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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종이배 * 007
노을에 묻다 * 047 말코 엄마 * 089 사람의 결 * 129 유령 * 175 피어라 돈꽃 * 211 피었다 돈꽃 * 251 해설 | 박명순 * 288 작가의 말 * 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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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다는 유난히 짙은 청람색이다. 바닷가에 이르자 선재가 쪼르르 달려가 종이배를 띄우기 시작했다. 잔물결이 조금 밀려왔다 조금 더 뒤로 물러난다. 물 위에 띄운 노란 종이배는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물결 따라 흔들리다가 자갈밭으로 도로 돌아온다. 선재는 밀려온 종이배를 띄우느라 정신없이 자갈밭 이쪽에서 저쪽으로 달려갔다 달려왔다 한다.
현옥은 선재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쏟아지는 눈물을 훔쳤다. 얼마나 형이 보고 싶으면 저럴까. 선재의 간절한 기다림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흐르는 세월도 선재가 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우지 못하리라. 선재가 띄우는 종이배는 먼바다로 나가지 못해도 마음은 물결을 타고 서해를 돌아 진도 바다에 당도할 것이다. 명재가 가라앉는 배의 선실에서 다급하게 문자로 “선재야, 사랑한다.”라고 썼던 그 마음에 닿을 것이다. --- 「노란 종이배」 중에서 그런 외삼촌이 달라진 건 말코가 사라지기 즈음해서다. 평소에는 말코를 몹쓸 역병 취급했는데 슬며시 두둔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외모는 거죽에 불과한 것이고 심성이 그 사람의 본모습이라면서 말코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사람의 도리를 아는 말코야말로 아버지에게 ‘과분한 여자’라고 못 박았다. 나는 외삼촌의 그런 태도가 몹시 궁금하여 몇 번 묻다가 포기했다. 외삼촌이 대답 대신 도덕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궁금증은 세월이 한참 흐른 훗날에 풀렸다. 외삼촌은 내가 가정을 꾸리고 그런대로 사는 걸 보고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말코는 지혜로운 여자였다. 느이 애비에게서 얼마쯤 재산을 빼돌려 내게 맡겼다.” --- 「말코 엄마」 중에서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선고문 낭독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됐다. 박동길은 특별히 놀라지 않았다.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예견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다만 궁금한 건 김 선생이었다. 탄핵 심판을 앞두고 성가실 정도로 자주 걸려온 우국충정의 전화가 탄핵 선고 후 딱 끊긴 것이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우연히 만난 뒤 수십 차례 김 선생의 전화를 받았지만, 박동길은 단 한 번도 그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온 전화는 하나같이 대리운전업체의 번호였다. 아, 김 선생의 시간이 이렇게 고단하게 흘렀구나. 박동길은 비로소 김 선생의 삶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가슴이 저렸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20여 년 동안 자기 근황을 알리지 않았고 이번 만남에서도 내색하지 않았다니… 촛불집회에서 몸에 태극기를 두르고 호기를 부리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 「사람의 결」 중에서 김경수는 오래된 기억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동안 미안했다며 노란 송홧가루가 날리는 산을 천천히 내려갔다.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그는 처음으로 ‘아가리’ 대신 ‘입’이라고 표현했다. 평정심을 찾은 것 같았다. 그가 유령이라고 지칭한 김현중의 입을 찢은… 혹은 찢으려 한 이유는 알게 됐지만, 실제 찢었는지는 여전히 미궁이다. 한때 의기투합했던 신문 동업자들도 김현중의 실체를 몰랐던 것 같다. 그들은 김현중의 제안으로 시작한 『T주간신문』과 함께한 시간을 잊고 싶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실패를 깨끗이 인정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자책했던 그들은 기억을 지움으로써 한 인간을 미워해야 하는 괴로움도 떨쳐내고 싶었으리라. 그들은 비록 언론을 통해 사회변혁을 꿈꾸다 실패했으나 ‘인간에 대한 예의’를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 같았다. --- 「유령」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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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희망으로 또는 과거에서 미래로
