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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제주 섬에서 나고 자라다
제2장 서울에서 대학 생활 제3장 조작된 정치범 - 시련의 시작 제4장 도쿄대학에서 유학 생활 제5장 귀국과 배재대학교 교수 제6장 제주‘4·3’운동 - 진실을 밝히자 제7장 국회의원(제17대·제18대·제19대·제20대) 제8장 주일본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참고 자료 1 한겨레신문, 대사 부임 인터뷰 _ 355 참고 자료 2 일본 언론인 단체 ‘9월회’ 발표문 _ 366 참고 자료 3 귀국 직후, 중앙일보 인터뷰 _ 372 참고 자료 4 중앙일보 인터뷰, 한·일관계 전망 _ 376 주요 이력 _ 381 주요 논저 _ 385 한국인 인명색인 _ 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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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쉽게 타자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사물과 현상 모든 것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섬 속에서 뭍을 꿈꾸며 살아간다. 나 역시 지금도 평생 섬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섬이라는 분절된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평생을 힘겹게 싸워왔는지도 모르겠다. 섬과 뭍을 초월한 진정한 자유인. 내가 꿈꾸는 이상이다.
--- p.31 제주 오현고등학교 학생들이 데모했다는 기사가 중앙일간지에도 실렸다. 광주일고와 더불어 전국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고등학생들의 시위였다. 그로 인해 당시 제주 경찰국장이 경질됐고 교육감도 몇 개월 후에 사임했으며, 한동안 오현학원은 재단 파동으로 몸살을 앓았다. 제주도 사회가 발칵 뒤집힌 유명사건이 된 것이다. --- p.65 그날 모인 사람들은 일단 “좋다, ‘4·3’을 다뤄보자”라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뒤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선배들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4·3’은 안 된다”라며 실태조사 연구를 강하게 반대했다.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시국도 그러하니 다른 주제를 찾기로 했다. 어렵게 다시 동의를 얻어 낸 것이 바로 〈제주 할망당 본풀이 조사〉였다. --- p.79 나는 마로니에 나무 아래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목을 놓아 울고 말았다. 부끄러웠다. 하늘을 올려다볼 용기가 없을 정도로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시간이 지나도 살려달라는 후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가시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지고, 나는 태양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골방에만 깊숙이 처박혀 삶에 대해 고민했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과 처지, 그리고 불의에 신음하고 있는 학생들과 민중들이다. --- p.87 해가 바뀐 1974년 1월 초, 서울 영등포 부근 한 여관에 황인범·김수길·김영준 등 열댓 명이 모였다. 시국 토론과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1박 2일 워크숍이었다. 현 정세와 조직의 성격, 그리고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일을 도모하고 추진해갈 것인지 토론하는 자리였다. 이날 모임 이후 서울대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학교 학생과 접촉하며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 준비를 계속해나갔다. 전국대학생연맹-‘전학련’)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 p.94 ‘민청학련’ 사건은 ‘머리’의 투쟁이 아니라 ‘몸’의 투쟁이었다. 꽁꽁 틀어 막혀 있었던 ‘몸의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었다. 이념을 중심에 두었던 투쟁이 아닌, 선과 악, 정의와 불의라는 구도 속에서의 투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오로지 열망했던 것은 ‘민주주의’의 회복이었다. 불의의 권력에 의한 억압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 ‘몸의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 p.97 최후 진술을 하던 날, 나는 동학농민전쟁 때 나왔던 말을 빌려 당당하게 말했다. “이건 모두 날조된 쇼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난을 일으킨 자보다 일어나게 한 자가 더 나쁜 것 아닙니까? 이 사건의 근본은 거기에 있습니다!” --- p.106 마침내 4월 3일 이종원 목사님 댁에서 위령제를 지내기로 했다. 그날 김명식 시인이 아주 웅장한 서사시를 써왔다. 간단히 차려진 제상을 앞에 두고 김명식 시인이 써온 조시-弔詩)를 읽었다. 한 서린 제주의 슬픔이 시가 되어,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눈물처럼 흘러넘쳤다. 약소했지만 ‘4·3’의 억울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31년 만의 첫 행사였다. 김명식 시인이 축문을 태우듯 낭독한 조시를 태웠다. 