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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고 낡은 러브호텔, 물침대 위에 아빠가 자고 있다.
음소거 된 티브이 화면의 불빛이 잠든 얼굴을 비춘다. 엄마, 지친 모습으로 한 손에 전단지를 든 채 돌아와 그 옆에 털썩 눕는다. 그 무게에 물침대가 출렁이지만 아빠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엄마는 일부러 몸을 들썩거리며 아빠를 살핀다. 아빠 출렁이잖아. 엄마 죽은 줄 알았어. 아빠 꿈을 꿨는데. 엄마 죽은 줄 알았다고. 아빠 긴가민가 싶을 땐 콧구멍 아래 손가락을 대 봐. (엄마의 두 번째 손가락을 잡고 자신의 콧구멍 아래 대며) 어때? 엄마, 얼른 손을 떼며 엄마 기분이 나빠. 뭔가 기분 나쁘게 축축하고 뜨끈한 바람이 닿는다고. 아빠 그래, 그럼 살아 있단 거야. --- p.12~13 부고편지 그 애가 죽었어. 이 말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써. 아직 유효한지 모르겠어. 이 죽음이, 혹은 죽음의 소식이. 어쩌다 이런 편지가 나한테까지 왔나 당황스럽다면, 나도 마찬가지야. 무서웠어. 내가 이 부고의 마지막 주인이 돼야 한다는 게. 그냥 흘려 버리고 싶었지. 행운의 편지는 이런 찜찜함 덕에 그렇게 멀리 갈 수 있었을 거야. 어쨌든, 죽었대. 아니, 죽었을지도 모른대. 거의 죽을 지경이라나. 죽은 거나 다름없다나. 내가 어떻게 알겠어. 소식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건너 건너 여기까지 왔고, 어쩌면 너는 이 부고를 받는 가장 마지막 사람일 거야. 어쨌든, 우리가 알던 그 애는 이미 죽었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 가고 있거나, 확실한 건 곧 죽을 거라는 거야. 그러니까 부고 편지지. 늦든 빠르든, 네가 이 편지를 보았을 땐, ‘죽음’과 그 애를 떨어트려 놓을 순 없을 테니까. 아직 이 소식을 받지 못한 누군가 중에, 알아야 할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너도 편지를 써. 이 죽음을 전해. 그 애의 부고에 대해서. --- p.27 아빠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래. 엄마 뭐? 아빠 인간 중에서도 진짜 인간이 있고, 인간이긴 하지만 인간 아닌 게 있대. 엄마 (잠시 아빠를 쳐다보다가) 취했어? 아빠 기준이 바뀔 거래. 인간의 기준이. 엄마 그럼 얘는? 고대의 부모들, 잠시 아이를 쳐다본다. 딱히 해 줄 말이 없다. 아빠 어쨌든, 분류 목록이 있나 봐. 기준에 따라서 다시 나눌 거래. 엄마 그럼 기준에서 미달하면? 목록에 들어가지 못하면? 아빠 지워지겠지. 엄마 지워진다고? 얘는 여기 있는데? 아빠 그러니까 여기 있긴 한데, 없는 거나 마찬가지래. 거기 있어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까. --- p.41 우울 안녕. 여자 우울이다. 우울 그래, 나야, 우울. 여자 그래, 너였어. 우울. 매일 밤마다, 매일 아침마다, 늘. 우울 그래, 늘. 항상 니 옆에 있었어. 여자 그래 맞아, 너였지, 언제나. 여자, 고인 눈물을 닦는다. 여자 진짜였나 봐. 보리가 그랬거든. 아주 길게 웃으면 눈물이 난다고. (사이) 보리가 죽었어. 여기 이 자리에 앉아서 다 봤으면서. 이미 몇 번이나. --- p.69 여자 신기하네. 어둠에도 색이 있어. 그냥 까맣기만 한 게 아니었나 봐. 그리고 더 또렷해졌어. 저기 말이야. 손톱달 아래, 저기. 그러나 계속 걸어도 저기에 닿지 않는다. 여자, 문득 겁이 나서 뒤를 돌아본다. 어느새 우울도 보이지 않는다. 사막한 가운데서, 완전히 혼자가 됐다. 방향도, 거리감도, 아무것도 알 수 없어진다. 여자의 가쁜 숨소리와, 발이 모래에 스치는 소리만 들린다. --- p.8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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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여자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누군가의 부고를 알리는 편지. 그러나 도대체 누가 죽었단 말인가? 여자는 오래된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 한때는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지금은 얼굴조차 희미한 나의 여자친구 ‘보리’. 어쩌면 이건 보리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아닐까? 여자는 뒤늦게 보리를 찾아 나서고, 그 길에서 은퇴한 바둑 기사를, 다단계 회사 리더를, 그리고 자신을 만나게 된다. 한편 보리가 머물던 방에는 이제 또 다른 보리가 살고 있다. 바로 원숭이 보리. 인간 보리의 손에 길러진 원숭이 보리는 처음으로 자신이 살던 ‘방’을 떠나 밖으로 향한다. 서로 다른 시간대, 다른 길 위에 선 이들. 그리고 여자는 걷고 걸어 무수한 도시의 방들을 지나 사막에 다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