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오랫동안 빠르게 변화하는 이미지와 콘텐츠를 다뤄왔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만든 작업이 찰나의 소비 뒤에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해서 보며, 작가는 휘발되지 않는 방식으로 지금 이 순간을 남기고 싶어졌다. 사진과 영상은 순간을 기록하지만, 화면 속 기록은 쉽게 복제되고 수정되며 또 다른 소비의 흐름 안으로 들어간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그것을 기억하는 감각 또한 반복될수록 조금씩 달라진다.
작업은 지나가 버리는 감각을 붙잡아, 천천히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다. 빛과 그림자는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게 하는 이정표다. 같은 물체라도 빛의 세기와 거리, 방향에 따라 다른 그림자를 남긴다. 그림자는 물체의 일부가 아니라 빛이 가려져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그 흔적을 통해 우리는 물체의 형태와 그것이 놓인 공간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작가는 그림자의 어두운 공간에도 질감이 있었으면 한다. 빛이 통과하는 공간과 빛이 비껴간 여백이 그저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손끝으로 감각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했으면 한다. 사람의 삶에 멈춰 있던 시간과 상실 이후의 시간, 이력서에 적을 수 없는 공백같은, 그림자 역시 비어 있음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가 견뎌낸 빛의 무게가 머무는 자리다.
이 책은 빛이 비껴간 자리와 지나쳐버린 시간에 형태를 부여해 온 작가의 작업이 글로 확장된 결과물이며, 그의 첫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