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Ⅰ. 첫 번째 씨오쟁이(에세이)
물레방앗간·12 큰 솔밭·16 화목의 꽃·19 장 구경·24 덕암처사·27 울타리·31 얼차려·34 절강기·37 옹두리·41 누님의 뒷모습·44 지게와 새끼줄·53 나 홀로 여행·59 황 노인·66 뽕잎·69 쁘라삐리운·73 직업군인·75 자귀나무 꽃·80 인연(因緣)·82 산까치의 노래·88 떨켜·92 손님맞이·96 톡 편지·99 석등(石燈)·102 나의 친구들·106 장보고 망루에서·109 홀인원·114 나비의 신혼여행·119 마라도·122 벽소령 다람쥐·127 강원도래유·132 부관페리호·139 카파도키아·145 죽마고우·150 맛기행·154 씨오쟁이·160 줄탁동시·163 남천가족동산·166 만월·167 용서의 기도·169 각오·171 건강관리·174 고희의 풍경·176 설날·178 새옹지마·180 오병훈 | 김영주 시문집 『씨오쟁이』에 부쳐 희망의 씨앗에서 사랑이 싹트기를·186 Ⅱ. 두 번째 씨오쟁이(시) 숨바꼭질·194 봄소식·195 들고양이·196 섬진강을 그리다·198 낭만도시·200 요절한 사랑·201 딱정벌레·202 목련의 결혼식·204 참게의 고향·205 사량도·206 송도해변·207 사촌·208 민들레·209 남바구·210 야합화·212 가시쟁이댁·213 딱새 부부·214 아버지·215 위양지의 봄·216 존티 할미새·218 우단동자·220 찔레꽃·221 동행·222 모죽·223 구절초아지매·224 황혼의 멋쟁이·226 창원에 살으리랏다·228 향수(鄕愁)·230 자드락비·232 망초의 누명·233 후투티·234 참나리 꽃·235 어머니·236 부모님 영전에·237 팔순연 축시·238 고희연 축시·240 감사의 기도·242 김영탁 | 김영주의 시에 대하여 공자(孔子)의 시학 그리고 풍류도(風流道)·244 |
金榮注
|
내 고향 남천 개울가에는 언제나 물레방아가 삐거덕삐거덕 힘겹게 돌았다. 조상 대대로 맥을 이어온 보(洑)를 막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을 장정들이 모두 나와 개울을 가로질러 말뚝을 박고 큰 돌을 쌓아 올렸다. 틈새마다 나무 다발을 걸치고 모래와 자갈, 황토를 채워가며 메로 다져야 했다. 보의 한쪽 귀퉁이에 고랑을 파서 물길을 돌리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을 물레가 받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때 물레가 도는 힘을 이용하여 큰 기어와 작은 기어를 맞물리고 벨트를 이용하여 그 축력으로 쌀과 보리를 찧었다. 고추를 빻고, 가래떡도 뽑았다. 방앗간 옆에는 수정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었는데 징검다리가 듬성듬성 놓여있었다. 돌과 돌 사이로 참게와 가재, 피라미, 징거미, 새끼새우가 오르락내리락 소풍을 다니고 있었다. 나는 여름철이면 친구와 함께 이 개울에서 하루에 몇 번씩이나 멱을 감고 놀았다. 배가 고프면 물속으로 잠수하여 돌 틈에 놀고 있는 가재와 징거미를 잡아 구워 먹었다. 가재와 징거미는 불에 익을수록 껍질이 불그스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징거미를 입에 넣고 와작와작 씹으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주교천은 하동군 양보와 북천, 진교와 사천시 곤양에 걸친 해발 570m의 이명산을 발원으로 한다. 이 산을 분수령으로 하여 물이 북쪽으로 흘러 ‘북천’이라 불렀고 남으로 흘러 ‘남천’이라고 했다. 주교천은 양보와 고전을 거쳐 금남면 하구에 이르면 섬진강과 합류하여 남해에 이른다. 그 때문에 갯벌에서 태어난 어린 참게와 새끼 뱀장어가 방앗간이 있는 남천 개울까지 올라와 바위틈에서 한 생애를 보냈다. 아버지는 방앗간 일을 마치면 대나무를 잘라 쪼개고 다듬어 통발과 섶을 만드셨다. 개울을 가로질러 V자 모양으로 말뚝을 박은 뒤 양쪽 둑에까지 섶을 걸치고, 개울 가운데는 통발을 놓았다. 섶의 아랫부분을 자갈로 묻어두면 칠흑 같은 밤을 틈타 개울을 오르내리는 뱀장어가 통발에 들어왔다. 이 귀한 놈을 잡아 집으로 가져오면 엄마는 일류 요리사처럼 뱀장어를 손질하셨다. 석쇠에 초벌구이를 한 다음 양념장을 바르고 살짝 구우면 구수하고 맛있는 냄새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잘 구운 장어를 접시에 담아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아버지의 소반에 올려드리고, 나머지는 온 가족이 함께 나누어 맛을 보았다. 