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색(色)과 형(形)을 다루며
타인의 욕망을 디자인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반평생을 보냈다.
정작 자신의 내면은 낯설고 차가운 공간에 내달아 둔 채,
보이지 않는 통증과 오랫동안 불온한 동거를 이어왔다.
오랜 시간 갈함으로, 자신을 등진 채 견고한 성벽을 쌓고 살았으나,
쉰 살의 문턱을 넘어선 어느 날 비로소
성벽 아래 숨어 떨고 있던 소년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제 나는 평생 자신을 붙들고 있던 공황의 바다 속 무거운 숙명과 작별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다시 불안하지 않는 법을 애써 익히고 있다.
이 시집은 그 지독했던 줄다리기를 끝내고 마주한,
맑고 투명한 삶의 전언이다.
나의 투박하고 아직도 부끄러운 문장들은,
1980년대 학생운동 그 뜨거운 공기마저 고뇌와 번민으로 녹여냈던
형의 손때 묻은 낡은 낙서장에서 시작되었다.
그 속에서 꿈틀대던 격정의 단어들은 내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그로부터 기인한 나의 서툰 전언은,
역시나 힘들고 고단했을 우리 두 형제의
안식과도 같은 농도 짙은 여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