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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명
한없는 자리·14/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15/늙은 매미·16/응답·18/경계를 지우다·20/나를 실감하다·21/조그만 호두나무 상자·22/참새들·24/저녁을 위하여·26/하산·28 박수빈 그 회의록·30/스프링·31/원고지·32/들꽃 요양원·34/쌀이 물 먹는 소리·35/스마트 팜·36/플라스틱 섬·37/숨·38/블랙 미러·39/검은 사람들이 내려온다·40 진영대 썰물·42/놓지 마·43/줄·44/금가락지·45/복장(腹藏)·46/봄, 윤회·48 빈집·49/귀천·50/절개지(切開地)·51/술병처럼 서 있다·52 서주석 심우꽃·54/견적꽃·55/견우꽃·56/원형꽃·57/목우꽃·58 치유꽃·60/참나꽃·61/비움꽃·62/부활꽃·63/나비꽃·64 윤정구 한 뼘·66/세인트 히말라야·67/아버지의 아버지·68/산수유 화엄·70/너구동의 봄·71/사슴벌레·72/사과 속의 달빛 여우·74/일편단심(一片丹心)·76/유리시경(琉璃詩境)·78/복음·80 최영규 설산 아래에 서서·82/바람이 되어, 바람의 소리가 되어·84/야크·86/빙하·88/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89/크레바스·90/높이의 힘·92/심정(心旌)·94/너도 나비·96/눈사태·98 오석륜 강의실에 흐르는 강·100/아름다운 파업·101/사랑의 빨래·102/파도 소리·104/나비효과·105/사과꽃·106/아름다운 꽃밭·108/강가에서·109/낙동강·110/설중매 1·112 한이나 파릉의 취모검·114/붓꽃 춤·116/버들잎 관음도·117/심죽(心竹)·118/색경(色經)·119/먼지의 시간·120/나의 사막·122/환생의 방식·124/새들의 상처·126/만어사(萬魚寺) 종소리·128 고영섭 마음을 사는 일·130/전신투지가·131/매력을 얻는 일·132/사람을 만나는 일·133/시의 날을 기리는 노래·134/태산에 올라보니·136/상주행 완행열차·138/반가사유·140/이 순간에 살아야·141/놀라운 하루·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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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리가 물속에 두 다리를 담그고 멍청히 서 있다
냇물이 두 다리를 뎅강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왜가리가 빤히 두 눈을 물속에 꽂는다 냇물이 두 눈알을 몽창 빼가는 줄도 모르고 왜가리가 첨벙 냇물 속에 긴 부리를 박는다 냇물이 제 부리를 썩둑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두 다리가 잘리고 두 눈알이 빠지고 긴 부리가 잘린 왜가리가 퍼드득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떠오른다 아주 가볍게 떠올라 하늘 깊이 온몸을 던져 넣는다 냇물도 하늘로 퍼드득 솟구치다 다시 흘러간다 --- 「이나명, 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 중에서 벼랑 같은 아파트들 언제부터 이 칸을 위해 역병처럼 사는지 마스크를 쓰고 마신 숨을 다시 뱉는다 밤이 되면 불 꺼진 口에 눕는 생은 행간 밖 무릎을 꿇다가도 낙타처럼 일어서고 싶은데 태양 아래 끓어오르던 그 길은 어디로 가고 삭제된 口들로 채워지는 공백 포클레인 자국이 길을 만들면서부터 파헤친 흙만큼 산이 생기고 나의 쓸모는 모래가 바퀴에 들러붙는 듯했다 누군가 타워크레인을 옮겨놓자 레미콘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시멘트 채운 몸에 눈물을 버무리며 바람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며 거대한 공사판의 나는 먼지로 사라지고, 살아지고 --- 「박수빈, 원고지」 중에서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멩이 하나 박혀 있었다 드릴 