남바구 들판에 청보리가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누렇게 익어가는 철이면, 보의 틈바구니에서 허물을 벗고 자란 참게가 알을 낳기 위해 섬진강 갯벌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슬비가 내리는 칠흑 같은 밤이면 알배기 참게는 철갑옷으로 갈아입었다. 두 눈을 죽 빼어 안테나처럼 세우고 열 개의 다리를 뻗어 둥둥 떠내려갔다. 이때 숨을 죽이고 지켜보다가 참게가 섶을 넘어가려고 살금살금 기어오를 때 등을 덥석 잡으면 엄지발가락에 털이 부실부실한 참게를 포대에 가득 잡을 수 있었다. 참게를 많이 잡은 날이면 엄마는 옹기에 참게를 차곡차곡 넣었다. 그리고 간장을 펄펄 끓여 붓는 과정을 몇 번씩이나 한 뒤에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비닐을 덮고 고무줄로 묶었다. 뚜껑을 덮어 참게간장을 보관해 두었다가 귀한 손님이 오시면 해우(김)와 함께 정성껏 상에 올렸다. 참게간장을 담고 남은 참게는 절구통에 빻아 쌀가루를 섞어 참게가리장(찜)을 만들어 먹었다. 부추와 방아 잎을 썰어두었다가 가리장이 펄펄 끓은 후 살짝 넣어 먹으면 참게가리장맛과 방아와 부추의 향이 어우러져 일품요리가 되었다. 방앗간에서 징검다리를 건너 구불구불한 두렁길을 따라가면 가시덤불에 새 둥지 같은 오두막이 앉아 있었다. 이 오두막은 친구의 부모가 아까시나무 가지를 걷어내고 지은 움막이었다. 냇가에서 머리통만 한 돌을 날라 흙을 섞어 벽을 쌓고, 나무를 걸치고 억새풀로 지붕을 덮었다. 친구네는 밥 지을 양식이 없어 가난의 수렁 속에 살았다. 친구의 아버지는 돌중 차림을 하고 떠돌아다니며 시주로 얻은 양식으로 가족의 명줄을 이어가고 있었다.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뽑는 날이면 엄마한테 가래떡 두 가닥을 얻어 가지고 가 친구와 나누어 먹었다. 친구네 방은 벽에 도배도 하지 않은 벌거숭이 벽으로 지냈기 때문에 찬바람이 돌 틈으로 들어왔지만, 그래도 방바닥은 온돌을 깔아 넉넉하게 쌓아둔 땔감 덕분에 따끈따끈하여 냉골이 된 엉덩이를 데워 주었다. 친구와 나는 송홧가루가 날리는 철이 오면 솔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빨아 먹는 송기는 달착지근했다. 냇둑에서 삘기를 뽑고 찔레 순도 꺾어 먹으며 주린 배를 채우고, 자치기와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하며 신나게 뒹굴며 놀았다. 방앗간은 우리 가족의 목숨을 이어주는 삶의 터전이었다. 방앗간 모퉁이에는 일하다가 잠시 쉴 수 있는 좁은 골방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숯으로 벽에 그림을 그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년의 내 꿈을 무럭무럭 키웠던 물레방아도 멈춘 지 오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왠지 가슴이 뭉클하고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지난 세월의 물레방앗간. --- 「물레방앗간」 중에서 갑오(1954)년 구월 스무닷새, 새벽 서리가 가볍게 내린 날이었다. 노란 바지저고리를 갈아입은 벼들이 알이 꽉 찬 열매가 무거운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른 새벽까지 깜빡깜빡 졸던 별들이 먼동이 트자 하나둘 씩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벼를 베고, 볏단을 묶어 나르느라 쉴 틈이 없었다. 우리 가족도 한사람 당 너덧 줄씩 나누어 벼를 베고 있었다. 한나절이나 허리 한 번 펼 사이 없이 벼를 베다보니 정오가 코앞에 다가왔다. 산기(産氣)를 느낀 산모는 벼 베던 손을 멈추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모의 나이는 올해 마흔넷, 이미 아들 여섯과 딸 넷을 낳아 첫째와 둘째는 하늘나라로 먼저 보냈으니 이번에 임신한 아이는 열한 번째가 되 는 셈이다. 서둘러 볏논을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고 두렁길을 종종걸음으로 올라가는 숨소리가 마치 짐을 싣고 앵앵거리며 오르막을 오르는 고물 트럭의 엔진소리 같았다. 아름드리 박을 엎어 놓은 듯한 만삭의 배를 안고 서너 발자국을 걷다가 허리 한 번 펴고, 또 걷기를 반복하여 어렵사리 집에 도착하였다. 미리 준비해 둔 출산용품을 들고 큰방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면포로 감아 붙들고 산고의 진통을 참고 또 참아내고 있었다. 출산의 물레가 느림보처럼 돌고 돈 뒤에야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솔바람을 타고 산자락으로 퍼져나갔다. 