너풀너풀 재가 되어 높이 올라가는 위령의 시어들이 하늘에 계신 희생자들에게 전달되길 빌었다. --- p.128 우리들은 ‘YWCA 위장결혼식’에 잠깐 들러서 사람 숫자라도 채워줄 생각으로 거기에 잠깐 들렀다가, 목사님 댁에 가기로 했다. 500여 명의 사람들이 이미 1층 강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신랑 입장과 동시에 유인물이 살포되었고, 전 공화당 국회의원 박종태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선출에 반대한다는 취지문을 낭독했다. ‘통대선출 반대’, ‘거국 민주 내각 구성’을 촉구하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 p.131 일본유학의 의미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우선 일본에만 있는 자료를 가지고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석사과정 전공 분야는 일제 침략사 쪽으로 정했다. 당시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후지오 망언’ 등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등, 일본 우익들이 활동을 활발하게 할 때였다. --- p.149 ‘6·29’ 선언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 때였는데도 방해 공작은 없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처음에 동참을 약속한 유학생들도 정작 행사장에는 많이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규배 등 제주 출신 유학생 50여 명은 자리를 같이했다. ‘4·3’ 사건에 대한 조명이 시작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서울과 도쿄에서 각각 500~600여 명씩이나 참석한 성공적인 행사였다. 이로써 ‘4·3’ 사건은 일본과 한국의 언론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세계적인 사건이 되었다. --- p.191 마침내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우리가 제출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제주도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오랫동안, 이 법안을 위해 함께 노력한 사람들, 안팎에서 도와준 사람들, 다른 법안을 준비했던 변정일 의원까지 모두 다 너무나 고마웠다. --- p.206 회의하는데 강원도의 초선의원인 김진태-현 강원도지사)가 깽판을 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배도, 질서도 모르는 양아치”라고 일갈했다. 그것이 카메라에 잡혀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많은 지인이 달마대사처럼 생겼는데, 어떻게 그렇게 욕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경향신문에서는 ‘양아치’의 유래에 대한 해설이 나올 정도였다. 양아치는 병자호란 때에 생긴 말로 ‘동냥아치’의 준말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그런 유래를 처음 알았다. --- p.273 2022년 5월, 천황의 신임장 제정식이 있었다. 한국의 한복을 입고 갔다. 천황은 학습원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신 분으로 특히 수운과 해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나도 역사학을 한지라 얘깃거리가 많았다. 한 30여 분 이런저런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 “일한 우호 증진을 위해 애써달라”라고 하고, 나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애써주십시오”라고 부탁을 드리기도 했다. --- p.317 실제로 삼중수소는 표층수가 아니라 심층수이기 때문에 미국이나 캐나다로 갈 리가 없다. 또한 한국처럼 생선회를 별로 먹지도 않는 곳이다. 당연히 주변 피해지역의 의견을 들어야 하고, 바다 환경 전문가들도 참여해야 한다. 그럼에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한국의 윤석열 정부는 ‘괴담’이라고 하면서 도쿄전력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다. 오염수를 처리한다고 하는 알프스-다핵종제거 설비)는 계속 문제를 발생하게 될 것이다. --- p.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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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역사학자이자 정치인인 강창일의 인생 역정을 엮은 책이다. 저자는 이전에 『정면승부』(2011년 11월)와 『여의도에서 이어도를 꿈 꾸다』(2013년 6월)라는 책을 출간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책을 출간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정치인 이전에 역사학자다. (중략) 구한말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다른 차원에서 한말의 정치와 사회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지방에서 풍문에 의해 접한 것을 가지고 쓴 것도 있기 때문에 사실과 부합되지 않거나, 자기중심적 서술이 갖는 한계가 있음에도, 한말이라는 시대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색다르고 귀중한 자료다. 나도 황현처럼 시대증언록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쓰기로 했다. 이 책의 부제가 ‘조작된 정치범의 시대증언록’이 된 이유다. 