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유희는 방패가 된다. 절망이 오히려 유희와 기교를 낳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준 시인들을 우리는 더러 기억한다. 그 경우 대개 유희는 다시 절망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김건영은 양자가 한 몸에 사는 집을 짓고 있다. 즉, 가짜로 진짜를 말하고 진짜로 가짜를 말할 “Lie Sense”를 자유자재로 활용한다는 말이다. 얼핏 비슷한 양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앞의 예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이 유희가 방편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것이다. 무슨 거창한 이념이나 비판적 사상을 달콤하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가지고 노는 재미에 시의 본질이 있다. 이 시집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를 원용해서 말해 보자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뱀의 머리와 꼬리를 어떻게, 그리고 왜 구분해야 하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 자체가 몸통이다. 바로 그것이 김건영에게 상급의 ‘라이센스’가 부여될 수 있는 까닭이다. 예컨대, 이런 문장, “이자가 많아서 걸린다”, 이것은 김수영의 문장을 패러디한 것이지만 김수영이 스스로 안일한 의식을 경계하는 맥락을 오늘의 삶의 헛속을 적시하는 촌철로 이어받고 있다.
헛속이라고 위에 썼다. 그러고 보니 이 시집에 자주 엿보이는 시어들(‘뱀, 집, 어둠’ 등) 중 가장 강렬한 시어가 하나 떠오른다. ‘귀신’이다. “눈을 감으면 마음이 낫던 때가 있었는데”(「감나빗」), “간절히 도착을 바랐으나 어둠 속에 있다”와(「빚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같은 문장들과 각각의 시의 제목의 겉과 속이 따로 없다. 현실로부터의 유리감과 유리처럼 투명한 언어 사이에 이격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귀신의 집이다, 이 귀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