산모의 행동을 예사롭지 않게 지켜보던 열세 살 된 큰딸이 서둘러 엄마의 치맛자락을 졸졸 따라왔다. 아침에 엄마가 챙겨둔 미역을 꺼내 물로 헹구고 가위로 잘라 무쇠솥에 넣었다. 물을 길어 붓고 간을 맞춘 뒤 솥뚜껑을 덮었다. 마른 솔개비로 불을 지펴 끓인 미역국을 놋그릇에 담아 참기름까지 한 방울 떨어뜨리고, 소반에 담아 산모에게 갖다 드리며 어른스럽게 뒷바라지를 해냈다. 부모님의 은덕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별나라에 와서 울음소리 하나로 선곡을 뽑은 내 소풍 여정의 첫날이었다. 산 중턱에는 늙은 소나무 백여 그루가 날짐승과 들짐승이 모이는 모꼬지 장소를 만들어 주었다. 송림 가운데 노란 버섯을 닮은 큰 채와 사랑채 오두막은 화백이 그려 놓은 멋진 그림 같았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큰 솔밭’이라고 부르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터전은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를 피하여 자손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싶은 일념으로 찾아온 곳이다. 오두막 주변에는 대나무와 과일나무를 심고 산자락의 가시덤불을 걷어내고 밭을 개간하여 고구마를 심었다. 서리가 내려 잎이 시들면 이랑을 헤집어 고구마를 캤다. 작은방 한구석에 가마니 채 담아두고 삶거나 구워 먹고 생고구마를 깎아 주전부리로 먹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일품이었다. 밭두렁에는 배나무와 감나무를 심었다. 과일이 익으면 따서 장독에 보관해 두었다가 잔칫날에 요긴하게 썼다. 파젯날이나 할아버지 생신 때에는 마을 어르신들을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골고루 대접하였다. 몸이 불편하여 못 오시는 분은 누님을 시켜 술과 음식을 함지에 담아 보내드렸다. 서산 노을이 붉게 물든 구름을 검게 덧칠하고 나면 북두칠성이 나타났다. 그러면 손톱달이 살포시 내려왔다. 이때를 기다리던 밤무대의 여왕 두견이는 노송 가지에 앉아 떠나버린 임을 그리며 애절한 곡조를 뽑아냈다. 밤의 왕자 부엉이는 낮은음자리로 베이스를 넣었다. 숲속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고라니 가족은 앞마당까지 내려왔다. 멍석을 깔고 앉아 흐르는 샘을 농주 삼아 밤새도록 마시며 놀다가 수탉이 홰를 치며 목청을 틔우면 화들짝 놀라 줄행랑을 쳤다. 새들의 열병식이 무르익으면 일찍 일어나 쇠죽을 끓여 죽통에 담아주고 할아버지 방 화로에 아궁이의 숯불을 담아다 드리고 나면 꾀꼬리가 수고했다며 양 날개를 쳤다. 멧비둘기는 아침 먹을 시간이 되었다며 구구구 알려준다. 소먹이며 꼴 베는 까까머리 소년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할 일을 척척 잘도 해냈다. 어서 빨리 자라 어른이 되면 부산, 울산, 창원 같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생선국에 쌀밥 한 그릇 마음껏 먹는 꿈을 꾸며 어둑어둑한 두렁길을 소를 몰고 걸어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 「큰 솔밭」 중에서 우리 엄마는 1911년 앵두가 빨갛게 물들어갈 무렵 진주 ‘너우니’에서 태어나셨다. 살구가 익기 시작할 무렵인 1993년 여든셋에 김해 내동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너우니 마을은 남강댐 공사로 수몰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경호강과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덕천강이 어우러져 남강을 이루는 널따란 여울이 있던 나루터였다. 이 나루터는 귀곡과 대평을 오가는 뱃길이었다. 나동과 유수를 거쳐 하동이나 호남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엄마의 어린 시절은 남부럽지 않은 살림이라 귀염둥이로 자랐다. 엄마의 친정은 선비 집안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천자문(千字文)」과 「사자소학(四字小學)」을 배울 수 있었다. 한글은 외할아버지를 통해 익혔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를 구해 주면서 한지에 베껴 쓰도록 했다. 상·하 두 권을 겉표지까지 예쁘게 꾸며 막내딸이 시집갈 때 가져가도록 하셨다. 