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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009에필로그 365에필로그의 에필로그 440발문 | 정지돈(소설가)발로 쓴 소설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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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나뉘며 끝없이 흐르는 물처럼무한히 이어지며 계속해서 옆으로 새는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이러한 서문에도 불구하고 『프롤로그 에필로그』를 읽는 우리는 자꾸만 의미 찾기, 나아가 서사 찾기의 길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 “동시대의 거의 모든 나라의 거의 모든 소설가들과 사람들이 서사가 있는 소설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271쪽)기 때문일 것이다.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를 하나의 분명한 선으로 이어 플롯을 찾아내려 하는 것. 이러한 관습적인 독해 방식 탓에 우리는 작품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미스터리 앞에서 더더욱 서사 찾기에 몰두하게 된다. 그 내용은 이렇다. 미국인 친구와 함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온 소설가 ‘나’는 권태로운 나날을 이어가던 중 해변으로 떠밀려온 발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다. 이야기인즉 2007년부터 지금까지 브리티시컬럼비아의 태평양 연안에서 주인 없는 발 열네 쌍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매혹된 ‘나’는 추가로 떠밀려올 수도 있는 발을 찾으러 다니는 동시에 이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처럼 흥미로운 소재를 꺼내놓고도 정영문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그 이야기가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이 소설은 사람의 발을 찾는 것에 관한 소설은 아니었다.(43~44쪽)이는 정영문에게 있어 소설쓰기란 “생각 속에서나마 약간의 정신적 자유를 수행하는 것” 또는 “말과 생각을 갖고 노는 일종의 놀이”(357쪽)일 따름이며, 서사와 플롯은 이러한 정신적 자유와 놀이를 방해하는 요소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적 소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서사와 의미에 열중하는 대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옆으로 새는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놓는다. 해변을 거닐며 물가로 떠밀려온 발에 관한 미스터리를 파헤치려는가 싶다가도 돌연 수달과 딱따구리의 생태에 관해 이야기하고, 아브라함이 얽혀 있는 젤라토의 기원과 노스트라다무스가 만든 잼에 관한 야사(野史), 아이스크림들의 무덤과 티라미수의 진화, 호박 숭배 등의 기상천외한 이야깃거리를 거쳐 실비아 플라스와 알바레즈, 마크 로스코와 구사마 야요이, 장국영의 작품과 생애에 관해 진술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험과 지식과 상상 사이를 오가며 어디에서 어떻게 끝맺을지 알 수 없게 나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정영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삶에는 핵심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닐까.삶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소설에는 삶에 없는 핵심 또한 없는 것이 당연하며, 어떻게든 핵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서사가 있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지, 소설 속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소설에 얼마나 없어도 되는지 (…) 등을 생각했다.(268~269쪽)그러므로 『프롤로그 에필로그』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에는 무언가 의미를 지닌, 서사를 가진, 즉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핵심적인’ 본문이 들어갈 틈이 없다. 전체 460쪽인 책의 364쪽까지 이어지는 프롤로그를 마치며 정영문은 말한다. “이런 글은 소설뿐만 아니라 뭔가의 본문으로는 적합하지 않고, 그렇다고 뭔가의 프롤로그나 에필로그로도 적합하지도 않다고 생각했지만 프롤로그로나 에필로그로는 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었고, 뒤에 에필로그가 있어 여기까지의 글은 프롤로그가 되었”(363쪽)다고.이제 “무엇보다도 물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물에 떠 있거나 떠다니거나 떠내려가는 것들이 많이 등장하”(41쪽)는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간명하다. 삶에 없는 핵심과 의미를 소설 속에서 찾아내려는 시도를 멈추고, 수없이 나뉘며 끝없이 흐르는 이 이야기에 그저 몸을 내맡기는 것. “물에 떠 누워 있는 것만큼 재미있고 기분좋은 일도 없다는 것을 달리 말할 방법이 없어 계속해서 물에 떠 누워 있는”(21쪽) 수달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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