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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는 멀고 마음은 가까워도
“ 내가 생각하는 당신은 언제 어디서 오는가 감나무 이파리 한들댈 때 오는가 산과 산 사이 샛길로 오는가 ” 풍경소리 바람이 다가오는 소리 들으려고 처마 끝에 풍경을 매답니다 당신이 다가오는 소리 들으려고 마음 끝에 풍경을 매답니다 소리가 들리면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내심 기대하며 귀를 모읍니다 처마는 멀고 마음은 가까워도 소리는 매번 멀리서 납니다 아직은 뭐라 말 못 하겠습니다 두근대는 일 없이 잔잔한 게 좋은지 풍경이 왼쪽으로 돌면 왼쪽으로 두근대고 오른쪽으로 돌면 오른쪽으로 두근대는 게 좋은지 가끔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귀를 모읍니다 소리가 들리면 들려서 두근대고 들리지 않으면 들리지 않아서 두근댑니다 처마는 멀고 마음은 가까워도 소리는 매번 멀리서 납니다 마루에 앉아 마당을 보고 마당 너머를 본다. 산골의 마당은 어디나 비슷해서 그다지 크지도 않은 나무와 풀꽃이 터줏대감 노릇을 한다. 마당 너머는 아랫집 붉은 지붕과 저수지 잔잔한 물결, 그리고 야트막한 산이다. 산은 야트막해도 첩첩을 이뤄 제법 운치가 난다. 첩첩을 이룬 산 사이는 샛길. 구불구불하면서 둥글둥글한 샛길이 산과 산 사이 고개를 넘어 내가 사는 산골마을로 이어진다. 고개 너머는 남쪽 바다. 고성 바다가 저 너머 있고 통영 바다가 저 너머 있다. 집이 남향이라서 남풍은 저 고개 지나 샛길을 따라 내게로 온다. 남풍이 불면 처마 끝에 매단 풍경이 가장 반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동작과 소리를 동시에 내보이며 속을 다 드러낸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저럴까. 한편으론 안쓰럽고 한편으론 부럽다. 나는 저런 사랑이 있었던가. 저리 속을 다 드러내던 사랑이 있었던가. 지금은 바람 잠잠한 한낮. 풋감을 매단 마당 감나무 이파리는 제 무게가 겨워 한들댄다. 기다랗게 자란 덩굴장미 끝자락 역시 제 무게가 겹다. 몸의 무게만 무게가 아닐 것이다. 저들인들 마음의 무게가 없을 것인가. 바람 잠잠한 날에도 한들대는 마음들. 두근대는 마음들. 두근대는 마음은 바람 잠잠한 날에도 소리를 낸다. 마음 끝에 촉수 예민한 풍경을 매달고 반응한다. 당신이 어디에서 오든, 그리고 아무리 멀리서 오든 마음 끝 풍경은 당신을 감지한다. 당신이 오른쪽에서 오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두근대고 왼쪽에서 오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두근댄다. 내가 생각하는 당신은 어디서 오는가. 언제 오는가. 첩첩을 이룬 산과 산 사이 샛길로 오는가, 감나무 이파리가 제 무게 겨워 한들댈 때 오는가. 지금보다 초록이 더 진해져서야 샛길을 지나 나뭇잎 사이로 마침내 당신은 오는가. 처마는 멀고 마음은 가까워도 소리는 매번 멀리서 난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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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부산 토박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다. 군 복무도 부산에서 하고 학교 졸업 후 첫 직장도 부산에서 다녔다. 그러다 삼십 대 초반이던 1992년 도시 생활을 접고 생면부지 산골로 들어갔다. 경남 고성군 대가면 갈천리 어실마을. 생면부지 산골인 거기에서 저자는 2022년 올해 만 삼십 년을 맞는다. 방문을 열면 산 그림자를 품은 호수가 보이는 산골에서 산 그림자 같은 시, 호수 같은 산문을 쓴 세월이 하루하루, 한달 한달, 한해 한해 첩첩이 쌓여 삼십 년에 이른다.