엄마는 이 책을 50여 년간 화장대에 올려놓고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하였다. 사촌 동생이 이 책에 현재 사용하지 않는 자모음 네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빌려 간 뒤 아쉽게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엄마는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너우니에서 100여 리 떨어진 하동으로 조랑말을 탄 신랑을 따라 꽃가마 타고 시집을 오셨다. 신행행렬에는 농사지을 소 한 마리를 앞세우고 떡과 과일, 고기와 생선을 담은 이바지함을 지게에 지고 줄지어 온 뒤 가문의 종부로서 험난한 시집살이 길을 걸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시집온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어린 딸과 아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셨다. 새댁은 세 살이었던 시동생과 한 살배기 시누이를 친자식처럼 키워야 했다. 일제강점기라 집안 살림이 녹록지 않았다. 스무 명이 넘는 대가족의 삼시 세끼를 책임져야만 했다.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목화를 심고, 가을이면 목화송이를 따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았다. 삼과 모시로 길쌈을 하여 밤이 이슥하도록 털커덕거리며 베를 짜 옷가지를 만들어 가족을 입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 조끼와 도포는 손으로 빨아 다듬이질을 하여 외출할 때면 한시라도 입을 수 있도록 준비하느라 쉴 틈 없는 고달픈 나날이었다. 그 당시 시아버지가 “자부야! 내가 양반집 귀한 딸을 종부로 데리고 와 큰 고생을 시키는구나. 미안하다.” 하시는 위로의 말 한마디에 힘겹고 어려웠던 시집살이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몇 해 안 되어 엄마보다 아홉 살 아래인 처녀와 재혼을 하였다. 시동생과 시누이를 해마다 하나씩 결혼시키고 사대 봉제사와 명절제사, 시부모와 낭군의 생일잔치가 한 달에 한두 번씩 이어졌다. 그 당시 마을에 방앗간이 없었기 때문에 벼나 보리는 절구통에 빻아 밥을 지었다. 가마솥에 쌀을 찌고 메로 쳐서 떡도 만들었다. 누룩을 띄워 농주를 담는 등 오만 가지 일을 도맡아 하셨다. 시집살이 고행의 길을 걷는 엄마 모습이 아직도 눈가에 아롱거린다. 할아버지의 뚝심 결단으로 일제의 수탈을 피해 집성촌을 떠나야 했다. 구례 토지들 어귀에 한옥을 짓고 대가족을 이주시켰다. 오봉산 앞들에 둥지를 마련한 지 세월의 수레가 몇 바퀴 돌아가는 사이 할아버지는 진교 집성촌에 남겨둔 재산 대부분을 정리하여 덕암산 자락 일부를 매입했다. 큰 솔밭에 오두막 두 채를 마련하여 다시 대가족을 이주시켰다. 집성촌을 떠나기 전까지 할아버지의 증조부께서 짚신과 가재도구를 만들어 오일장에 내다 팔 아 재산을 모았다. 그렇게 구입한 임야와 전답이 수만 평이 넘었다. 해마다 수백 석의 추곡을 거두는 김해김씨 집성촌에서 으뜸가는 부자가 되었다. 조랑말도 두 필 있었고, 일손과 머슴을 여러 명씩 거느린 종가였다. 그러나 세차게 불어 닥친 일제의 수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대가족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의 재혼과 화폐개혁, 삼촌과 고모님의 혼수비용, 저수지 편입 농지의 강제수용으로 남은 재산은 덕암산자락의 오두막 두 채와 개간한 전답 몇 마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6·25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뒷자락,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의 도포 자락 안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엄마의 음식 솜씨는 달인 수준이었다. 치아가 좋지 않은 어르신을 위해 칼자루나 칼등으로 식재료를 두들겨 보드랍게 다지고, 푹 삼아 물렁물렁하게 요리하여 어르신이 잡숫는데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사과나 배 같은 과일은 열여섯 등분으로 쪼개고, 파전과 생선, 육류는 일정한 크기로 잘게 잘라 전 가족이 골고루 맛볼 수 있게 하였다. 