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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5
작가의 말 9 내 아버지의 꿈 15 옆집 남자 55 영자가 시로 장원하던 날 69 내 기억 속의 영어 선생님과 나는 105 황금찬 선생님과 나의 인연설 137 요강이 깨지던 여름날의 추억들은 153 저어, 점 좀 봐 주세요 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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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에 업혀오면서 아버지와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그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아마 아버지께서도 낯선 동네에서 생전 처음으로 적응을 해야만 하셨고, 그보다도 더 무서운 일은 한 번도 생각도 못 해 보셨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탄광의 갱부 일을 하셔야만 하는 일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진 곱상하게 생기신 분이셨다. 아마 공부를 많이 하셨더라면, 학교 선생님이나 공무원이 적성에 맞으실 딱 그런 분이셨다. 분수골에 식구들이 이사를 왔을 땐 아버지의 수영 형님 집에서 처음엔 지냈다.나는 며칠 뒤에 학교에 전학을 한 학생이 되었다. --- 「내 아버지의 꿈」 중에서 “엄마, 오늘 웃음 보따리 풀어 놨나 봐요.” 그래. 웃음보따리를 풀어 놨나 보다. ‘딸아이는 엄마의 웃음의 의미를 얼마나 이해를 할까?’ 생각을 해보았다. 그날 이후로 그 옆집 남자는 나를 보면 깍듯이 인사를 하곤 했다. “아줌마, 안녕하세요?”라고…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0년 정도 살고 나니 이런 일도 겪는구나. --- 「옆집 남자」 중에서 몸이 아프기 전, 나는 세상살이를 단 한 번도 지루하다고 느끼며 살진 않았다. 그 어떤 험악한, 바쁜 상황이 생겼어도 말이다. 하지만 이젠 경제적 능력도 잃었고, 몸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삶이 다 할 때까지 그 지루한 삶을 적응하고 싶지 않아도 적응해가며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김태훈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지금 이 상황이 인간 노릇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바로 그 상황일 것이라고…’ 요양병원에서 퇴원한 지 2개월 반이나 되었건만… 그런 몸으로 서대문에서 양화진 가는 거리는 너무도 머나먼 길 같아 보여졌다. 건강할 때도 거리는 가깝지만 다녀오기는 그리 만만한 거라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난 1년에 꼭 한 번씩은 그곳에 다녀왔다. 거기에서 해마다 하는 마포신문사 백일장에 참석해서 글을 쓰고 왔기 때문이었다. --- 「영자가 시로 장원하던 날」 중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땐, 엄마의 처녀 시절 꿈이 보이는가 하면, 지금 처해 진 환경을 한탄하며 부른 노래만 같았다. 노래 속에 담긴 ‘정경부인’이란 뜻을 잘 모르기도 했지만, 엄마에게는 한 번도 묻지 못했다. 그냥 평범한 인물보다는 약간 부자이고 권세가 있는 사람의 부인 정도로만 느꼈을 뿐이다. 엄만 언제 누구에게서 어떻게 그 노래를 만나서 알게 되었을까?\ --- 「요강이 깨지던 여름날의 추억들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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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유영자의 내력과 문학적 상황들 제1고향 충북. 제2의 마음의 고향 강원도의 정동진에 서 국민학교만 졸업을 하고 중·고등학교 과정 올 코스 검정고시 합격. 지금 현재는 독학사 국어국문학과 3단계 중임. 제9회 전국 성경고사대회(초, 중, 고, 장년부 전체 특등), 송강 정철 400주년 추모백일장 수상(수필 「땀」), 제18회 마로니에 전국백일장 수상(「낙엽」), 제25회 마포신문사 백일장 시 부문 장원(「대추」). 그래서 저도 저의 저를 사랑하시는 독자분들도 저에게 기꺼이 대추의 시인이라고들 하지요. 저의 문학의 기초 배경은 고난과의 동반인 셈이지요. 그 고난을 이기려고 저는 성경 말씀을 청년 시절부터 죽기 살기로 읽으면서 지금까지 왔네요. 그리고 38세 이후 부터 글을 쓰는 백일장과 공모전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글을 쓰기 위해 시간을 보냈지요. 때론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서, 어린 딸은 걸려서 길에서든, 버스 속에서든 글이면 글, 목소리 표현이면 목소리 표현, 공예품이면 공예품 공모전을 약 20년 이상 전업 작가 이상으로 표현하며 여러 가지 삶의 열매들을 차곡차곡 매달며 살아왔네요. 그 끝자락에 아직도 못다한 표현들 하며 살고 있는 중인데요. 전 태생이 어디서나 타고난 이야기꾼인가 봅니다. 저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들려주고 남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듣기도 엄청 좋아하는 조선 시대의 직업이 이야기꾼이었던 전기수(傳奇?)처럼 말이지요. 이제 문학의 4장르만 남았네요(번역문학, 평론, 희곡, 동 시조나 민시조). 이것도 제가 살아 있는 한 이루어 낼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랑 영자네 삶은 어디까지?’란 제목으로 저의 다양한 삶을 아마 시리즈로 단편 소설을 계속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론 웃기도 하시겠고, 울기도 하시겠지요. 제가 겪은 수많은 상황 속에서 가끔씩 저의 삶에 도전도 받을 것이고 위로도 받을 것입니다. 전 그것이면 됩니다. 그런 작가이고 싶네요. 좋은 정보를 발 빠르게 제공 해주신 이은집 소설가님, 저를 위해 기도 많이 해주신 새문안 가족들(집사님, 권사님들, 직장인 여 선교회), 화가이자 동화작가, 시인이신 착하고 맘씨 고운… 그렇지만 가끔은 도드라지게 바른말 잘하는 정경미 작가님, 늘 바른길로 안내하시고 많은 정보를 친절히 안내하시는 ‘시문회’ 선배 동화작가이신 김남희 선생님, 늘 기도로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는 경남 창녕의 김후남 목사님, 그 외 저를 사랑하는 독자분들께 모두 모두 감사드립니다. 특히 돌 지난 자신의 딸을 기르면서도 엄마의 컴퓨터 작업을 도와주는 저의 딸에게도 고맙다는 말 표현하고 싶네요. 특별히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 수고하시는 청어출판사의 이영철 대표님, 임직원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예술인 복지재단’ 관계자분께도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창작 작품은 많아도 출판비가 없어서 정작 책을 내고 싶어도 내지 못하는 작가들의 앞길을 환히 비춰 주시는 등대 역할을 확실히 해주신 예술인 복지재단, 그 은혜 잊지 않고 저는 남은 생을 문학 창작 활동에 저의 몸과 영혼을 불태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