이 책은 격동기인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참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그리고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국가권력에 의해 굴절되고 적응해나가는가 하는 것을, 나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시대 증언록’이라고 하고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소위 민청학련 관련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고등학교 3학년 때,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하여 기소되기도 했던 그였기에 대학 진학과 함께 반독재투쟁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서울대 재학시절 반유신 투쟁의 민주화 운동인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 생활도 했다. 이 사건은 유신체제 때 국가공권력에 의한 최대의 용공 조작 사건으로, 이 땅에서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지식인이나 학생의 반유신 운동을 영원히 없애서 영구집권하겠다는 독재자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무려 1,024명이 체포·구금되고, 180여 명이 비상군법회의에 기소·구속되었다. 박정권 치하에서 일어난 최대의 용공 조작 사건이었다. 형 집행정지로 1년 여 만에 수감에서 대부분 풀려났지만, 이들의 이후 삶은 결코 편안치 않았다. ‘긴장의 끈’이 너무 팽배하고 30여 년이라는 장시간 지속되어, 대부분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권력은 개인의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러한 짓을 당연한 것처럼 자행하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시련이었다. 국가공권력에 의해 한 삶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그때의 동지들을 보면서 처절히 느낀다. 대부분 ‘낭인’처럼 살아가기도 하고, 소식조차 끊기는가 하면, 정신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다. 김병곤·제정구·강구철·여익구·박석률·나병식·방인철·박형선·최민화·김수길·정재돈·하태수 등 40여 분이 5, 60대에 돌아가셨다. 요즘 같으면 요절이라고 하겠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박형규(작고)·안재웅·정상복·김경남(작고)·이광일·김형기·구창완·신대균·이원희·이상익 등의 목사들이 있다. 목사가 많은 것은 당시 기독교가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KSCF를 비롯하여 기독교 계통의 관계 학생들이 많이 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수로는 서중석·유홍준·권진관·최권행·백영서·이종구·임상우 등이 있다. 정치 쪽에는 제정구·이철·유인태·장영달·이해찬·강창일·이학영 의원 등이 있다. 모두 합쳐도 3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도 일종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나도 아내가 일정을 물어보면, 짜증을 곧잘 낸다. 감시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트라우마이다. 당시는 몰랐지만 엄청난 고통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왔는가 하는 것도 삶의 한 과정이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자신의 대학시절과 함께 이 민청학련 관련 부분을 세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이 책은 이전에 펴냈던 『정면승부』(2011년 11월)와 『여의도에서 이어도를 꿈꾸다』(2013년 6월)의 증보판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그 후에 더욱 보강해야 했던 기억들과 에피소드가 추가 되었다. 특히, 사진을 많이 실었다. 최대한 앨범에서 찾아내고 주변에서 구해서 책에 실었다. 사진 한 장도 사료라는 생각에서. 이 책을 컬러로 찍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책 말미에 인명색인을 넣어 격동의 시대를 함께 했던 이들의 족적을 추적할 키워드로 남겼다. 1장_제주에서의 유년기와 청소년기, 2장_국사학도로서 대학 초입시절, 3장_민청학련사건과 그로 인한 인생 역정, 4장_도쿄대 유학시절의 이야기들, 5장_역사학자로서의 삶과 활동, 6장_4.3운동, 7장_국회의원 시절, 8장_일본대사 시절의 이야기들을 새롭게 엮어 넣었다. 요즘이야 각광받는 섬이지만, 역사적으로 반도의 내부식민지 였던 변방의 섬 ‘제주도’. 그 섬의 서쪽 작은 동네에서 태어난 짱돌같은 소년이 성장하고, 섬을 떠나 시대의 중심에 서서 자기 삶을 개척해 낸, 말 그대로 ‘격정의 55년’을 살아낸 인간 강창일의 면모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의 글 제18대 국회 때에 『정면승부』(2011년 11월)와 제19대 국회 때에 『여의도에서 이어도를 꿈 꾸다』(2013년 6월)라는 책을 출간했다. 『정면승부』는 어떻게 자라서 국회의원까지 하게 되었는가를 기록한 것이고, 『여의도에서 이어도를 꿈 꾸다』는 제17대와 제18대의 의정활동을 적어놓은 것이다. 그 후 20대를 끝내고 불출마하여, 대학에 돌아가 석좌교수를 하다가, 주일본 특명전권대사로 20여 개월 활동했다. 새롭게 첨가해야 할 부분이 있고, 고쳐야 할 곳도 많이 있음을 알았다. 앞의 책들을 토대로 하여 그 후의 일을 다시 정리하여 놓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증보판적 성격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나는 정치인 이전에 역사학자다. 