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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의 기도
문갑연
청어 202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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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작가의 말

수혈
길 위에서 길을 묻다
계단 위의 무덤
사필귀정
자화상
골격
적응
울타리
이식
뒤안길
해바라기의 기도
그루터기

저자 소개 1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원 장편소설 『꿈이 묶여있는 땅』, 『비자금』, 『메아리의 고백』, 소설집 『거울 없이 사는 사람들』, 『추도식의 가족들』, 『꿈꾸는 사람들』, 『해바라기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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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7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474g | 152*225*20mm
ISBN13
9791168550469

책 속으로

어릴 때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시골에서 살았다. 다행히 그 좁은 시골에도 초등학교가 있어서 한글을 익힐 수 있었다. 사내아이들은 일을 시키느라 특히 여자아이들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며 초등학교도 보내지 않은 부모들이 많았다. 어머니는 가끔씩 중학교가 있는 면 소재지 오일장에 다녀오시곤 했다. 그곳에 가려면 높은 산을 넘어서 4㎞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가야 한다. 어머니는 장에 다녀오시면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맛난 과자나 고기를 사 오셨다. 와! 높은 저 산 너머는 어떤 사람들이 살기에 이런 귀한 것들도 있을까. 하지만 그 낯선 곳을 생각하면 무서워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토록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던 산골 소녀가 다행히 그 무서운 곳인 면 소재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또 다른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거기서는 시외버스가 시내까지 사람을 태우고 운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는 오빠들이 있는 시내가 궁금하기 시작했다.

지난해인 2021년 봄, 여름 동안에 코로나19의 창궐로 지구촌이 전시나 다름없었던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미국 자녀들 가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까마득히 멀면서도 넓은 대륙 그 어딘가에 있을 그리움을 향해 미지의 세계를 뒤지다가, 드디어 그 많은 여러 민족 중에서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은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했을 때의 감격이야말로 세상에서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이 불가능했으리라.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했지만 그중에 가장 걸작품은 가정이라는 생각이 더 확실해 졌다. 그리고 이 가정을 지탱해 가는데 필요한 저력은 가족애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펜데믹 시대라 국내외적으로 위험 수위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뿐 아니라 백신도 아직 나오지 않을 때지만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내 핏줄을 본다는 일념 말고는 다른 그 무엇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활을 걸어야 할 정도의 여행 결심인데도,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까지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때는 어떤 장해물도 앞길을 막을 구실이 될 수 없었다. 단지 간절함 때문에 동작이 진행되었고, 앞뒤를 볼 엄두는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막상 그들의 생활현장을 목격하자 마음의 평정이 찾아왔다. 자녀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그런 위험도 감수한 채 어미를 적극적으로 환영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가족애의 힘이었으리라.

한인교회를 통해 이방 세상에서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내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다. 넓은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 여러 지역을 활보하면서 느끼고 본 건 본토인이나 여러 소수민족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사랑해야 할 대상이 비록 내 가족과 내 국토가 아닌 전 인류와 지구촌이라는 사실에 직면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와 상관있는 이웃이며 가족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기회였다. 어렵게 갈증을 해결한 후의 내 삶은 더 풍성해졌다.

항상 두려움 속에서 한 발짝 내딛어 새로운 경험이 이룬 결과는 소설 창작에 더 매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또 한 번의 문화예술진흥원으로부터 출간비까지 지원받는 행운도 얻었다.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는 내 삶을 유지하고 또 풍요롭게 하는 이상이며 믿음이요,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랑이 많으면 관심이 많다던 어느 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작은 관심은 기적을 창조한다고 했던가. 타인을 향한 관심이 현존하는 한 내 삶은 여전히 풍성할 것이며 내 가족과 이웃, 그리고 그들의 이웃, 전 인류와 지구촌을 향한 헌신과 사랑의 언어가 고갈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지구촌을 무대로 번성하라는 창조의 원리에 따라 좀 더 더불어 살아가며, 모든 인류의 평화를 소원하는 마음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과 격려가 나의 글로 통해 점점 더 영글어 가기를 꿈꾸어 본다.
---「작가의 말」중에서

장마 중이라 대지는 더 풋풋했다. 추적추적 이어지던 장마가 소강상태라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로 향하던 복자가 몰던 승용차는 그 옛날 어린 시절을 가족과 함께 살았던 등촌 마을로 진입했다. 4대강 사업으로 사라져버린 마을, 휑하니 빈 마을 일대가 을씨년스럽다. 복자의 기억에는 마을을 중심으로 강 유역 일대가 사시사철 먹거리로 풍성했다. 이미 가을부터 보리와 밀을 파종한 덕에 강 유역도 들판 못잖게 겨울에도 온통 파랬다. 파종한 종자가 발아하여 유묘기에서 성장기를 지날 때 즈음이면 서릿발로 인해 착근이 어려워 생산량이 줄어들 우려로, 대부분 착근을 도와주기 위해 보리밟기를 해 준다. 자칫 농한기에 하릴없이 마을 사랑방에 모여서 화투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사례들을 유발하는 시기라, 보리밟기는 매우 생산적인 활동이다. 농부들의 옴츠렸던 근육을 풀어줄 겸 봄에 거둬드릴 농사를 더 풍성하게 해 주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복자가 과거와 현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화려했던 복자네의 옛 집터를 지키던 울창한 거목 플라타너스 세 그루가 옛 주인의 방문을 반겨 주는 듯, 마침 지나가던 바람결에 우수수 빗방울을 털어내고 있었다. 둑 높이만큼 흙을 쌓아 올려 평지로 만든 집터 때문에 연례행사처럼 치르던 홍수의 범람에서도 안전했던 그때의 위세당당 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복자는 거목으로 자란 플라타너스를 차례로 둘러보다가 제일 안쪽 나무에 도달하자 짐작되는 곳의 우거진 잡초를 헤치기 시작했다.

