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한 마리 소를 생각한다.
주어진 일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충직하고 부지런한 소.
해가 뜨고 져도, 비가 오고 눈이 와도, 제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인 우직한 소.
오세영은 소걸음을 걸어온 사람이다.
영리하지도 약지도 못하여 총명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도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게 외길을 걷는 사람.
꾀가 많은 이는 결코 이르지 못할 험한 길을
오직 우직함으로 하늘 밑 꼭대기까지 끝내 걸어 올라간 사람.
오세영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서른 고개를 넘어가며 눈마저 밝아졌다.
삶에서 건져 올린 진정의 무게에 기예의 내공을 버무렸다.
기능을 익힌 장인을 넘어 인문의 깊이를 갖추고
한국 만화의 절정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89년. 오세영 30대 중반.
그는 「부자의 그림일기」로 자신을 이전의 오세영과 이후의 오세영으로 갈랐다.
겹겹 고난에 시달리는 민중의 삶을 아이의 시선에 담아
등장인물들의 겉과 속은 물론, 세상의 안부터 밖까지 꿰어 새겼다.
「부자의 그림일기」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계급, 계층의 차별을 담아낸 명작이었다.
「고샅을 지키는 아이」는 도시화 이면의 그늘 속, 시골 고샅길 풍경을 그렸다.
천년을 지켜온 농경 세대가 새로운 변화에 뒤처지며
형체도 없이 다가오는 불안에 흔들리는 심연을 포착한 빼어난 수묵화였다.
일생을 통해 과작인 오세영이 이 시기 전후로 발표한 몇몇 단편은
우리 만화사에서 손꼽아 기리는 성취이자 유산이 될 것이다.
오세영이 산통 끝에 박경리의 『토지』 1부를 출간했을 때,
나는 한 대목 한 대목을 읽으며 탄복으로 밤을 새웠다.
문학사에 기릴 대하소설을 쓴 박경리 선생께 새삼 감사를 드렸고
기나긴 장강의 이야기를 만화로 세밀하게 되살려 보여준
나의 동료 오세영이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한 권 한 권이 끝날 때마다 남은 이야기가 아까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가 다시 읽기를 되풀이하였다.
오세영은 이미 우리 만화계에 우뚝 서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 언덕이 되었다.
오세영의 행로는 무던히 느려서 드러난 듯 만 듯 했다.
묵묵히 자신의 만화 세계를 갈고 닦았으나 삶의 무게에 늘 휘청거렸다.
같은 길을 걷는 동무로 서로 의지가 되어 평생을 함께하리라 믿던 시절이었다.
서로가 있어 외롭지 않았고, 서로를 생각하면 지쳤다가도 힘이 났다.
동무 오세영.
그대의 종아리에 알통 살이 말라갈 때도
문득 내게 전화를 해 다짜고짜 목을 놓고 울던 날에도
도톰하고 둥그런 얼굴의 복판이 꺼지고
골이 패 팔자 주름이 겹쳐가도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세영이 오르고 오르더니 끝내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 버릴 줄은 차마 몰랐다.
나는 지금도 오세영이 불쑥 히득거리며 나타날 것만 같은데.
무엇이 급해서 혼자만 먼 곳으로 가버렸단 말인가
너무도 아쉬운 것은,
제대로 벼려 기예의 합치를 이룬 오세영이 두고두고 그려냈을 만화들이다.
내놓을 작품마다 귀한 가치가 있을 터인데,
그 작품들을 자신의 몸에 담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으니 아깝고 애통하다.
우리는 귀한 사람과 함께 더 많은 보물을 잃어버렸구나!
벗 오세영.
만화의 길동무여,
우리 만화의 빛나는 봉우리를 일구어낸 선구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