전에는 대부분 관찬 사료를 중심으로 역사가 쓰여졌다.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에 의해 쓰인 것을 토대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민초들의 진정한 삶과 당시의 사회·정치 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구한말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다른 차원에서 한말의 정치와 사회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지방에서 풍문에 의해 접한 것을 가지고 쓴 것도 있기 때문에 사실과 부합되지 않거나, 자기중심적 서술이 갖는 한계가 있음에도, 한말이라는 시대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색다르고 귀중한 자료다. 나도 황현처럼 시대증언록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쓰기로 했다. 나를 보고 혹자들은 ‘파란만장한 풍운아’라고 한다. 혹자는 감옥을 갔다 왔으면서도 유학도 가고 교수도 하고 국회의원과 주일 대사를 지내었으니, 해볼 것은 다한 ‘출세한 인생’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니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 있었음을 알게 되고, 또한 나름의 트라우마도 있는 것 같다. ‘요시찰’이라고 하는 ‘빨간 딱지’로 30여 년을 감시 속에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격동기인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참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그리고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국가권력에 의해 굴절되고 적응해나가는가 하는 것을, 나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시대 증언록’이라고 하고 싶다. 자서전 성격의 기록이다 보니, 자기중심적으로 서술하게 되고,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이러한 문제는 본질적인 한계이기 때문에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하고, 사료 비판을 통해 극복할 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하여 기소되었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반유신 투쟁의 민주화 운동인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 생활도 했다. 이 사건은 유신체제 때 국가공권력에 의한 최대의 용공 조작 사건으로, 이 땅에서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지식인이나 학생의 반유신 운동을 영원히 없애서 영구집권하겠다는 독재자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무려 1,024명이 체포·구금되고, 180여 명이 비상군법회의에 기소·구속되었다. 그들은 나를 재경오현학우회 회장, 서울대학교 제주학우회 회장 그리고 불교 학생 대표로 집어넣고서, 일면식도 없는 제정구 같은 선배를 공범으로 묶어내는, 코미디 같은 짓도 서슴지 않았다. 1년 후에 대부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으나, 인혁당 관계자들 여덟 분은 사형에 처해져 ‘사법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김지하·이현배·이강철·장영달·유인태·정화영 등은 그 후에도 계속 장기간 영어 생활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우리들을 형 집행 정지로 석방하고 나서도 사회안전법으로 꽁꽁 묶어놓았고, 박정희가 암살되고 나서 사면·복권되었으나, ‘요시찰’로 낙인찍어 김대중 대통령 초기까지 감시하였다. ‘긴장의 끈’이 너무 팽배하고 30여 년이라는 장시간 지속되어, 대부분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권력은 개인의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러한 짓을 당연한 것처럼 자행하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시련이었다. 국가공권력에 의해 한 삶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그때의 동지들을 보면서 처절히 느낀다. 대부분 ‘낭인’처럼 살아가기도 하고, 소식조차 끊기는가 하면, 정신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다. 김병곤·제정구·강구철·여익구·박석률·나병식·방인철·박형선·최민화·김수길·정재돈·하태수 등 40여 분이 5, 60대에 돌아가셨다. 요즘 같으면 요절이라고 하겠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박형규(작고)·안재웅·정상복·김경남(작고)·이광일·김형기·구창완·신대균·이원희·이상익 등의 목사들이 있다. 목사가 많은 것은 당시 기독교가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KSCF를 비롯하여 기독교 계통의 관계 학생들이 많이 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수로는 서중석·유홍준·권진관·최권행·백영서·이종구·임상우 등이 있다. 정치 쪽에는 제정구·이철·유인태·장영달·이해찬·강창일·이학영 의원 등이 있다. 모두 합쳐도 3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도 일종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나도 아내가 일정을 물어보면, 짜증을 곧잘 낸다. 감시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트라우마이다. 