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은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중반, 원 간섭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며 고려와 원나라를 아우르는 독보적인 행보를 보여 준 지식인이다. 1298년 충남 한산의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2세에 부친을 여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에 매진해, 1320년(충숙왕 7) 22세의 나이로 고려 예부시에 2등으로 합격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학문적 열정은 국내에 머물지 않았다. 수차례의 도전 끝에 1333년, 35세의 나이로 원나라 제과(制科)에 응시해 고려인 역대 최고 성적인 제2갑(甲)으로 급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이곡은 원나라 한림국사원의 검열관과 고려의 정동행성 원외랑 등을 역임하며, 고려 문인으로서는 최장 기간인 10여 년간 두 나라의 관료 생활을 병행했다. 그는 단순히 입신양명에 그치지 않고, 1335년 공녀 선발의 폐단을 통렬히 비판하는 〈대언관청파취동녀서(代言官請罷取童女書)〉를 원나라 조정에 올려 1337년부터 공녀 징발을 금지하게 만드는 등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 또한 1346년에는 민지(閔漬)가 찬한 《편년강목》을 증수하고 실록 편찬에 참여하는 등 역사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곡은 교육자로서도 탁월해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원나라 국자감에 유학시켜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키워 냈으며, 이를 통해 한산 이씨 가문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렸다. 말년인 1349년에는 공민왕 추대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정치적 혼란과 신변의 불안 속에서 금강산과 관동, 영남 지방을 유람하며 수많은 기행 문학을 남겼다. 1350년 모친상을 당한 뒤 이듬해 1월, 54세를 일기로 고향 한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세계 제국 원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소화해 고려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시대를 앞서간 경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