도 있다 - 22 호두나무 아래서 - 23 풀싹의 노래 - 24 봄 산에 들면 - 25 해토머리 - 26 누가 저녁놀을 내버렸나 - 27 지조론 - 28 12. 10, 2024-황동규 시인께 - 29 벌의 행각 - 30 제2부 향내 한 점-먼저 떠난 그대를 생각하며 - 33 달개비 혹은 파킨슨을 위해 - 34 벚꽃 엔딩 - 36 도사리 송(頌) - 38 노근을 보며 - 40 헌 신발 - 41 고요 감옥 - 42 늦가을 떼 기러기를 보며 - 43 생의 기쁨 - 44 죽은 새끼 고양이를 묻고서-구하는 게 더는 없으니 나고 죽을 일이 없네 - 46 인간이나 짐승이나-사람도 검정 비닐봉지에 산 영아를 담아 버린다 - 47 문패 - 48 나무도 채근담을 읽는다 - 50 백비(白碑)를 읽으며 - 51 어떤 한 수작 - 52 그 고양이 - 53 매미의 시 - 54 제3부 북녘 집 - 57 바랭이풀 - 58 추석날 아침 - 59 시의 길 - 60 제물인 듯 아닌 듯 - 62 가객 - 63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 - 64 가을, 밤이 길어지면 - 66 세상 뜰 준비를 하는 - 68 감을 따며 - 69 그 - 70 삶이 아름다운 것은 - 71 안항(雁行) - 72 뒤돌아본 기억의 문턱이 닳는다 - 73 늦겨울 산에서 - 74 분꽃 필 무렵 - 75 제4부 야단법석(野壇法席) - 79 납설(臘雪) - 80 도깨비바늘 - 81 기억만이 전부인 세월에 - 82 한식 근방 - 84 확증편향설 - 86 초겨울 나준녘 - 87 바위 - 88 복대 - 89 체취 - 90 희망 한 줄 - 91 귀촌 일월 - 92 봄날의 작문 - 93 낫을 갈며 - 94 시간 속에도 거울이 - 95 와병이 깊고 보니 - 96 시인의 시화 오류헌 시화 - 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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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위대한 것을
신새벽부터 뒷산 골짜기를 통째 등에 지고 울며 다니는 꾀꼬리 무엇이 저를 저리 내모는가. 학교 문턱에는 아예 들어선 적 없어 배움이 없던 아버지는 자식들 학비 조달에 쪼들려 왼 생을 탕진했지 오늘 해외직구로 받아 든 약병을 들여다보며 영문을 더듬더듬 읽던 나는 문득 당신의 수고에 소름 돋았다. 터앝 밭이랑에 한참 전 묻어 둔 종자가 싹을 틔워 올라올 때 하루 일 마치고 모처럼 땀 들이며 그늘에서 쉴 때 해 막 진 뒤 땅거미 전까지 환한 박명 속에 앉아 멍때릴 때 그날그날이 이 자잘한 것들 덕분이란 문득 든 터득에 나는 그저 턱없이 고마운 것을 삶이 거대한 것을…… · 찬 꽃 한 채 간밤 내 누가 와 달그럭대며 문고리를 땄는가. 새벽녘 한기에도 빗장 풀고 꽃부리 활짝 열어젖힌 매화 한 송이. 거기 저 안쪽 내당에선 정근(情勤)이라도 하는지 간밤 내내 흘러나왔노니 뮤즈여 뮤즈여 시의 딸이여 명호 되뇌어 읊는 소리. 이제 나는 저 시린 찬 꽃으로 으늑한 여기 절집이나 한 채 지어 두고 가려 한다. *절집 한 채: 서정주의 시 「가벼이」에서 가져왔음. · 벚꽃 엔딩 한 사흘 왁자지껄 난장판이더니 무슨 즐거움들인가 까르르 까르르…… 더러는 스크럼 짜 서로 붙안고 더러는 제각각 입 가리고 키들대더니 저 경쾌한 웃음소리 허공 너머로 사라진다. 까르르 까르르…… 가물가물 뒤태를 보이며 바람의 목덜미를 꼭 붙안고 가는 축도 있다. 그러다 문득 일시에 네 가닥 꽃잎을 짜갠 일시에 만발한 벚꽃들이 폭파당한 건물 내려앉듯 그 자리에 뭉글뭉글 흙먼지 아닌 자욱한 낙화가 되어 솟구쳐 날아오른다. 보아라 봐 마치 종언이란 이렇다는 듯 이거 보라는 듯 왕벚나무 우듬지로부터 눈부신 부실 덩어리 한 동 건물이 때아닌 초강풍에 붕괴하고 있다. 막장 끝판다워 더 아름답게 저무는 봄날. ·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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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따라나선 지 햇수로 60여 년, 그동안 나는 줄곧 내 얘기들을 해 왔다. 시는 장차 나를 또 어디로 무슨 얘기 속으로 끌고 갈 것인지. 그런데 이제 서서히 깃발을 내릴 때가 오는 것 같다.
종착의 여기까지 나를 이르게 한 많은 이들과 모든 것에 두루 무한 감사한다. 2026년 이른 여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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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생명들이 살아온 위대한 시간과 생이 다하고 흘러갈 다음 세상에 대해 생각한다. [향내 한 점]은 죽음에 대한 비애의 표상을, 아프게 아름다웠던 생의 궤적을 현시한다. 영겁회귀하는 만상의 흐름을 계시한다. 생의 끝자락을 노래하는 시인의 시가 때로 아프게 진동한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는 “맹목의 푸른 절규”가(「바랭이풀」), “막장 끝판다워/더 아름답게 저무는” 벚꽃의 종언이(「벚꽃 엔딩」) 뭉클하게 몸을 훑고 지나간다. 삶과 죽음에 대한 서늘한 증언에는 즉자적 진경과 자유로운 상상이 거침없이 물결친다. “이제 그만 너덜너덜해진 옷은 벗어 버리고” “물이나 바람 한 줄기 기(氣)로 되돌아가/건곤을 자유로이 누비”고자 하는 소망에도 그러한 모습이 잘 드러난다(「와병이 깊고 보니」). 그러고 보면 죽음 이후에 펼쳐질 상상의 장면들은 역설적이게도 장쾌하고 역동적이며 활달하다. 죽음은 저 “십만억 평 광활한 하늘”로의 도약이므로, ‘대동’ 세계로의 진입이므로 슬퍼할 건 없으리. 한 생의 소멸은 결국 “일망무제 다음 세상”으로 나아가 “수수만 분해된 원자들로” 떠도는 과정이자 끝없이 몸을 바꾸는 과정이기에.(「끈」) 그리하여 여기 무한히 열린 ‘으늑한 절집 한 채’ 지어진다(「찬 꽃 한 채」). 그 속에서는 세속의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가, 영겁회귀의 시간이, 생의 열락과 허무, 생에의 긍정이 뒤섞인 채 무한 흘러간다. - 주영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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