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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o Paasilinna
여행자들은 핀란드 사회가 냉혹하다고 입을 모았다. 삭막한 관습이 핀란드를 지배했으며, 핀란드 사람들은 서로에게 잔인하고 질투심에 찌들어 있었다. 탐욕스런 마음이 널리 팽배했고, 완강하게 돈을 움켜쥐기에만 급급했다. 핀란드 사람들은 의심이 많고 음흉했다. 웃는 경우에는 기뻐서라기보다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마음이 컸다. 사기꾼, 협잡꾼, 거짓말쟁이들이 많았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눈앞이 핑 돌 정도로 많은 집세를 갈취했으며, 터무니없이 엄청난 이자를 우려냈다......몸이 아파 병원에 달려가면, 교만한 의사들이 사람을 당장 도살해야 하는 늙은 말처럼 다루었다. 이런 모든 걸 참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걸리면, 정신병원의 험상궂은 간호사들이 강제로 환자복을 입히고서 마지막 남은 한 줄기 분명한 생각마저 흐리게 하는 주삿바늘을 정맥에 꽂았다......남자들은 쉴 새 없이 능력을 증명해야 했으며. 심지어는 짧은 휴가 기간 동안에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혐오스러운 직장 동료들이 기회만을 엿보다가 자신보다 약한 자가 있으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하게 몰아붙이고 괴롭혔다.
술을 마시면 간장과 췌장이 망가졌고, 음식을 좀 양껏 먹으려 들면 혈관의 콜레스테롤 수치가 증가했으며, 담배를 피우면 치명적인 암세포가 폐 속에 둥지를 틀었다. 뭘 하든 결과는 항상 나쁜 쪽으로 나타났다. 열심히 조깅을 하면 과로로 길에서 쓰러졌고, 조깅을 하지 않는 사람은 지나친 지방질 섭취로 관절이 망가지거나 척추에 문제가 생겼으며 결국에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 p.195 |
죽음의 순간에 농담을 하는 것은 금기였다.
“아무도 여러분들에게 굳이 함께 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 사실을 끝으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소. 여러분들 모두 각자 자신의 운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조용히 심사숙고해보길 바라오. 버스의 문은 열려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그 문을 이용할 수 있소. 저 밖에서 삶은 계속될 것이오.” 대령의 마지막 권유에 당황한 듯 침묵이 이어졌다. 자살자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혹시 누군가가 버스에서 내려 살아남으려는 생각을 품은 것은 아닐까? --- p.217 |
저녁을 먹으면서, 흡족한 표정의 집주인이 핀란드 어디에서 온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손님들의 격렬한 투쟁 정신이 돋보였다고 하며,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고 싶어했다.
대령이 잔을 높이 들며, 자신은 죽음을 향한 무명인사 단체를 인솔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회원들의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요,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요." 주인이 맞장구쳤다. --- p.257 |
빛과 기쁨의 축제날인 성 요한의 날, 하필이면 이날 파산한 세탁소 주인 온니 렐로넨은 자신의 생을 마치기로 결심한다. 사업은 부도나기 일보직전이고, 그는 외진 곳에 위치한 헛간을 생의 마지막 종착역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지독하게 운 좋은 이 남자는 이상한 소리에 놀라 죽기를 잠시 중단하게 된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올가미에 걸려 거의 목숨이 끊겨가는 한 남자를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이 남자 또한 빛과 기쁨의 축제날,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한 육군 장교였다.