식구 사이에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없도록 어깨를 토닥거리며 화해시키느라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한때는 남천 개울가에 물레방앗간을 차려 가래떡을 뽑고, 남의 집 방아도 찧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넷째 아들의 발목이 절단되는 큰 사고가 일어났다. 바짓가랑이가 돌아가는 기어 틈에 빨려 들어갔다. 금쪽같은 아들을 장애인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아프다며 울부짖는 소리를 눈물로 삼키며 애태우던 모정의 가슴앓이를 누가 알까. 아들, 딸 여덟을 출가시켰다. 남은 늦사리 아들의 취직을 위해 십여 리 두렁길을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관음전에 엎드려 빌고 또 빌었다. 이순을 넘긴 뒤에야 산중턱 오두막에서 오붓하게 살아온 십여 년 세월이 엄마의 생애 중 가장 달콤하고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당시 부산에 사는 둘째 아들이 바나나 한 송이를 사 오면 마을 아낙들을 모두 불렀다. 우리 아들이 사 온 귀한 바나나 맛을 좀 보라며 골고루 나누어주셨다. 남편의 노환을 보살피는 일이 힘에 겨워 임야와 전답을 모두 정리하고 큰아들 집으로 오던 날이었다.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방울을 매달고 두렁길을 내려오는데 “산까치가 맴돌며 울어대더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버지는 큰형님 집으로 이사 오기 전날 밤 고질병이 악화되어 말문을 닫았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설을 넘기고 큰 아들 집으로 모신 다음 날 세상을 떠나셨다. 덕암산 꽃대 끝자락에 맺힌 봉우리 한가운데 아버지 산소를 마련했다. 엄마는 먼저 떠난 낭군의 무덤을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부짖으며 이승에서의 고별인사를 하였다. 엄마는 대연고개 언덕배기에 있는 오두막 골방에서 손자 손녀들과 함께 도회지 생활을 시작하였다. 매일같이 마늘 껍질을 까준 대가로 받은 돈으로 형님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내동 들판에 아내와 함께 나물 캐러 갔을 때 쑥부쟁이와 돌미나리를 많이 캐 비닐봉지에 담아 주시던 유달리 정이 많으신 어머니. 나물 캐러 다녀온 지 사철이 한 바퀴 돌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조금이라도 더 정성껏 모시지 못하고 보내드린 어머니, 화목의 꽃으로 피었다가 떠나가신 우리 어머니. --- 「화목의 꽃」 중에서 내 나이 여섯 살 때였다. 엄동설한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이겨낸 매화도 이제 시들었다. 그 자 리에 연두색 매실이 주렁주렁 맺혀 봄기운에 살이 오르고 있었다. 엄마가 “내일 할머니 제사장 보러 가는데 따라가 볼래?”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예, 꼭 데리고 가 주세요. 엄마.” 하고 매달렸다. 그날 밤 얼마나 신나고 기분이 좋았던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새워 뒤척이다가 먼동이 트기 전에 벌떡 일어나 마구간으로 갔다. 가마솥에 물을 붓고, 여물과 등겨를 넣어 솥뚜껑을 덮었다. 불쏘시개에 불을 붙였다. 나뭇가지를 아궁이에 넣으며 불을 지피는데 솥뚜껑 틈새로 물이 주르륵 흐르며 김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여물 솥에 뜸이 드는 사이 할아버지 방문 앞으로 가 헛기침을 했다. “할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화롯불을 담아 드리러 왔습니다.” “오냐, 그래, 다른 날 보다 일찍 일어났구나.” 홍시처럼 붉게 익은 숯불을 화로에 가득 담았다. 부손으로 다독거린 다음 할아버지 방에 가져다드렸다. 이제 누룽이에게 쇠죽을 줄 차례다. 잘 익은 여물을 국물과 함께 구시에 담아 주었다. 누렁이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여물을 혓바닥으로 감아 입에 넣고 우지직 우지직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대나무를 연결하여 물이 마당까지 흘러내리도록 만들어 놓은 우물에서 고양이 세수를 했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시늉만 내고 엄마 치맛자락을 따라 불당고개를 넘었다. 