당시는 몰랐지만 엄청난 고통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왔는가 하는 것도 삶의 한 과정이었다. 그중에는 생각을 바꾸어 달리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70년대에 박순식 선배(작고)가 이상한 글을 써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제1호라고 할 만하다. 그 후 김동길 교수(작고)·김지하 선배(작고) 등이 있다. 이것은 사상의 불철저성, 혹은 한계적 상황에서 도피로, 출세의 욕망으로, 정신적 질환 등으로 그 원인이 다양하다. 그러나 ‘4·19’세대나 ‘6·3’세대 혹은 ‘586’ 후배들하고는 괘를 매우 달리한다. ‘4·3’ 운동은 제주 출신으로서, 민주화 운동가로서, 역사학자로서 숙명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그래서 “온 청춘을 바치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름으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 후 정치인으로 변신했는데, 그것도 민주화 운동 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내리4선’이라는 새기록을 쓸 수 있었다. 2020년, 무난히 당선될 것이라는 국회의원을 박차고 나오려고 하니, 엄청난 정신적 방황과 고통이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가는 패턴이 다 바뀌어야 한다. 1년 정도 고민하다가, ‘세대교체’·‘정치교체’를 내걸어 과감히 결단을 내리었다. 모두가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훌륭한 후배들이 그 자리를 메꾸어주는 좋은 선례를 만들 수 있어서, 얼마나 잘한 일인가 하고 자위한다. 지나간 16년 간 국회의원의 시간이, “한여름의 ‘善夢’인가, 아니면 한겨울의 ‘惡夢’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아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 기간은 자기 시간이 없이 뛰어다니기만 했던 것 같다. 희생과 봉사 정신으로 헌신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권력이라 생각하여 군림하고 곁눈질하면서 나쁜 짓하는 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본분에 맞게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의원은 부정·부패의 상징처럼 되어 있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꼴뚜기 몇이 어물전을 다 더럽히는 형국이다. 요즘 여기저기서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너무 정치인 욕하지 마십시오. 너무나 힘든 자리입니다. 자기가 없이 살아가는, ‘헌신의 자리’입니다. 격려해 주세요. 그러나 군림하든지, 나쁜 짓 하면 가차 없이 채찍질해 주십시오”라고 한다. 국회가 왜 권력기관이 될 수 있는가. 실제 권력은 행정부가 장악하고 있는데, 그것을 견제·감시하는 것이 국회이기 때문에 관료가 의원의 말을 무시하지 못해서 생기는, 부수적인 것이다. 게다가 소수의 인원이고, 각 개인이 헌법기관이기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 보좌팀이 십여 명이고, 국가 돈을 가지고 해외 시찰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등 특권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아우라이고 신기루’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디에 가서도 무시 안 당하고 대접받는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현역에 있을 때는 어디에라도 전화하면 받는데, 그만두었더니 안 받는다”라고 한탄하는 자들도 있기는 하다. 마음껏 권력을 향유할 수가 있어서 그런 것에 맛을 들인 자들은 언젠가는 들통나서 지탄을 받게 된다.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남기가 매우 어렵다. 유혹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치판에는 이름 파는 데 정열을 쏟는 ‘관종’들이 많다. 명예를 존중해야 하는데, 유명해지려고 발버둥 친다. 실제로 나쁜 짓을 하여 당시는 지탄받을지언정, 훗날에는 아무 문제 없이 거뜬히 당선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름만 남고 나머지는 잊어버리는, 인간의 기억 한계이고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정치의 본질은 잊어버리고 정치공학에 능한 자들이 여의도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장 타락하기 쉬운 자리이기 때문에 늘 자기성찰, 성찰, 또 성찰해야 한다. 그동안 정치하면서 역사학자로서 느낀 감상을 가지고 정치인들을 유형화해 보았다. 이해를 위해 선비 ‘士’ 자를 붙여 나열한다. 현존하기 때문에 이름은 공개하지 않는다. 1) 장사(壯士)형 - 호탕하다. 싸움꾼으로 불의를 보면 돌진하는 스타일이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공격적이다. 잘못에 대해 투사처럼 대응한다. 2) 몽사(夢士)형 - 꿈꾸는 스타일로서 분에 넘치는 꿈을 갖고 정치를 한다. 스스로 언젠가는 대권을 장악하려는 꿈을 갖고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과잉 자의식으로 오버하는 경우가 많다. 3) 책사(策士)형 - 스스로 전략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때문에 늘 권력자 주변을 맴돌면서 접근한다. 4) 모사(謀士)형 - 정도가 아닌, 정치공학적 접근을 하면서 권력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성공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5) 지사(志士)형 - 행동도 생각도 지사처럼 한다. 