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정 고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1884년부터 1889년까지 역사·언어학을 공부하며 고전학과 철학적 사상에 몰두하는 등 러시아의 “전통적 교양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1880년대 후반 상징주의 운동의 선구자로서 시 〈원인 없는 기쁨(Без причины радость)〉 등을 발표했으나, 곧 시적 형식주의보다는 종교적 변혁 사상에 천착”하게 된다. 1892년 그는 비평서 《현대 러시아문학의 쇠퇴 원인과 새로운 흐름에 관하여(О причинах упадка и о новых течениях современной русской литературы)》에서 “유물론과 실증주의 및 전통적 문학 경향에 대항해 예술의 유미적이고 신비적인 사명을 강조했으며, 인간의 영적 활동의 수단으로서 예술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초기 러시아 상징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삼부작 소설 《그리스도와 반그리스도(Христос и Антихрист)》와 함께 또 하나의 대표작인 비평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Л. Толстой и Достоевский》는 바로 이러한 “신인(神人)론적 사유의 정점”에 해당한다.
20세기 초, 그는 신약성경의 묵시록(요한계시록)의 예언을 바탕으로 영과 육의 합일을 보여 주는 성령의 왕국이 지상에 도래할 것을 꿈꾸며, 새로운 종교의식을 고양하고자 잡지 《새로운 길》(1902∼1904)과 ‘종교 철학회’에서 활동했다.
그의 후기 사상은 ‘신정치’와 ‘종교적 역사철학’으로 확장된다. 그는 《예수의 비밀(Иисус Неизвестный)》(1907), 《황제와 신(Царь и Бог)》(1911), 《십자가와 검(Крест и меч)》(1912)으로 구성된 ‘신과 인간의 역사 3부작’에서 종교의 내적 진화와 문명의 종말론을 탐구했다.
1917년 10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그의 사상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온다. 그는 10월 러시아 혁명을 “신 없는 종교”로 규정하고, “볼셰비즘을 반(反)그리스도의 현상”으로 비판한다. 결국, 1920년에 소비에트 볼셰비키 정권에 반대하여 프랑스 파리로 망명길에 올라 그곳에서 활동하며 《예언자 루시(Пророк Русь)》, 《예언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Пророк Фёдор Достоевский)》 등을 집필한다. 망명 후에는 “반공의 입장”에 서서 “무솔리니를 찬양”하기도 하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에 대한 비판과 나치 독일의 대(對)소련 공격을 지지했다는 평가가 있어, 전후에는 러시아 내에서 그의 문학이 오랫동안 금기시”되기도 했다. 또 그는 “‘러시아의 사도’로서 서유럽 독자에게 러시아 정신의 영적 사명을 전하려 했으며”, 1941년 나치 점령하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