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자 시인은 멀어지는 사람이다. 안과 밖으로부터. 겉과 속으로부터. 국내와 국외로부터. 아이와 어른으로부터. 진실과 거짓말로부터. 식탁과 심장과 햇살로부터. 나와 당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이다. 멀어지고 멀어지다가 단숨에 가까워지는 사람이다. 시인은 자기 자신마저 멀어지면서 세계와의 거리를 재조정한다. 시인은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면서 언어로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다. 언어의 실험실에서 “거기로 사라지거나/여기로 돌아오”는 사람이다(「거기와 여기」). “칼날에 묻은 허기/살 오른 방들의 침묵/식탁의 모든 영역”을 다른 차원으로 배치하는 사람이다(「관계」). 멀어지는 사람은 멀어진 사람과의 경계에 무늬를 펼친다. 시인의 궤적을 추적해 보면, 이곳과 저곳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삶의 무늬가 남는다. 사람의 체취가 흐른다. 시인은 이방인의 삶을 자처한다. 집과 식탁에서, 공항과 기차에서 마주한 상처를 언어로 새긴다. 그곳은 아름다운 무늬들로 일렁인다. 시인은 “나는 나만의 무늬를 잃었고/밝히기 난해한 직업을 가졌습니다”라고 고백하며(「통계 센터」) “콕콕 찌르는 바늘의 기억을 따라 남자의 무늬를 그려” 본다(「용산행」). 이방인의 ‘시간은 잘게 쪼개지면서 또 다른 무늬’를 생성한다(「직소 퍼즐」). 무늬에 반사되는 무늬들. 반추(反芻). 반성(反省). 반야(般若). 무늬에 갇혀 있는 울음. 울음에 묶인 심장. 심장을 겹쳐 놓는 시인. 시인은 언어를 통해 “우리였다가 밖이었다가/끊임없이 선을 긋고 다시 허문다”(「붉은토끼풀꽃」). 이방인은 때때로 “거울 안에 살아 있었으나 나를 읽을 수 없”는 유령으로 변하거나(「훔쳐 읽었다」), 때때로 “망설일 틈을 주지 않고 후루룩 넘어가 버리는” 물체가 된다(「우리는 국수를 싫어했다」). 나는 ‘시인-이방인’의 탄생의 순간을 목격한다. 이 시집을 끝까지 읽으면 무늬 뒤에서 멀겋게 웃는 당신을 만날 수 있다. ‘산세베리아 뒤에 숨은 검은 모서리’의 정체를 알 수 있다(「집의 매너리즘」). 비극의 맛을 경험하고서도 기어이 멀어지는 당신, 이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을 기어코 온몸의 무늬로 남기고자 하는 당신, 시인! 이방인, 적법한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