정치의 본질을 늘 잊지 않고 실현해 나가려고 한다. 큰 정치인들은 이 지사적 면모를 갖고 있다. 단, 정치공학에 능하지 않고 독선적인 면이 있어서, 대중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6) 변사(辯士)형 - 연설을 잘하여 대중을 휘어잡는다. 만담가 스타일도 있어서 좌중을 갖고 논다. 요즘은 SNS를 통해 자주 소통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끌어나간다. 7) 면사(勉士)형 - 근면하고 착실히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는 모범생형 의원이다. 대중적 큰 인기는 없어도 지역 기반이 탄탄하여 장수한다. 8) 낭사(浪士)형 - 로맨티시스트형이다. 노는 것도 좋아하고 훈훈한 인간미가 넘쳐흘러 잔꾀부리는 정치꾼들하고는 달리, 주위에 많은 의원이 모여 즐긴다. 9) 박사(博士)형 - 공부를 많이 해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박학다식하여 이런저런 일에 많이 관계한다. 참모형이라든지 정책통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10) 첨사(諂士)형 - 아첨꾼형이다. 권력을 잡은 사람이 있으면 잽싸게 달려들어 아부하여 한자리한다. 그러나 동료들에게서는 손가락질 받기도 한다. 11) 한사(閑士)형 - 전형적인 한량이다. 노는 것 좋아하고 늘 여유가 있다. 게을러서 같이 일을 도모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사람은 좋아서, 주위에 많은 이들이 모여든다. 12) 망사(妄士)형 - 망령된 정치인이다. 정치의 본질에는 관심 없이 매명(賣名) 행위에 몰두하는 부류이다. 명예를 존중해야 하는데, 사술(邪術)에 걸렸는지 세 치 혀를 가지고 세상을 농락하는 ‘관종’ 스타일의 정치인이다. 요즘은 그런 정치인이 많이 보인다. 13) 잡사(雜士)형 - 잡스러운 정치인이다. 국회의원 자리를 권력으로 알고 주어진 특권을 마음껏 휘두른다. 돈이 있는 자들을 가까이하면서 후원금이나 정치자금을 거두어들이기도 한다. 결국은 문제가 되어 ‘불명예 제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단, 여러 유형이 있는데, 한 정치인이 두세 가지 유형을 공유한다. 예로, 김영삼은 지사형·낭사형·투사형이고, 김대중은 지사형·박사형·변사형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과연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늘 고민해본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면서, 자기 성찰하여 주기를 바란다(차후에 좀 더 구체화하여, 『정글 속의 동물』이라는 제명으로 출간하려고 한다). 家訓은 ‘和’이다.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라는 뜻이다. 대가족이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가신 어머님이 늘 몸으로 실천하면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글귀는 물처럼 살아가라는, 노자 도덕경의 ‘上善若水’이다. 물처럼 순리에 따라 살면서, 더불어 잘사는 ‘대동세상’ 세상을 꿈꾸었다. 내가 나고 자란 제주는 공동체 사회였다. 곧 더불어 사는 곳이었고, 노력한 만큼 거두어들이는 사회였다. 여기에서 체득한 지혜였을 것이다. 나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가르침을 철저히 믿는다. 동학농민전쟁을 연구하면서 배운 ‘人乃天’ 사상이기도 하다. 정치 신조는 ‘중도와 화쟁 사상’에 입각한 생산적 정치이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 극단을 가운데로 모아내어 제3의 생산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내 개인의 좌우명은 ‘安貧樂道, 安分知足, 自利利他’이다. 욕심은 헛된 것이니 재물에 탐내지 말고, 자기분수에 맞게 살고, 남을 도우라는 경구다.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한 것은 자기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잘될 때이다. 이때의 행복감이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베푸는 데 인색하지 마라, 오히려 더 베풀라”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리이타’의 삶을 추구하고자 해왔다. 나보고 복 중의 최고의 복인 ‘천귀(天貴)’를 타고났다고 한다. 귀인을 만나며 그들이 늘 도와준다는 복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반추해보니 사실 그렇다. 힘들었지만, 늘 웃으면서 신나게 살아왔다. 명예와 의리를 지키고, 정의를 존중하는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하다. 어릴 때 잘살아서인지, 돈에 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다. 본래 부끄러움 타는 성격이라, 권력욕은 있으면서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으로서는 부족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도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탈 없이 정치 생활을 마칠 수 있는 것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스님은 “노년은 아름다운 인생길이며 삶의 여정 중에서 마음을 비우며 살아가기에 좋은 나이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빈 마음’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혹자들은 노욕을 부리면 망령되었다고 한다. 