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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두식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에서 ‘9’는 완전수가 아니라 ‘하나’가 모자란 숫자이다. 완전은커녕 부족한 수이자 결핍의 수이다. 십진법은 그렇게 우리를 수비학적 상상력으로 이끈다. ‘9’는 절정을 향해 끓어오르는 긴장과 열망의 숫자이며, 첨두아치를 향해 가파른 기울기를 견디어 내는 영원히 추락하지 않는 접선이다. 그런 점에서 시간 속에서 시간의 깊이를 재는 이번 시집은 시간의 분수령인 첨두아치를 향한 접선의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다.인간에게 시간이란 절대적 바탕이자 존재의 근거라는 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의 만등(萬燈)에 올라타 두드리고 때리고 던지고 퉁기며 살아간다. 산 자들은 산 자들대로 삶의 방식으로,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대로 죽음의 방식으로. 시간을 겪는 그 양상의 무한성에 존재의 비의(秘義)가 있다는 듯이.시간의 보편성에 반하여 시간 여행자의 고유성을 노두식 시인에게 허여해야 한다면, 일흔다섯 편에 이르는 이번 시집의 세목들이 낱낱이 시간의 어떤 국면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마음의 비밀은 그 자체로 / 비밀스러운 존재의 부분을 이루”(「비밀에 대하여」)듯이 고유한 시간의 국면들을 통해 보편성의 지평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섬세하고 유장한 사유의 떨림이 번뜩이기 때문일 터다.그렇다면 함께 시간을 겪는 ‘시간의 존재’인 우리는 그가 보여 주는 시간의 깊이를 가늠하고 사유의 넓이를 음미해 보는 것만으로도 ‘고유한’ 시간을 체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시간 여행자는 오늘도 걷는다. 마치 걷는 일이 자신의 본업이라도 되는 듯 그는 걷고 또 걷는다. 그가 걷는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이 있기나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행자는 걷고 또 걷는다. 어쩌면 걸음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데 시간 여행자의 본성이 있다. 여기서도 시간의 넓이는 반복의 무한성에 연결되고, 깊이 또한 반복의 필연성에 접속한다. 시간 여행자에게 반복은 무한이기도 하며 때문에 필연적이기도 하다.어둠에서 풀려난강물의 흐름이 조금씩 빨라지고교각에 걸린 표지등이 흐려지는 때맨 흙길 위의 고요를 밟아 가면어린 풀들은 납작한 잠에서 깨어나 웃고질척한 발치에서는 봄 냄새가 피어난다걸음에 여유를 부리며 비틀거리며방패 같은 겉옷을 벗어 든다의식 없이 지배되는 의식이 편안하다마음의 집을 나서서 무심히 걸어도길의 끝은 언제나 희망으로 올 것을 믿는 일몸의 안팎을 연한 햇살에 적셔살갗의 얕은 곳에 두루두루 하루의 새잎이 돋아나고간지러움 속에 초록빛 긍정의 호기가 솟는오늘은 아침이 석영 알처럼 반짝인다- 「산책」 전문 여기 “물수제비가 강물 위에서 스스로 미끄러지듯 비상하는 순간”(이시영)과 같은 시간 여행자의 합일의 순간이 있다. ‘석영 알’처럼 반짝이는 아침 햇살에 적셔 ‘살갗의 얕은 곳’에 새잎이 돋아나는 순간이다. 그러한 아침은 역시 ‘긍정의 호기’가 솟는다. 그런 날이라면 걸어도 걸어도 고단하지 않을 것이며, “마음의 집을 나서서 무심히 걸어도 / 길의 끝은 언제나 희망으로 올 것”이다. 이런 순간들(!)을 위하여 시간 여행자는 걷고 또 걷는지 모른다.그것은 “이동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건너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 내에서 위치를 바꾸는 것”이며, 이러한 “내재적인 위치 변화의 모범적인 예는 사랑의 둘 안에 있다.”(『비미학』)는 바디우의 통찰을 연상케 한다. 