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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야스나야의 오솔길 똘스또이의 무덤 풍경 1부. 풍경의 미학 1장. 풍경의 작가, 풍경의 사상가 2장. 자연의 풍경, 마음의 풍경 3장. 사랑의 풍경, 결혼의 풍경 2부. 인생의 풍경 1장. 인생과 행복, 또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 2장. 기차와 프랑스어, 또는 허영의 세계 3부. 말년의 풍경 1장. 예술가와 말년의 양식 2장. 부정(否定)을 넘어서는 똘스또이의 출가 3장. 무엇을 위한 예술인가? 에필로그 소피야의 일생, 이루지 못한 가출 참고문헌 지은이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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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똘스또이의 풍경 묘사는 아침에서 달밤까지, 봄에서 겨울까지, 숲속에서 실내까지, 귀족에서 민중까지, 풀베기에서 전쟁터까지, 태어남에서 죽음까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도록 거센 눈보라에서 작열하는 태양, 세상을 뒤흔드는 공포의 뇌우까지를 아우른다. 그는 풍경의 작가요, 풍경의 사상가다. 풍경을 통해 똘스또이는 세상을 느끼고 인생의 모순과 역설에 관해 명상한다. 온갖 풍경에 관한 세밀한 묘사가 없다면 똘스또이 작품의 아름다움도 없을 것이며, 세상을 뒤흔든 똘스또이의 사상도 기껏 어느 노인의 날선 주장에 불과할 것이다.
--- p.13 - 무엇보다 먼저 자연풍경에 관한 똘스또이의 감각적이고도 풍부하고 적확한 묘사야말로 독자들이 주의 깊게 다시 살펴보아 마땅하다. 나는 풍경이 없는 똘스또이 작품들의 가치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소설 속 공간의 분위기나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와 행동거지를 꼼꼼하고 정확하게 묘사함으로써 디테일에 특별히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작가지만, 똘스또이는 인공적 환경과 그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이전에 먼저, 그리고 늘, 자연 자체에 기본적인 관심을 두었다. 그는 자연에 궁극적 가치를 부여했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은 자연과 직접 관련된 것이었다. 자연과 거리를 둘수록 순수함은 빛이 바래고, 아름다움은 엷어지고, 선(善)은 멀어지는 것이었다. 자연이 아니라면, 젊은 날의 방종과 허영에 가득 찬 무도회의 타락과 신(神)을 팔아 교회를 섬기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구원받을 길이 없을 것이었다. --- pp.36~37 - 『전쟁과 평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처럼, 어떤 서술은 소설의 줄거리 전개에 꼭 필요한 것인가 다소 의문이 들더라도 작가 자신이 직접 개입하여 독자들에게 인간과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문학성’을 중시하는 작가와 비평가들은, 특히 마지막 방식이 똘스또이의 ‘일탈’이자 전체적으로 탁월한 그의 작품이 지닌 큰 약점이라고 지적해 왔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이야말로 똘스또이가 다른 작가들과 기본적으로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똘스또이는 청년시절부터 만년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기(多岐)한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 수많은 인물과 갖가지 사상(事象)의 구체적인 개성과 특질, 미묘한 느낌의 차이 등을 놀랍도록 예리하고 풍성하게 묘사하는 ‘천재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 p.154 - 따라서 똘스또이 입장에서 진정한 예술은 사람들 사이에서 감동의 감염력이 강해야 한다. 감염력이야말로 예술의 특징일 뿐 아니라, “그 감염력의 정도는 예술의 가치를 재는 유일한 척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훌륭한 예술, 즉 감염력을 갖게 되는 예술은 전해지는 감정이 독창적인가, 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확실한가, 그리고 전하고자 하는 감정을 예술가 자신이 체험한 진실성 있는 것인가, 라는 조건에 따라 정해진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조건은 마지막, “예술가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마음속으로부터 표현하고 싶다는 내적인 욕구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p.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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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가 몸을 던졌다는 저수지를 지나 아름드리 자작나무들이 양 옆에 쭉 늘어서있는 경사진 오솔길을 한참동안 오른다. 나뭇잎들 사이로 다정하게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넉넉한 흙길을 걷는 느낌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왼쪽으로 사과밭이 나온다. 그 옆에 옛날 마구간이 보이고 아이들 두엇이 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타고 간다. ‘빛나는 벌판’이라는 뜻을 가진 소박한 동네 풍경은 이렇게 번잡하지도 적막하지도 않다. 모스끄바의 변방, 하지만 한때 세상의 중심이었던 곳. 똘스또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순례길이다.
흔히 러시아의 대문호로 불리는 똘스또이는 한국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같은 교훈적 우화 작가, 또는 『전쟁과 평화』, 『부활』과 같은 장편소설 작가로 알려져 있다. 많은 작가들은 『안나 까레니나』를 문학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또는 간디와 함석헌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무소유 공동체나 비폭력저항 사상가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젊은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자신의 숲속에 작은 풀무덤으로 누워있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던들 내게도 똘스또이는 그저 대단한 작가이자 독특한 사상가로서만 남아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욕망과 방종과 번뇌와 깨달음과 회한 속에서 방황했던, 모순에 찬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한다. 그가 틈만 나면 참나무 숲길을 걸었던 산책자였던 것도 마음에 들고, 백작 신분을 벗어던지려고 농부의 옷을 입고 쟁기질을 했던 모습도 좋다. 여든둘의 나이에 출가해야만 했던 절박한 처지에 연민을 느낀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똘스또이가 ‘풍경의 작가이자 풍경의 사상가’라고 하는 사실이다. 뒤늦게 한국어로 번역된 똘스또이의 중·단편들에 빠져들면서 강렬하게 다가온 느낌이다. 얼마나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지 모를 일이다. 지난 5, 6년 동안 밴쿠버에서, 모스끄바와 뻬쩨르부르그에서, 그리고 일산에서 이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똘스또이와 함께한 날들』, 책을 펴내며(pp.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