징검다리를 건너고 콧노래를 옹알거리며 시오리 고부랑길을 걸었다. 시장 언저리에는 큰 물레방아가 물을 한 바가지 마셨다가 토하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신발가게 앞을 지나가며 보니 아기 신발로부터 어른 신발에 이르기까지 희고 검은 고무신과 운동화가 짝을 지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옷가게는 알록달록한 한복 치마저고리와 두루마기를 비롯한 속옷과 양말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있었다. 과일가게는 배와 사과, 곶감과 대추가 수북수북 쌓여 있었고, 이름도 모르는 과일들이 나를 보고 ‘산골 촌놈이 장 구경 나왔구나!’ 하고 놀리는 것만 같았다. 그릇 가게에 진열된 양은냄비와 쟁반은 어른 키보다도 높게 쌓여 있었다. 어물전에는 어느 바다에 살다 잡혀 왔는지 괴물 같은 물고기가 큰 주둥이를 벌린 채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장터는 우리 마을에 시집 장가가는 큰잔치가 벌어진 것처럼 시끌벅적하였다. 엄마는 점포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과자 가게에 들어갔다. 내가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꿈속에서 한두 번 본적이 있는 자루 달린 왕사탕 한 개를 사주셨다. 나는 왕사탕을 입에 넣고 쪽쪽 단물을 빨아먹다가 꺼내어 얼마나 닳았는지 한번 쳐다보고 다시 입에 넣었다. 처음 보는 물건과 장 보러 온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차림과 얼굴 생김새 하나하나를 머릿속 회로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마를 따라 사람들 사이를 밀리다시피 걷다 보니 어느덧 물레방앗간 옆에 있는 식당에 도착하였다. 엄마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 국수 두 사발을 주문하였다.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사발에는 석화와 홍합이 바다 향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입속으로 들어온 국물 맛에 혀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굵은 면 사리는 미처 씹을 틈도 없었다. 잠깐 사이에 내 배는 만삭이 된 새아씨가 되었다. 이름도 모르고 처음 먹어보았던 국수는 철이든 뒤 잃어버린 추억의 한 토막을 더듬어 보았더니 손으로 반죽을 두드려 면을 뽑은 우동이었다. 엄마는 신발가게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검정 고무신 한 켤레를 사 주셨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처음으로 가본 시골 장 구경. 내 인생에서 가장 신나고 멋지며 가슴 설레는 추억의 한 페이지로 지금껏 남아 있다. 장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목, 마을 입구 느티나무 가지에 앉아 망을 보던 꾀꼬리 한 마리가 큰 솔밭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산골 소년이 장 구경하고 돌아오고 있다는 속보를 숲속 친구에게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 「장 구경」 중에서 할아버지는 1894년 가을에 태어나셨다. 고종 31년 일본 개화세력의 영향으로 ‘재래의 낡은 제도를 벗어던지고 서양의 근대문물과 격식을 본받아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하자’는 갑오개혁을 선포한 해이다. 1896년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을 선포하였고, 1910년에는 국권침탈로 일제강점기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1919년 독립선언, 1945년 8·15해방,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1950년 ‘6·25사변, 1960년 4·19혁명, 1961년 5·16군사정변 등 조선왕조 말기부터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이르기까지 휘몰아 닥친 태풍의 중심에 계시다가 1977년 할미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 세상을 떠나셨다. 덕암산 중턱 큰 솔밭에 먼동이 트면 카랑카랑한 책 읽는 소리가 메아리를 타고 퍼져나갔다. 