것이 그것뿐이라 아무 소원도 적어놓지 못하였다 천년만년 가슴속에 묻어둘 것이 돌멩이 하나뿐이라 금동보석함에 담아서 드리기도 무엇해서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꾹꾹 눌러 끼워놓았다 그것이 무슨 보석이라고 돌멩이 위에 두툼하게 덧살을 붙여가고 있었다 --- 「진영대, 복장(腹藏)」 중에서 마음 안에 매미 있는가 호랑이 있는가 곽암과 만해가 물었던 길 길의 끝자락에서 내가 심우(尋牛)하려니 파란 눈의 융에게 길을 물어 페르조나를 해체한다 동시(東時)와 서공(西空)이 소통하며 하나로 돌아가는 길 심우꽃 만발하려는가. --- 「서주석, 심우꽃」 중에서 한 뼘 남짓 될까, 학의 다리로 만들었다는 하얀 뼈피리 간 봄 떨어진 동백꽃 울음으로 삼경 지나는 초승달 소리로 별 총총 새벽하늘 건너갈 때 가느다란 두 다리 가지런히 모아 펴고 겨울 바다 깊숙이 뛰어들더니 꿈결이었나, 올곧은 다리가 저어 간 은하의 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전생(前生)의 한 뼘 --- 「윤정구, 한 뼘」 중에서 발을 헛디뎌 몸이 넘어진다 산도 넘어진다 겨우 추슬러 마음 하나 도로 세우고 이제는 보이지 않는 너를 혼자서 본다 설사면에 튀긴 햇살이 칼끝처럼 몸속을 파고든다 냄새로 찾아가는 설산의 내막 바람은 울음으로나 길을 찾아 가는데 여러 번 꺾인 몸은 조각난 얼음 속으로 파묻히고 밟히면서 누구를 찾아 가는가 끝도 없는 고집 혼자 앞장 세워 겨우 모퉁이 돌 때 아, 저기 설산 아래 까맣게 떠오르는 사람 이름도 지워버린 채 울지도 못하면서 무릎만 젖어 흐르는 너는 오래 흔들리면서 무한정 기다리는 나는 --- 「최영규, 설산 아래에 서서」 중에서 새 학기 첫 번째 강의시간. 강의실 여기저기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긴장을 깨우며 출석부 속의 학생들 이름을 부르는데, 김슬기, 박슬기, 이슬기 등, 슬기, 라는 이름이 유난히 많아서, 이 강의실은 강이네요, 했다. 학생들이 의아해했다. 슬기, 라는 이름을 가진 세 명의 이름을 합하면, 다슬기니까 여기가 강이지요. 자네들만으로는 강이 안 되는데, 김바위, 라는 학생도 있어서 강이 되는 겁니다. 강은 서로 부둥켜안고 바다로 흘러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나도 강이 되어 함께 할 테니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해 강처럼 흘러 흘러 바다로 갑시다, 라고 부탁하자 강의실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는 강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 「오석륜, 강의실에 흐르는 강」 중에서 칼날 위에 머리카락을 올려놓고 입으로 불면 끊어지는 취모검, 칼 한 자루 생각한다 잡풀 무성한 마음까지도 쓰윽 슥 단칼에 벨 수 있는 이를테면 사람을, 세상을 살리는 활인검 쇳물이 되었다가 뜨겁게 열 가한 칼날이 도라지꽃으로 푸른빛을 띨 때 때려 펴고 갈아주길 무수히 반복하면 고통의 한 가운데 녹슬지 않는 금강의 시간들 언젠가의 생애에 내 한 번은 대장장이 곳집의 칼이었을지도 길이 1미터 넘는, 날카롭게 날이 선 칼의 잔혹한 말을 견디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바치는 또 다른 눈부심 기묘한 아름다움의 칼들 제 마음을 무수히 베이고서야 한 마음을 얻는 칼자국들 속이 하얗게 빛나는 잘 벼린 칼의 날을 맨손으로 짚고 고요히 목숨을 건너는 하루, 나는 나를 잊는다 --- 「한이나, 파릉의 취모검」 중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반한다는 것은 헬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셀 수 없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내 마음에 깊게 파고든 정말로 나를 뒤흔든 말 한 마디 어느 순간 내 가슴에 넓게 배어든 진실로 나를 이끌었던 몸짓 하나 아아, 나를 뒤흔들었던 한 마디 말 무연한 너를 끌어당긴 하나의 몸짓. --- 「고영섭, 마음을 사는 일―화두 1」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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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천지〉 동인은 “시의 천지와 시의 지천을 만들자”는 뜻을 함께 해온 시인 결사체이다. 