일상 속에서 같은 시각 같은 장소를 거닒에도 다른 상념 다른 고뇌를 안고 걸을 수밖에 없지만, 언제나 ‘길의 끝’은 희망으로 올 것이라 믿는 일, 그것은 ‘방황과 방향이 하나라면 불일치 또한 얼마든지 합일의 다른 양상’일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것은 배반의 항상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꿈꾸는 존재인 인간의 숙명과도 같다.그렇게 시간 여행자는 오늘도 “몸 안팎을 연한 햇살에 적셔” 걷고 또 걷는다. “살갗의 얕은 곳에 두루두루 하루의 새잎이 돋아나고 / 간지러움 속에 초록빛 긍정의 호기가 솟아나도록” 걷는다. 여행자는 이렇게 나날이 걸어서 희망의 미래로 나아간다.그러나 “물이 되어도 흐르지 못하는 일들이 / 모질지 않기를 그토록 간구하였으나”(「쇠비름」), 불행하게도 아이들은 “처마 끝에 매달려 울고 있”(「고드름」)다. 시간 여행자는 다시 걸어야 한다. ‘길의 끝’까지 걸어서 다시 희망을 찾아야 한다.초승달 신을 삼아 어스름을 걷는다갈대숲에보랏빛 강바람우수수 한숨 지며 먼 산 돌아눕고눈에 물안개 서려네 모습 젖는구나너를 찾아가는 길 보이지 않는 길뜬 걸음만 총총내 마음의 샛강마른 이삭마다 맺혀 있는 이슬 같은 시간이너의 목소리로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른다- 「누이 생각」 부분이런 노래, 이런 마음이 있어 시간 여행자의 걸음은 무한히 반복된다. 그러므로 ‘길의 끝은’ 없다. ‘당분간’도 ‘흔들림’도 ‘그늘의 쓴맛’도 모두 겪은 여행자이지만, “윤기 나던 단발머리” 누이의 처음과 끝이 ‘한 뼘’에 불과하다면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래는 영원히 반복된다.“낮게, 살아야 하는 것”낮음. 우리에게 “가는 것은 항상 오는 것보다 낮은 자세다”. 노두식 시인의 전언처럼 우리는 ‘낮게’ 태어나 ‘더욱 낮은’ 곳으로 가는 존재들인지 모른다. 그것은 ‘가을’이 “관목과 이끼 낀 바위 비스듬히 기우는 쪽으로” 스며드는 것과 같고, ‘빛의 타래’가 “쇠락하는 잎 끝에 머물다가 / 바닥으로 똑똑 방울져 떨어”지는 것과 같다. ‘젊음’도 ‘사랑’도 갈 때는 낮았다.아직 오늘은 아니라고 한다여름 몰래관목과 이끼 낀 바위 비스듬히 기우는 쪽으로가을이 스며들고 있다시든 열기가 숲속을 배회하고후회의 띠처럼 서늘하게 스쳐 가는 아쉬운 시간이 바쁘다말간 빛의 타래가 쇠락하는 잎 끝에 머물다가바닥으로 똑똑 방울져 떨어진다여기 동작이 느려진 곁가지들의 춤이가사를 잃은 노래에 얹혀 있던계절의 마지막 온기를 끊어 내고 있다가는 것은 항상 오는 것보다 낮은 자세다젊음이 그러했고 사랑이 그러했다일어선 것이 엎드린 것들을 지운다배경을 흐리며 어제의 여름이 슬쩍 다가와 머물다가해 짧은 오후의 그림자처럼 자취를 감춘다초록은 그리운 것들 속에 깃들어 한동안은오히려 짙어질 것이다그래도 아직오늘은 아니라고 오늘만큼은 아닐 거라고여윈 들풀이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다본다- 「가는 것은 낮은 자세로」 전문노두식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하여 “시를 통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면서도 인간 회복에 이르는 아름답고 건강한 시 의식을 견지해 오고 있다.”(김병호, 「실존의 감수성과 공명」)는 언급은 여전히 타당하다. 이번 시집 『가는 것은 낮은 자세로』가 보여 주는 대로 그가 여전히 시간의 깊이를 깨달은 시간 여행자로서 대긍정의 사유를 보여 주는 한 그에게서 ‘아름답고 건강한 시 의식’을 발견하는 것은 소당연(所當然)에 가깝다.무한히 연장된 시간과 공간을 사유하기. 연결과 접속과 합일을 긍정하기. 그리하여 ‘시간의 만등(萬燈)’에 올라타 산 자들의 시공과 죽은 자들의 시공을 합치고 뭉치고 주무르고 휘젓기. 노두식 시인의 이번 시집은 이와 같이 아주 특별한 시간 여행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시인의 다음 여행을 기대하며, 그가 새롭게 펼칠 또 다른 여행담을 기다리는 기쁨을 누려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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