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남은 생이 길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고 보상심리도 작용하여 너그러움이 없어진다. 이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더욱 조심하고 성찰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격변기 한국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그리고 1970년대부터 2000년대 한국의 사회와 정치는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데 참고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쓰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지만, 자서전적 성격의 서술이기 때문에 많은 자기중심적 기록이 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양해 구하는 바이다. 또한 사진 자료를 많이 수록하였다. 당시의 사진 그것도 충분히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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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일 선생이 자전적 시대증언록을 출간한다. 굴곡된 현대를 걸어온 우리세대는 자서전이 곧 시대증언이라고 생각되지만, 개인적 성장과정과 시대의 아픔을 별개의 장으로 구분해서 서술하고 있다.
뛰어난 운동가로, 훌륭한 역사학도로, 그리고 정도를 걷는 정치인으로 살아온 강 선생의 글에 많은 기대를 건다. 그의 올곧은 걸음과 예리한 통찰력이 그가 살아온 시대의 이야기를 현대사의 빈 공간에 채워넣는 꼭 알맞는 조각이 되어 비로소 우리 역사를 완성하는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그와 우리가 살아왔던 청년기는 너무나 굴곡진 역사였고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은 투쟁의 대열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의 ‘삼선개헌’,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체제, 저항하는 학생과 크리스찬 그리고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저항을 붉은 세력인 양 색깔을 칠해 자신들의 영구집권이 정당한 것처럼 만들려는 조작전문가들…. 이들이 부풀리고 만들어 낸 사건이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이다. “유신반대를 내걸고 유신정권을 몰아내는 청년 대열을 전국적으로 만들어 가자” 이것이 우리들의 목표였다. 전국적인 학생운동의 물결을 만들어 가려는 우리들을 터무니 없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반국가단체를 조직하여 국가를 전복하는 공산화 폭력혁명을 기도했다”는 게, 긴급조치 4호란 이름으로 유신정권이 발표한 내용이었다.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마저 “설마”하면서도 “뭔가 있으니 정부가 저렇게 광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이 격류 속에서 난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분들이 “우리들을 조종한 배후, 인민혁명당”이란 이름으로 여덟 분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뿐이 아니었다. 평온하게 살아가던 많은 시골 사람들도 갑자기 간첩단의 일원이 되어 언론을 장식하기도 했다. 울릉도 간첩단사건, 삼척간첩단사건…. 유신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기 위해서 수많은 이들을 고문하고 간첩단을 만들고 발표했다. 조국에서 공부하겠다고 귀국했던 재일동포유학생들도 아무 이유 없이 간첩으로 조작되었다. 그 희생자가 100명이 훨씬 넘었다. 엄청난 희생과 더 많은 긴급조치가 발표되었고, 박정희는 마침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살해되었다. 그리고 일어난 ‘12·12’쿠데타와 ‘5·18’광주민주항쟁의 핏빛 강물을 건너서야, 비로소 “법을 도용한 조작과 학살”은 잦아들었다. 우리의 청년기는 핏빛 시대였다. 그러나 그 피의 현대사가 그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몇 십 년 전 우리의 조국이 광복을 맞았을 때부터 오히려 핏빛 역사도 동시에 시작되었고 수많은 양민·어린이·부녀자와 노인들이 좌와 우 양편으로부터 학살되었다. 강창일 선생이 선두에 서서 역사적 진실을 밝혔던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국민방위군사건, 그리고 거창·함평·함양·산청·문경·마산·경산·고양·울산…. 등 수많은 지역에서 자행된 양민과 보도연맹 학살, 또 노근리 양민학살과 같이 군에 의해 자행된 전쟁범죄. 이 모두가 좌우의 사상 갈등과 국가폭력의 소산이었다. ‘민청학련’사건은 외형적으로 보면 이 핏빛 역사의 큰 마무리를 짓는 꼭짓점으로 보인다. 수많은 시민들이 감옥에 갇힌 우리를 응원하고, 언론과 학생과 지식인들이 한 목소리로 유신정권을 비판할 정도였다. 민주진영의 여러 국가에서도 유신정권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비판의 날을 세웠다. 짧은 수감 도중에 형집행정지로 출감한 내가 받았던 외국에서 온 격려편지가 무려 삼천통이 넘을 정도였다. ‘민청학련’사건으로 민심을 잃고 해외 우방에도 체면을 구긴 유신정권은 영구집권이란 망상이 깨지고 종말을 재촉했다. 그 후. 몇 년 간 유신부활을 꿈꾸던 전두환 정권도 그리 오래 하지 못했다. 유신에 저항했던 ‘민청학련’의 뿌리가 뻗고뻗어 6·10항쟁과 촛불혁명의 연원이 되었기 때문이라 믿는다. 강창일 선생의 옥고가 찬란한 우리의 내일을 여는 열쇠가 되기를 기원한다. - 이철 (전 의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