정낙추의 소설은 현실의 움직임에 민감하다. 하지만 움직임의 말초에 반응하기 보다는 그 움직임이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지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동시에 정낙추의 소설은 움직이는 현실에 판단을 내리는 역할을 하지 않고 소설 속 인물들이 어떻게 해서 ‘현재 상태’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맥락이 살아 있는 관점을 시종 유지한다. 예를 들면 「사람의 결」에서, 주인공 박동길로 하여금 “두어 시간 동안 넋 놓고” “세상 강의를” 듣게 했던 “김 선생”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가 촛불항쟁이 한창 중인 “서울시청 광장”에서 조우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는 ‘태극기부대’가 되어 있었다. 박동길은 이 곤혹스러운 만남을 통해 김 선생과의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면서 김 선생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을 감지해내고 “비로소 김 선생의 삶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연민마저 느낀다. 또 「노란 종이배」에서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선재”의 주변 이야기를 차츰 넓혀 가면서 선재가 “노란 종이배”를 바다에 띄우려 하는 마음의 정체를 찾아간다. 선재는 자기가 만든 “노란 종이배”를 타고 형이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바다에 종이배를 띄우는데, 선재의 형인 “명재”가 “2014년 4월 16일, 오전 11시”에 침몰한 세월호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가라앉은 여객선엔 제주도 수학여행에 들뜬 선재의 형, 명재도 타고 있었다. 방송에선 계속 슬로모션의 한 장면처럼 배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여주며 다급한 목소리로 속보를 알려도 선재네 가족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 몰랐다. 현옥은 봄나물을 뜯느라 들판에 있었다. 허둥지둥 달려온 미호 할머니 은순의 손에 이끌려 텔레비전 앞에 선 현옥은 반복해 보여주는 세월호 침몰 장면에 까무러쳤다. ―「노란 종이배」 중 어쩌면 소설로서는 범상하기까지 한 이 장면 이후로 선재의 종이배 접기의 원인이 작품 수면 위로 급부상하면서 작품에 비극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형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선재의 행동을 통해서 더욱 도드라진다. 다른 편에 선재의 할머니 “현옥”이 있는데, 당연히 “현옥”은 바다에서 사라진 손주 명재의 현실을 알기에 선재의 기다림마저 고통스럽게 겪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작품 말미에서 작가는 노을에 물들기 시작하는 바다로 가는 두 인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선재야, 이제 집에 갈까?” “응. 할머니, 내일은 배가 바다로 나갈 거야.” 현옥과 선재가 바다를 등지고 제방에 올라섰다. 희망과 절망의 동행이다. 노을이 두 그림자를 점점 길게 키웠다. 선재가 형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두 번째 가을이 깊어갔다. ―「노란 종이배」 중 이 작품집에서 ‘노을’을 전면적으로 등장시키는 작품으로는 「노란 종이배」와 표제작인 「노을에 묻다」가 있다. 여기서 ‘노을’은 공히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간대, 정확하게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가는 카이로스(Kairos)에 대한 메타포로 읽힌다. ‘노을’을 통해 주인공들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뜻이 아니다. 절망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새로운 한 발’을 힘겹게 내딛는 지점의 배경을 작가는 노을로 삼는 것이다. 덧없이 짧은 가을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하늘이 노을에 물들기 시작했다. 하루 중에 포구로 입항하는 이 순간이 제일 한가한 시간이다. 나는 커피를 들고 고물 뱃전에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빠르게 달리는 배의 스크루가 하얀 거품을 토해내고 그 포말이 사라진 아득한 저쪽 수평선의 노을이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육지에서 바라보면 지금 내가 탄 배도 노을 속에 있겠지. 미금포 해변에서 바라본 그날처럼…. ―「노을에 묻다」 중 씨앗을 보살피는 민중으로서의 여성 「노란 종이배」와 「노을에 묻다」가 다소 서정적인 작품이라면 「말코 엄마」와 「사람의 결」 「유령」 「피어라 돈꽃」 「피었다 돈꽃」은 리얼리즘의 규율에 충실한 작품이다. 그 중에서도 「말코 엄마」는 주목을 요하는 작품인데, 오늘날 거의 찾기 어려운 품격 있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현대소설이 현실을 반영한다면서 잃어버린 일종의 영웅 캐릭터를 작가는 「말코 엄마」에서 그리고 있다. “말코 엄마”는 두 가지 사실과 대비되며 그 품격이 부각된다. 한 가지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평생 난봉으로 알뜰히 탕진한” 아버지의 마지막 여자였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태까지 아버지가 섭렵한 여자 중 가장 못 생긴 여자였다”는 것. 하지만 ‘말코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고 장사 수완이 뀌어난 여자였다.” 거기다가 “장구 장단과 소리는 읍내에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결국 ‘말코 엄마’는 “인물 하나 빼고는 버릴 게 없는 여자”인 것으로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주인공에게 보이는 마음을 주인공은 이버지에 대한 미움 때문에 끝내 거부하고 만다. 