꿈속으로 소풍을 떠났던 가족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산새들의 하루해가 열렸다. 한껏 목청을 틔우고 난 할아버지는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 세수를 하시고,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동그랗게 자른 다음 백호를 치셨다. 정수리 중앙에는 은으로 만든 안테나를 세우고, 머리카락을 빗겨 올리며 칭칭 감아 상투를 튼 다음 망건을 두르고 두건을 쓰면 머리 손질이 마무리되었다. 외출할 때는 지름이 한자 반이나 되는 말총갓을 쓰고 다니셨다. 흰 바지저고리와 덧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불그레한 비단조끼를 입고 소매 폭이 한자가 넘는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셨다. 발은 면포로 감은 뒤 버선을 신고 ‘다님’을 발목에 묶어 나비 모양이 되도록 매고 하얀 코고무신을 신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셨다. 수염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며 태어나신 뒤 한 번도 깎지 않으셨다. 윗수염은 틈이 날 때마다 좌우로 치켜 쓰다듬고, 아랫수염은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단전까지 내려오도록 기르셨다. 시누대를 뚫어 만든 긴 담뱃대에 잎담배를 채워 피웠으며 여섯 자가 넘는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짚고 신선처럼 나들이하셨다. 1970년, 감자 꽃이 만발하여 벌 나비가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가 나자 서울에 사는 손녀를 앞세워 경복궁 구경을 가셨다. 이곳을 찾은 외국인들이 조선시대 선비가 나타났다며 줄을 지어 모델이 되어 달라고 졸랐다. 두 손을 단전에 모은 채 서서 사진 모델을 하다가 당신은 관람 시간이 마감되는 바람에 경복궁 구경도 못 한 채 돌아오셨다. 당시 외국 관광객이 우리나라에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선비의 모습을 추억으로 담아 갔다. 그날 할아버지의 경복궁 나들이는 관광 한국을 알리는 풀뿌리 외교의 소임을 다한 셈이다. 할아버지의 조부는 호를 ‘귤은’이라 하였다. 숙부가 슬하에 아들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삼았다. 귤은은 양어버이 마음에 한 치의 어긋남 없는 효자라고 어려서부터 마을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돌았다. 밤이면 어버이의 방에 군불을 지피고 잠자리를 깔아드렸다. 그리고 손발이 따뜻하도록 화롯불을 담아드렸다. 이른 새벽에는 어버이가 주무시는 방바닥이 식지는 않았는지 손을 넣어 살피었다. 세월의 물레가 돌고 돌아 양어머니가 중풍으로 자리에 눕자 대소변을 손수 받아내며 3년을 변함없이 간 병하던 중 세상을 떠나셨다. 홀로 되신 양아버지의 고질병이 극심해지자 여러 해를 병에 좋다는 약을 구하러 다녔다. 약탕기에 달인 약이 뜨거울까 숟가락으로 떠서 불며 식힌 다음 입에 넣어 드리는 등 지극 정성을 다했다. 애석하게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본인이 탈진 상태임에도 묘소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다.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날로부터 사철이 한 바퀴 돌고, 한 달이 되던 날 아들도 눈을 감았다. 향리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효자로다 효자로다’ 하며 대동회를 열어 나라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 나라에는 상을 추천할 길이 없었다. 귤은이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마쳤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고을의 효자를 잊지 않고 귀감으로 삼아 후세에 남길 것을 의논하여 마을 입구에 효자비를 세웠다. 할아버지는 한학에 능통하였으며 일제침탈을 피해 산 중턱에 대가족을 이주시켜 초막을 짓고 살았다. 