우연치곤 너무나 어이없는 만남을 통해 그들은 잠시 죽겠다는 결심을 미루게 된다. 대신 그들은 며칠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낚시를 하고, 사우나를 가고, 맥주를 마시고 철학적인 대화까지 주고받기에 이른다. 친구를 갖게 된 그들은 자신 혼자만이 삶에 절망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서, 자신들과 비슷한 고통을 나누는 ‘동지’들을 더 찾아보기로 결정한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이 핀란드 유수의 일간지에 낸 자살단 모집 공고는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삶에 지친 600명 이상의 남녀들이 편지나 엽서로 답신을 보낸 것.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생각을 나누기 위해 그들은 세미나를 개최한다. 그리고 생애 최고의 사건이 벌어진 그날 밤 이후로 사람들은 인생을 고달프게 만드는 핵심을 깨달아 가게 된다. 자살 동지들이 결정한 최종 목표는 노르웨에 있는 유럽의 최 북단 노르카프의 절벽에서 뛰어내려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이다. 눈앞에 확실한 죽음을 두고 떠나는 여정, 문득문득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욕구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버스는 전속력으로 노르카프를 향한다. 작가는 숲과 호수 등 자연을 배경으로, 자살자들의 눈물겨운 하지만 즐거운 일탈여행을 재치있고 기발하게 그려낸다. 자살자들은 삶을 포기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만, 어느새 그들의 여행은 삶에서 잃어버린 행복과 자유를 되찾기 위한 ‘실존주의적 방랑’이 된다. |
냉소와 블랙 유머, 그리고 삶의 기쁨과 의미를 일깨우는 따뜻한 성찰
아르토 파실린나는 심오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유머러스하고 경쾌하게 풀어내기로 유명한 작가다. ‘죽음’을 소재로 하는 『기발한 자살 여행』 역시 자살자들이 토해내는 현실 삶의 우울한 이야기들과 우스꽝스런 사건들을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모든 희망을 버리고 오직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극단적인 인물들이 벌이는 일련의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블랙 유머를 가미해가며 한 판의 익살스런 풍자극으로 만들어낸다. 여러 번의 파산 끝에 인생마저 파산 난 세탁소 사장, 평화의 시대 설 자리를 박탈당하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암으로 잃어버린 대령, 이혼 후 새로운 사랑도 정감어린 소통도 포기해버린 시민대학 부학장, 방탕한 삶 끝에 신에 귀의했으나 은총의 신호가 오지 않아 자살을 결심했다는 측량기사, “저는 미친 게 아닙니다. 다만 가난할 뿐이지요”라고 항변하는 우울증 환자, 죽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새 관광버스를 길들일 것인가 고심하는 버스 운송회사 사장,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몸도 마음도 피투성이가 된 주부, 항해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산 배 때문에 미쳐버린 육지의 선장, 밍크 서커스단을 꿈꾸다 부인을 잃고 빚더미에 앉은 서커스단장 등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도덕적 제약이나 사회장벽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무모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여행은 여전히 삶에 매여 있는 독자로 하여금 해방감을 맛보게 한다. 이 풍자극 속에서 파실린나는 간결하고 솔직하고 직선적인 문체로 경쾌하게 핵심을 찌르며 인간의 욕망과 고통, 삶의 진실을 담아낸다. 자살자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를 잃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위협받았으며, 이제 더 이상 삶을 지탱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나아가 파실린나는 여러 자살자들이 겪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백을 통해 현대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부조리함을 꼬집는다. 또한 종교, 군대, 관료주의 등을 냉소하면서 자살을 권하는 현대 사회제도의 모순을 고발한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와 함께 극단의 선택을 야기하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지만, 그는 전혀 즐겁지 않은 주제 속에 유머와 함께 삶의 기쁨을 담아낸다. 우울하고 절망스런 사건들 사이에서도 밝고 쾌활한 터치를 잊지 않으며, 유머를 통해 자살자들 그리고 독자의 힘겨운 인생 여정을 치유한다. 온갖 악한 심성과 나약함, 광기를 가졌음에도 행복해야 할, 인간을 위한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그의 익살스런 풍자극 뒤에는 이렇게 휴머니즘이 숨어 있다. 『기발한 자살 여행』이 핀란드를 배경으로 전형적인 핀란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독창적인 인물들과 독특한 서술방식,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이야기 속에 그가 담아내는 경쾌한 사회비판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통찰, 그리고 진정한 휴머니즘 때문일 것이다. 이 블랙 유머의 대가의 술수에 빠져 키득거리며 자살 여행단의 뒤를 쫓다 보면 , 어느새 현실을 이해하는 신선한 시각과 함께 상처 입은 자신과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다. 자살, 삶과의 이별인가 재회인가 ? 『기발한 자살 여행』은, 살인은 단지 100여 건인데 비해 매년 1500여 건의 자살이 일어나며,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는 우울한 나라, 핀란드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현재 핀란드 사람에게보다 한국 사람들에게 더 절실한 소설일지 모른다. 이미 한국은 핀란드 못지않게 ‘우울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인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가운데 최고라는 통계가 보도되며, ‘자살’이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지난해 자살자는 1만1523명. 하루 평균 32명이 목숨을 끊었다. 또한 한국은 알코올중독에 시달린다. 전체 인구의 50% 이상이 알코올 상습자이고 적어도 200만 이상이 알코올중독 상태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가 된 것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사랑을 명목삼아 착취를 일삼는 가족, 사랑하는 사람과의 단절 혹은 이별,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냉혹한 현실 등 핀란드 자살자들의 영혼에 상처 입히고 자살을 강요하는 절망의 원인들은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특히 자살자들이 비관하며 토해내는 핀란드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은 놀라울 정도로 한국의 상황과 비슷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저자 특유의 유머와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은 이 작품은 핀란드뿐 아니라 현대의 ‘우울한’ 한국에서도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줄 것이다. 파실린나의 자살 여행 보고서는 좌절감에 빠진 사람들이나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삶의 욕구와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학적 치유의 소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