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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에 앞서
메아리 유둣날 덫 밤 굿 해후 이방인 외갓집 맴생이 동심 가을걷이 도깨비 월동 설 밭매기 무지 상전벽해 술 익는 집 황아장수 예배당 양상군자 칡 캐는 아이들 서당 여선생 새내기 복수 원술랑 자전거 쌈줄 관심 벌 사냥 소풍 혁명 부적 산토닌 상처 뿌리 기러기 울어 분녀 가출 이장과 면서기 는들바위 띠줄 귀향 기차를 타다 열매는 밤에도 익는다 봄처녀 시집가고 시작의 치욕 마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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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은 유년의 서정
황혼에 비치는 아이의 모습이 아름답다 아이는 한국 전쟁기에 산간 마을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짓는 부모 밑에서 흙을 만지고 자연의 숨결을 들으며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보며 자란다. 이념의 볼모로 감옥에 갇힌 아버지, 손발이 닳도록 고난에 휘둘리는 어머니의 노동에 가슴이 저린다. 미군이라는 이방인을 만나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그린다. 아버지의 시조 소리, 농부들의 타령, 자연의 음률에 말문을 틔우고 감성과 분별을 키운다. 큰집, 작은집, 외갓집을 오가며 가족이라는 울타리와 정체성에 눈을 뜨며, 형제와 이웃과 동네라는 공동체 안에서 우정과 사람의 도리, 생활의 방편을 두루 배운다. 계절의 풍취와 빛깔을 구분하기 시작하며 마을의 옛 이야기를 들어 익힌다. 아이들과 놀이를 통해 기쁨을 알아 가고, 집단의 질서와 규범, 화합의 방식과 도전의 정신을 배운다. 도깨비를 만나고 보이지 않는 귀신을 믿으며 두려움과 공포의 면역을 기른다. 물것에 물리고, 넘어져 다치고, 나무에 오르다 떨어지며 상처투성이에 걸음걸이는 위태하다. 염소와 벗을 삼고, 벌레와 날짐승, 길짐승과 이야기를 나눈다. 들녘에선 언제나 농부들의 한숨이 들린다. 절구질로 새벽을 열고, 길쌈을 하고 누에를 치며 밤이 이슥도록 물레를 잣는 어머니와 가족이라는 보금자리를 보듬는 아버지의 고난을 본다. 가난한 마을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와 자연에 순응하는 법과 바른 덕목을 익히며 코흘리개 티를 벗는다. 황아장수와 도붓꾼들은 새로운 문명과 셈법을 묻혀 오는 철새들이다. 라디오, 재봉틀, 나일론 옷감, 예배당, 가설 극장, 거간꾼과 춤바람, 통속 소설 같은 신문화가 급속히 밀려든다. 문맹 퇴치와 남녀 평등의 시대를 맞는다. 사회는 기형적으로 급변한다. 국민학생이 된 아이는 나이 많은 친구들의 놀림감이 된다. 학교에는 배고픈 아이들과 몸이 안 좋은 아이들이 많다. 가난 속에 돋아난 마음의 상처도 본다. 전학 온 여학생에게 연정을 느끼고 애틋한 이별의 슬픔도 겪는다. 동생들은 층층 태어나고, 형이 가출하고 누나가 중병에 시달리고, 겹치는 흉년에 집안은 잠잠할 날이 없다. 서울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아이는 넓은 세상을 향한 의지를 다진다. 형이 돌아오고 누나가 시집을 간다. 아이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앞날의 인생길을 듣는다. 새로움의 갈망보다 지나간 장소, 묵은 것들이 소중히 여겨지는 까닭은 세월이 빨라진 탓이리라. 시간의 속도에 올라타 질주하는 각다분한 삶에서, 유리알처럼 빛나는 유년의 그리움은 싫증나는 법이 없다. 참담한 시기를 겪는다 해도, 인생이 구부러졌다 해도 말문이 열리던 유년을 돌아보면 자신이 그리 사랑스러울 수 없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마음이 맑아진다. 홀보들한 살결과 여린 힘살, 무럭무럭 자라는 생각의 세포, 세상을 알아 가는 기쁨의 노래, 내 것을 모르는 해맑은 마음. 설렁설렁 걸으며 싱긋빙긋 뛰놀던, 솜털이 보스스한 귀여운 시절의 애잇머리 이야기다. 아이는 생명의 존귀함, 됨됨이의 덕목, 인내의 가치를 본으로 여기는 공동체 안에서 풀잎을 만지며 흙에서 뛰놀았다. 강아지를 닮은 범 새끼처럼 세상을 무법천지로 알고 자랐다. 어지러운 문화와 오염된 언어가 춤추는 시대. 온통 성공과 출세를 인생 목표로 잡아 끄는 사회. 복잡한 인생을 더 복잡하게 다루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는 나어린 시절의 행복마저 잊고 지낸다. 우리의 삶의 바탕이 된 풋풋한 유년, 호롱불로 밤을 밝히던 시절의 빛바랜 병풍 속 정경이지만, 앞만 보고 달리느라 인생의 값어치를 깜빡 잊은 사람들에겐 마음의 시간을 되돌려 볼 정담이 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