초막의 사랑채에 서당을 만들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못 가는 청소년들을 모아 「사자소학」과 「천자문」을 가르치며 학동들에게 “지금 우리나라는 힘이 없어서 왜놈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너희들은 부지런히 학문을 갈고닦아 잃어버린 나라를 찾는데 초석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할아버지의 방 천장과 벽에는 약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때문에 방안에서는 언제나 한약 냄새가 풍겼다. 주로 농막 주변에 있는 논두렁과 밭두렁, 야산과 계곡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가 대부분이었다. 구기자와 오미자 같은 열매를 따서 말리고, 찰밥나무와 꾸지뽕나무는 껍질을 벗겨 말렸다. 익모초와 구절초, 도라지, 질경이, 탱자 등 수백 수천 종의 약재를 말렸다가 봉지에 담아 겉봉투에 약재 이름을 쓰고 매달아 보관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병을 얻어 찾아오면 기성 한약서와 동의보감을 참고하여 무료로 처방해 주었다. 그 때문에 형편이 어려운 지역 주민들에게는 한방의 명의로 존재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소문이 전해져 하동은 물론 광양과 사천 지방에서도 고질병 환자들이 찾아오곤 하였다. 이러한 할아버지의 덕(德) 있는 보시로 향리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덕암산 자락에 사는 도인 같은 선비를 ‘덕암처사’라 불렀다. 아직도 마을 노인들 중에는 덕암처사를 기억하는 이가 있다. 자랑스러운 할아버지. --- 「덕암처사」 중에서 |
|
김영주의 에세이의 모티브는 사랑이다. 그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들과 지내면서 느낀 감정을 글에
담아 사랑을 베푸는 끝없는 여행을 계속한다. 작가는 산문과 시를 동시에 추구한다. 이 책에서도 시문을 섞어 기술하고 있어 독자들의 흥미를 돋운다. 김영주의 에세이는 자연예찬이며 가족애에 바탕을 둔다. 그의 작품 「물레방앗간」은 어릴 때 방앗간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글이다. 물레방앗간은 가업이었으며 성장기의 무대였다. 그 아래 시내는 놀이터였다. 방앗간 옆에 사는 또래 친구와의 추억도 잊을 수 없기에 작품 속의 소재가 되었으리라. 함께 자란 가난한 동무를 기억하는 작가의 마음이 절절이 녹아 있다. 또한, 그는 깊은 사색을 통해 문학이라는 샘에서 삶을 길어 올린다. 그리고 삶의 씨앗을 잘 갈무리해 온 오쟁이를 소중하게 보듬고 있다. 새봄을 맞아 봄비가 내리면 그 씨앗이 움트고 튼튼한 나무로 자라 우리의 마음에도 희망의 꽃들이 활짝 피리라. 김영주의 가족에 대한 마음은 자칫 메말라가는 현대인의 마음에 한 줄기 봄비가 되어 촉촉이 적셔 줄 것 같다. - 오병훈 (수필가) |
|
김영주의 시편들과 산문을 관통하는 정조는 유가(儒家)와 풍류가 함께 어우러져 춤추고 있다. 현대시의 복잡다단한 양상에서 어떠한 전범적인 기준을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다종한 시인들의 시세계에서 김영주의 문장은 차라리 소박하고 담대하여 구김살 없이 사무사(思無邪)에 닿아 있다.
김영주의 시편들은 유가의 크고 작은 봉오리들과 연대하고 있으므로 공자의 시학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변화무쌍한 시대정신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관통하여 도(道)는 문학 속에서 지속하여 왔는데, 김영주 시의 심상에서도 궤를 같이하면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다양한 변화와 함께 도의 알맹이는 침범당하지 않고 면면히 흐르고 있다. 우리의 신명과 어우러져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풍류도는 드디어 김영주의 시편들에서도 엿볼 수 있고, 현재의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세계를 홀리는 K팝이나 영상 미디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영주의 시편들은 유가와 풍류도의 아름다운 만남을 통하여 한국의 신바람 나는 신명과 결합하여 춤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 아바타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길 바란다. - 김영탁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