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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가설의 공간 - 전시장이자 공연장일 수는 없을까?
시의 행간과 여백은 백색의 아득한 심연과 우주의 측정 불가한 어둠을 압축하고 있는 마술적인 공간이다. 이미지나 언어 밖의 공간 역시 사방으로 무한하게 뻗어나간 ‘저 너머’의 무엇이다. 이 공간에는 때로는 빠르게 스쳐가거나 잠시 머물다 가는 연기 같은 형상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팽목항의 파도 앞에서 울고 있는 아버지도 있다. 모두 종이책 한 권에 담기는 예측 불가한 스토리들이다. 구름처럼 가벼운 것, 크고 작은 것, 넓고 좁은 것, 빗방울과 샤워기와 욕조, 빨간 제라늄과 죽은 고양이, 옷걸이와 점퍼와 총… 한 사람의 시인과 화가이자 조각가인 젊은 남자가 부리는 마술이 마음껏 펼쳐져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이다. 시집이자 드로잉 북인 책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할 것 같다. 마치 56편의 옴니버스 영화가 연속 상영되는 무대이자 전시장인 이 가설의 공간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냥 책 이름을 망고나 솔방울이라 부르면 안 될까. 책 하나에 두 사람이 펼치는 공상이 뒤샹의 변기처럼 책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큼 전복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흥미롭다. 이 책 속에서 짝을 이룬 시와 드로잉의 결합 과정은 복잡한 편집 절차들만 뺀다면 영화의 내러티브만큼이나 극적인 전환을 매 쳅터 마다 완성하고 있다. 모든 예술이 영화처럼 대중적 환호를 향한 진화와 산업으로서의 광휘를 따라나서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근본적으로 반 영화적인 책의 관념에 현실과 대치할 만한 ‘격렬한 허구의 힘’을 구축해 보려는 시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