『어렴풋, 당신』은 산 그림자 시와 호수 산문을 모은 시·산문집이다. ‘풍경소리’에서 ‘당신’까지 모두 71편의 시와 71편의 산문이 때로는 산 그림자처럼 깊숙하고 때로는 호수처럼 일렁인다. 『어렴풋, 당신』에 빠져들면 당신 역시 깊숙해지고 일렁이리라. 산골 30년 시·산문집 『어렴풋, 당신』은 남다르다. 시와 산문의 결합은 흔히 보는 바지만 『어렴풋, 당신』의 시와 산문은 ‘한 편’이면서 ‘한편’이 아니다. 시는 산문에 스며들고 산문은 시에 스며들면서도 시는 시의 중심을 잡고 산문은 산문의 중심을 잡는다. 삼십 년 산골의 내공을 보는 듯하다. 두근대는 마음은 바람 잠잠한 날에도 소리를 낸다. 마음 끝에 촉수 예민한 풍경을 매달고 반응한다. 당신이 어디에서 오든, 그리고 아무리 멀리서 오든 마음 끝 풍경은 당신을 감지한다. 당신이 오른쪽에서 오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두근대고 왼쪽에서 오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두근댄다. - ‘풍경소리/ 처마는 멀고 마음은 가까워도’ 중에서 한쪽 돌담이 낮아 보입니다 돌을 쌓아올립니다 이번에는 다른 쪽 돌담이 낮아 보입니다 낮아 보이는 돌담을 다시 쌓아올립니다 맞춘다고 맞춰도 어느 한쪽은 아무래도 낮아 보입니다 가만둬도 될 걸 일머리 없이 건드려 몸이 고생입니다 담만 높아집니다 - ‘돌담/ 소중한 건 돌담 아니라 돌담 너머 당신’ 중에서 산골 시·산문집 『어렴풋, 당신』은 짧고 가벼워서 좋다. 문장이 짧고 주제는 가볍다. 그래서 쉽게 읽히고 술술 넘어간다. 귀촌이 로망인 도시 사람의 감성을 슬쩍슬쩍 건드리며 마음 깊숙한 곳 어렴풋한 당신에 대한 기억을 슬쩍슬쩍 건드리며 읽었던 페이지를 다시 보게 하고 접었던 책장을 다시 펴게 한다. 마음 깊숙한 곳 어렴풋한 당신. 당신은 어감부터 따뜻하고 포근하다. 당신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직이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진다.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 우리에게 당신은 그 자체로 위안이며 하루하루를 다독이는 믿음이다.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은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둘 다 맞으면서 둘 다 아니다. 당신은 우연이면서 필연이고 필연이면서 우연이다. 방문을 열면 보이는 산골의 새벽 저수지 물안개. 안개가 우연인 듯 보여도 우연이 아니듯 마음의 문을 열면 보이는 당신 역시 우연인 듯 보여도 우연이 아니다. - ‘당신/ 온전한 당신’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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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은 언제나 잠시고 걸어갈 길은 언제나 아득하다.’
‘이 꽃을 보면 이 꽃에 다가가고 저 꽃을 보면 저 꽃에 다가간다. 다가가고 또 다가가느라 산골은 하루가 다 간다.’ 읽는 즉시 그대로 외우고 싶은 구절들이 갈피마다 살아 있는 동길산 시인의 산골 이야기는 그대로 한 편의 서정적인 시이고 일상생활을 전하는 일기이며 자신의 철학을 담고 있는 단상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산골 이야기가 더 정겨운 것은 인생의 사계절과 구체적으로 맞닿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연재해 온 나무 이야기, 등대 이야기, 포구 이야기를 감탄하며 읽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면사무소 가는 길’과 같은 시인의 산골 이야기를 더 많은 이들이 읽고 마음속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그윽한 사색의 정자 하나 만들면 좋겠습니다. 『어렴풋, 당신』처럼 정겹고 아름다운 벗으로 초대되어서! - 이해인 (수녀,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