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어야 할 인간의 얼굴
『제주 4·3과 의료인들』은 ‘제주 4·3’의 숨겨진 장을 새롭게 밝혀 주는 귀한 기록이다. 우리는 ‘제주 4·3’을 말할 때, 무장대와 토벌대, 민간인 희생과 진상 규명이라는 거대한 서사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의료’라는 본질적이고 인간적인 행위를 포기하지 않은 의료인들의 고난과 헌신, 그리고 이념의 경계를 넘어 환자를 돌본 인간적 윤리를 조명한다. 아날 학파가 얘기하는 미세역사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업이라 하겠다. 저자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4·3항쟁’,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날의 치유 노력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제주 의료계의 궤적을 추적한다. 초창기 의생 제도와 한지의사, 여성 간호사와 산파의 등장, 재일제주 의료인의 활동까지 아우르며,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서술한다. ‘4·3항쟁’ 당시 제주에는 의료인이 2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념을 넘어 무장대든 토벌대든 가리지 않고 치료했지만, 그로 인해 ‘내통 혐의’를 받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남로당 활동가로, 누군가는 대동청년단으로, 또 누군가는 오직 사람을 살리겠다는 사명 하나로 ‘4·3’의 광풍 속에 우뚝 섰다. 이 책은 그들의 선택이 윤리이고 정의였으며, 기억되어야 할 인간의 얼굴이었음을 말한다. 책은 당시 제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의사, 간호사, 약제사, 약종상 등의 역할과 희생을 역사적 서사로 풀어내며, 의료인의 윤리적 책무와 제주사회의 집단적 아픔을 연결한다. 특히 여의사, 간호사, 산파 등 여성 의료인의 활약을 상세히 기술하며, 일제강점기와 8·15 직후의 여성해방적 상황까지 함께 고찰한다. 이 책은 ‘4·3’의 다층적 이해를 위해 의료인의 시각을 도입함으로 ‘기억·책임·치유’라는 화두를 다시금 우리 사회에 제기한다. 그리하여 거대한 의의를 갖는다. 『제주 4·3과 의료인들』은 정치와 이념으로만 접근해 온 ‘4·3’의 기억을 넘어선다. ‘의료’라는 인간적 윤리를 통해 ‘4·3’을 다시 묻고, 다시 기억하게 한다. 생명과 정의, 인간성과 침묵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가’를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단순한 의료사 복원이 아니다. ‘4·3’이라는 민중사의 중심에서 의사, 간호사, 약제사, 산파들이 겪은 고통과 선택, 윤리와 연민을 온전한 언어로 기록하는 첫 시도다. ‘제주 4·3’의 진실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
게 이 책은 반드시 읽혀야 할 귀중한 증언이다. 아울러 자료로서 길이 생존해야 할 소중한 기록이다. ‘4·3’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의 길에 청춘을 보낸 한 사람으로서, 또한 역사학자로서 이 책의 출간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