4대강 사업장으로 전 마을이 다 수용되었지만 유일하게 둑 높이와 동일했던 복자네 집터만은 그 대상지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오빠까지 없는 외딴곳에서 올케 혼자 살 수 없다며 자투리땅을 수용하라며 건의한 결과에 따라 나온 보상비로 면 소재지에 아파트를 샀다. 올케가 아파트로 이사 갈 때 가족들의 의견일치로 나무 아래 일부러 아궁이를 만들어 걸어두기로 했던, 낡은 가마솥의 근황이 가끔은 궁금했었다. 잡초가 덮고 있어서 얼른 보아서는 솥이 걸려있는지 잘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곧 그 옛날 화려했던 가문의 역사를 간직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 녹이 잔뜩 쓴 가마솥이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복자가 세상에 태어나 기억하는 날부터 줄곧 사랑방 부엌에서 쇠죽을 끓였고, 김장철이면 따뜻한 물을 끓여서 언 손을 녹여주기도 했다. 거기다가 일 년에 한 번씩 장을 담그는 날이면 메주콩을 삶거나 명절이 돌아오면 가족들의 목욕물을 데워주었던 귀한 가마솥이다. 복자의 시선이 그 가마솥에 닿는 순간 생각지도 않았던 그 날의 일이 되살아 날줄이야. 아버지를 잃었던 그날의 아픈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고요함, 왜 이렇게 허전하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만 마을 친구들과 어울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왁자지껄했다. 특별히 긴 장마의 끝에 홍수까지 범람한 이유로 학교 수업을 일찍 끝내주었다. 복자와 양숙 그리고 철수는 차만 마을 친구들과 하굣길에 함께 어울려 산으로 올라가 산딸기 따 먹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차만 마을 친구들 네 명을 제각기 차례차례 자기 집으로 배웅을 한 복자와 양숙 그리고 철수는 아직 한참을 더 가야 하는 등촌 마을로 향했다.

복자는 비로소 줄곧 이어지던 흥이 식어졌다는 사실에 아직 적응하지 못해 서먹했다. 철수는 같은 또래의 남자친구와 헤어지자 같은 마을에 살지만 복자와 양숙과 어울리기가 멋쩍은지 잰걸음으로 벌써 한참을 앞서가고 있었다. 복자와 양숙도 무작정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와중에도 철수와의 거리가 더는 멀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걸음을 부지런히 옮기던 복자는 저만치 눈 앞에 펼쳐진 등촌 마을의 동태가 궁금했다. 상상 외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운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홍수의 범람으로 마을 사람들이 짐을 옮길 경우라면 자신의 집만이 아니라 둑 전체일 것인데, 왤까?

복자는 즉시 잰걸음으로 둑 아래로 쪼르르 내려가 홍수의 정도를 살폈다. 등교 때만 해도 계속해서 성큼성큼 홍수가 둑을 향해 올라오는 속도가 보일 정도였다. 지금은 얼른 보아 홍수가 5㎝는 충분히 더 줄어들었다. 하늘을 봐도 구름 한 점 없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짐을 옮길 필요도 없지만, 만약 짐을 옮길 경우라 해도 마을 사람들이 둑 아랫마을로 내려갔다가 올라오기를 계속할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홍수 때문이라면 짐을 나르느라 모여 있지 못할 건데? 왜 하필 복자 너희 집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지?” “안 그래도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어.” 복자는 양숙이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거기다가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굿하는 소리가 선명해 지면서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친구들과 정신없이 노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는 죄책감이 들면서 자책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집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복자, 니, 와 이렇케 늦게 오냐! 니 아부지가… 아이다. 어서 가봐라!” 마침 마주 보고 오던 마을 입구에 사는 아주머니가 복자를 보고 질책을 하다 말고 둑 아래 자기 집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복자는 아주머니의 언행으로 보아 아버지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게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복자는 얼른 오늘 등교 전에 아버지가 손수 연필까지 깎아주던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떠올리며 불길함을 지우려 도리질을 했다. 그럼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마을 아주머니의 말을 되씹으면서 생길만한 사건에 대해 아는 대로 떠올려 보았지만 짐작되는 게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미루어 봐도 홍수의 범람보다 아버지에게 닥친 재앙이 훨씬 더 크다는 건 확실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동민들이 한 집에 다 모여 있겠는가. 거기다가 굿을 할 정도면 보통 심각한 사태가 아닐 것이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굿을 하려면 어머니가 날짜를 잡고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한 연후에 그것도 낮일을 다 마치고 난 저녁에 하는 게 관례였다. 이런 관례를 무시한 채 굿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위급사항을 알리는 신호가 틀림없었다.

---「수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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