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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공중 - 11 오렌지 기하학에 대한 질문 - 13 한 수국이 흐릿하게 피어 있다 - 15 북극여우 - 17 토핑 하나 얹어 줄까 - 19 갈매기들은 왜 해 지는 쪽으로 날아갈까 - 21 새와 케이크 - 23 너는 하지를 지하라고 읽고 - 25 오렌지주스와 허브차 - 27 너는 누구? - 29 모른다 카페 - 31 그는 그를 보았다 - 33 뜻밖의 정체성 - 35 제2부 카레의 비율 - 39 봄날 같은, 돈키호테 같은 - 41 낮잠 - 43 찰리와 나 - 45 밤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 47 여름밤 - 49 좀 전에 어두웠는데 좀 전이 환해진다 - 51 새 발자국 - 53 불현 모래바람 불어오고 - 55 샷 추가 - 5 양배추 물김치 - 59 나는 묻는다 - 62 검은 상자 - 64 제3부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 69 굴절 - 71 어둠에 익숙해서 - 73 사막 연등 - 75 까마귀 떼 날아오르고 - 77 장마 1 - 79 한때 나는 - 80 지나가는 비 - 82 착각 - 84 밤이 열려 있다 - 86 강물의 문제 - 88 새 - 90 홍천 홍천 - 92 저기 문지방 넘어 한 저녁이 - 94 문 - 96 제4부 바퀴벌레 - 101 권태 - 103 보라 감정 - 105 그때 너는 열쇠를 잃어버렸고 - 106 불면의 안과 밖 - 108 장마 2 - 110 소금밭을 지나가고 있었다 - 112 회전하는 문 - 114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야 - 116 편지―허난설헌 묘소에서 - 118 아마 화요일이었을 거야 - 120 여기 온 적 없는데 - 122 흐린 날 - 124 해설 송현지 겹쳐진 상자 위에서 쓴 시 - 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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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 속에는
완벽한 위장술로 겨울을 사는 북극여우 한 마리가 있다 액자 속은 환한 밤중이다 얼음 벌판을 달리는 저 여우는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제자리이다 불 좀 켜 봐! 너는 남의 시간을 빌려 쓰는 것 같아 벽시계를 걸지 않는다 했다 그러나 내가 빌려 쓴 너의 시간은 지금 열두 시 조금 넘었다 북극은 난이도 높은 수학 문제를 풀어야 도착할 것 같은 곳 자다 깬 아이가 가위를 들고 방 안을 돌다 여우의 꼬리를 잘랐는지 다시 잠이 든다 나는 수십 년 우리의 여우를 찾아 헤매는 중 같은 길을 빙빙 돌며 눈길에 푹푹 빠지며 그동안 넌 뭘 보았니? 눈이 까만 그놈은 어디로 갔지? 저~쪽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킨다 꼬리 없는 여우가 슬그머니 액자 속을 빠져나간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네가 내 꿈을 꾼다 ■ --- 「북극여우」 중에서 며칠 묵어갈 건가요? 오늘 저녁은 카레를 해야겠어요 감자 양파 당근은 당근 양파 감자로 순서 없이 넣어도 되고요 비율 같은 건 중요하지 않죠 뒤죽박죽도 그 안에 다 있거든요 섞이며 떠나고 섞이며 만나는 사람들의 일처럼 글쎄요, 잠시 함박꽃이 왔다 갔나 봐요 냄비는 냄비의 마음으로 퍽퍽 끓고 저녁은 저녁의 마음으로 돌담을 쌓겠죠 너무 많다고요 얼렸다 먹는 재미도 쏠쏠하니까요 넘치지 않도록 저어 주는 일도 쉽지 않아요 냄비 속 그늘은 닦아도 닦아도 그늘로 남아 있고 생각 없이 얼었다 녹은 그것들 노란 가루 뒤집어쓴 당근의 속마음을 누가 알겠어요 ■ --- 「카레의 비율」 중에서 어느 날 상자 속에서 상자가 걸어 나오는 걸 본 적 있다 상자가 상자를 잡아먹고 상자 속으로 들어간 걸 본 적 있다 멀쩡하게 입던 옷 자르고 잘라, 보자기를 만들고 입구 없는 자루를 만들고 그 안에 무엇을 넣을 것인지 생각도 없이 손을 집어넣으면 순식간에 손이 사라지고 물갈퀴 달린 오리발이 나오듯 그런 징그러운 발을 누구나 갖고 있다는데 그런데 그 상자를 누가 줬지? 글쎄, 어젯밤 꿈에 본 날개 부러진 까마귀한테 받았나 밤길 걸을 때 누가 뒤집어씌웠나 골목 끝에서 귀가 담벼락에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러게 밤중에 혼자 중얼거리며 돌아다니지 마 검은 상자 귀신이 후룩 보쌈이라도 할지 모르니까 ■ --- 「검은 상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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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막다른 골목 끝에서 너를 만났다 낯선 말이 튀어나왔다 어느 실성한 봄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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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 상상력과 시간의 틈을 여는 시선이 함께 사는 풍경이 펼쳐진다. “터덜터덜 벚나무 길을 걸으며 굴비 사러 가는데 느닷없이 낡은 갑옷 입고 나타난 돈키호테”가 녹슨 창을 휘두르는가 하면(「봄날 같은, 돈키호테 같은」) 문득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떠올려 보기도 하는 일이 마치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그려진다(「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그런가 하면 이 시집의 중심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을, 제각각 이름을 지녔을 수많은 새들이 퍼덕이며 시집 곳곳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이 시집의 첫인상이라면, 그 기저에, 돈키호테가 휘두르는 녹슨 창에 “산산조각 난 햇빛”으로 “난분분한 봄날”이 있고(「봄날 같은, 돈키호테 같은」), “돌아오지 않는 한 빗방울의 이름”을 생각하며 우뚝 선 이가 있고(「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햇빛 쏟아져 눈이 부신데” 날지 못하는 새를 지켜보는 찬찬한 시선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새」). 양가적인 이미지들인 저 돈키호테의 녹슨 창과 낱낱의 빗방울과 가득한 새 떼들은 다름 아니라 시간일 것이다. 돈키호테는 시간의 창을 휘둘러 일상에 균열을 내고, 삶을 가득 덮어 오는 시간 가운데 유독 귀환하지 않은 어느 때가 찰나에 틈입하고, 마냥 내 편일 것 같았던 시간이 어느 날 문득 발뒤꿈치를 가볍게 하지 않는 일이 생의 어디쯤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집에서 가장 오래 마음을 끄는 한 시의 제목처럼 “아마 화요일이었을”지도 모른다(「아마 화요일이었을 거야」). “반짝반짝 냄비를 닦던” 어느 화요일 “잠깐 눈 감은 사이” “여름 언덕으로 사라지”는 사람을 데려가는 시간, 한참이나 남은 일들을 헤아리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는 어느 하루. 많이 내다보고 잠깐 뒤돌아보는 그런 하루. 이 모든 의미에서 이 시집은 화요일의 시집이다. - 조강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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