1994년에 ‘하늘과 땅이 어우러진 시’, ‘좋은 시가 천지인 세상’을 모색하면서 서울의 문화거리인 대학로에서 결성하였다. ‘시의 천지화’, ‘좋은 시의 지천화’를 꿈꾸며 우리는 1995년 『상처의 곳간: 천지 안에서의 건강을 꿈꾸며』라는 첫 동인지를 펴냈다. 문학의 공정한 교류와 유통에 뜻을 같이한 동인들은 이후 여덟 권의 동인지를 펴냈다. 이들이 바로 2022년에 『달을 먹은 고양이가 담을 넘은 고양이에게』라는 아홉 번째 동인지를 펴내는 ‘그 사람들’이다. 제1집 간행 당시에는 8명의 동인이었지만 지금은 11명의 동인이 참여하고 있다.
제8집의 해설에서 우대식 시인이 ‘멀고 먼 서정의 끄트머리’라고 제목을 붙인 것처럼 제9집에서도 서정의 실타래는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이나명 시인의 「한없는 자리」 외 9편, 박수빈 시인의 「그 회의록」 외 9편, 진영대 시인의 「썰물」 외 9편, 서주석 시인의 「심우꽃」 외 9편, 윤정구 시인의 「한 뼘」 외 9편, 최영규 시인의 「설산 아래에 서서」 외 9편, 오석륜 시인의 「강의실에 흐르는 강」 외 9편, 한이나 시인의 「파릉의 취모검」 외 9편, 고영섭 시인의 「마음을 사는 일」 외 9편을 모아 90편을 담았다. 김성오, 김영교 동인은 부득이 함께하지 못했다. 이번 수록작들 대부분은 갓 길어 올린 ‘날것의 작품’ 또는 여러 문학지에 실린 작품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천지〉 동인의 아홉 번째 여정이라는 흐름에는 모두 닿아 있다. 사반세기를 넘어 30년을 향해 가는 동안 동인들은 서로의 들숨과 날숨을 들을 수 있는 귀 명창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동인지는 〈시천지〉 동인의 시적 완성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들의 관록과 저력이 보여주는 것처럼 동인들의 숙성된 작품들은 상승의 관계를 열어가고 있다. 시인들이 꿈꾸는 세계는 향상(向上)의 세계로 이어지고 작품들이 도약하는 방향도 상향(上向)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시여! 훨훨 날아라! 시인이여!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서 더 크게 펼쳐라! 그리하여 시의 천지를 우주에 드리워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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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천지〉 동인지 제9집 『달을 먹은 고양이가 담을 넘은 고양이에게』에 수록된 작품들은 갓 길어 올린 ‘날것의 작품’ 또는 여러 문학지에 실린 작품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천지〉 동인의 아홉 번째 여정이라는 흐름에는 모두 닿아 있다. 사반세기를 넘어 30년을 향해 가는 동안 동인들은 서로의 들숨과 날숨을 들을 수 있는 귀 명창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동인지는 〈시천지〉 동인의 시적 완성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들의 관록과 저력이 보여주는 것처럼 동인들의 숙성된 작품들은 상승의 관계를 열어가고 있다. 시인들이 꿈꾸는 세계는 향상(向上)의 세계로 이어지고 작품들이 도약하는 방향도 상향(上向)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 고영섭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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