그런데 어느 날, ‘말코 엄마’는 “삼거리 주막의 세간을 그대로 놔둔 채 홀연히 몸만 빠져” 나갔다. 아버지는 “말코가 내 재산과 골을 다 빼먹고 도망쳤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면서 폐인이 되어갔고,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하지만 나중에 반전에 해당되는 비밀이 드러난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외모는 거죽에 불과한 것이고 심성이 그 사람의 본모습이라면서 말코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사람의 도리를 아는 말코야말로 아버지에게 ‘과분한 여자’라고 못 박았다. 나는 외삼촌의 그런 태도가 몹시 궁금하여 몇 번 묻다가 포기했다. 외삼촌이 대답 대신 도덕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궁금증은 세월이 한참 흐른 훗날에 풀렸다. 외삼촌은 내가 가정을 꾸리고 그런대로 사는 걸 보고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말코는 지혜로운 여자였다. 느이 애비에게서 얼마쯤 재산을 빼돌려 내게 맡겼다.” ―「말코 엄마」 중 ‘말코 엄마’가 아버지의 재산을 빼돌려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우는 가세의 일부를 “외삼촌”에게 맡겨놓음으로써 주인공의 앞날을 예비한 것으로 암시된다. 끝내 주인공은 “어쩌면 말코는 어린 시절 내 앞날을 유일하게 걱정해준 엄마 비슷한 여자였는지 모른다”라고 마음을 돌리게 된다. 이는 경제적 부와 언론을 독점한 가부장들의 세계에서 미래의 씨앗을 준비한 건 바로 여성이었다는 적극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의 결」 「유령」 「피어라 돈꽃」 「피었다 돈꽃」은 일종의 세태 소설인데, 일상적인 세태를 다룬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 현실을 철저하게 ‘지역적 관점’에서 고찰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급변하는 현실로 인한 우리 사회의 정신적 불구가 지역 사회의 언론과 정치 현실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에 해당될 것이다. 「사람의 결」의 “김 선생”과는 조금 다르게 「유령」에서 “김현중”은 아무 실력도 없이 ‘진보 언론’을 시작해놓고 여러 사람을 실망시키다 못해 지역의 토호들과 한편이 된다. 「피어라 돈꽃」과 「피었다 돈꽃」은 연작소설로 읽힌다. 두 작품에서는 지역 정치권이 중앙 정치권의 구태를 복제, 반복하는 경향을 약간은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풍자와 조롱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감이 있지만 정낙추의 리얼리즘이 아직도 진행형일 것을 감안할 때, 언젠가는 한국 현대사에 드리워진 깊은 그림자를 작가가 드러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것은 박명순 문학평론가가 남긴 작가의 근황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가 지역의 민중사를 채록 중이라면, 충청도 태안 지역을 휩쓸었던 역사의 수레바퀴 흔적을 비켜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겨울 문턱이다. 내가 낳은 ‘소설’이라는 자식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老産으로 겨우 세상에 나왔는데 터울마저 띄엄띄엄하다. 그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고 나도 잊을 정도로 방치했었다. 할 말도 안 할 말도 때가 있다고 소설로 불러낸 인물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오래된 시간으로 들어가서 나와 마주했던 그들에게 고단한 삶을 살았다고 인생이 하찮은 게 아니듯이 변하는 것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나 시간이 지나면 다 오래된 것이 된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내 자식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드물어도 괜찮다. 나 역시 내 자식들에게 칭찬도 연민도 하고 싶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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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청년실업의 문제, 언론의 왜곡, 선거판의 타락상 등 민감한 현안을 측면적 시각에서 다룬다. 그러니까 작품의 인물들은 우리 시대 선량한 이웃들의 그늘진 자화상이다. 물론 소설의 주인공들이 긍정적인 측면만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풍자와 해학의 행간에 숨겨진 넉넉한 포용 그것이 정낙추가 바라보는 연민의 이유이며 인간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의 인물들이 사회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끝내 존엄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 성과는 대중들에게 내세울 화려한 업적과는 거리가 멀다. 가까운 이웃이나 가족 정도가 알아줄 만한 소소한 것이기도 하다. 그 소소함의 사연이 소설의 흐름을 구성지게 하면서 개개인의 가슴에 스며드는 진정성이 되는 점이다. - 박명순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