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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가 왔다
태의 열매 악당에 관하여 헤드라이너 바크 비둘기, 공원의 비둘기 오토바이의 묘 굿바이 레인보우 해설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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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발랄 유머 속에 감춰둔 우리의 눈물과 땀
잃어버린 꿈을 찾아주는 가슴 뛰는 이야기 「볼셰비키가 왔다」는 오빠의 장례식에 나타난 수상한 무리를 보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킨헤드, 가죽자켓 등 도무지 장례식과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조문을 왔다기보다는 무대를 찾아온 듯”(9면)한 이들은 죽은 오빠의 밴드 멤버다. 어릴 때 집을 나가 연락이 끊긴 오빠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던 ‘나’는 이 기묘한 만남에서 오빠가 남기고 간 삶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발견해나간다. 이야기는 강렬한 구토로 끝나는데 이 구토 끝에 독자들은 삶의 허무함을 직시하는 가운데 묘한 청량감과 개운함을 느끼게 된다. 「태의 열매」는 부자 서사다. 아버지 캐릭터가 독특한데, 자동차 사고로 차가 박살 나도 멀쩡하고 술에 취해 바다에 빠져도 정신을 차려보면 집에서 태평히 잠들어 있을 만큼 생존에 특화되어 있다. 어느 날 아들은 술만 마시면 집안을 다 부수는 이 아버지와 ‘대작’을 시작한다. 아버지로 인해 숱하게 생사의 문턱을 넘나 든 아들과 자식 따위 안중에 없는 아버지, 둘 사이는 한번의 술자리로 가까워질 턱이 없다. 그때 아버지가 꺼낸 것은 자신이 숨겨놓았다고 ‘주장하는’ 특상품 대마초다. 마음 놓을 틈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가 끝내 이 둘을 어디로 데려다놓을지 짐작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표제작 「헤드라이너」는 이름난 록 페스티벌에 난입한 소년 밴드 ‘우드스톡’의 하룻밤 이야기다. 보컬 ‘로니’, 베이시스트 ‘빌리’, 기타리스트 ‘시드’, 드러머 ‘존’은 “애석하게도 모두 한국인”(94면)이다. 역할극을 즐기는 듯한 이 청소년들이 계획한 것은 페스티벌 헤드라이너의 무대에 난입한 다음 퍼포먼스를 벌이는 일이다. 리더 로니가 주도한 황당하고도 무모한 계획을 실행하려는 찰나, 로니는 한무리의 폭력배와 시비가 붙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된다. 뿔뿔이 흩어진 우드스톡 멤버들은 그날 밤 각자 인생을 변화시킬 만한 경험을 하는데, 이 엉뚱하고도 발랄한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작은 반란을 응원하게 하며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이상 작품들에서 임국영 특유의 활달한 필치와 코믹한 상황이 주를 이룬다면 ‘반전 매력’이 가득한 작품들도 있다. 「바크」는 소싯적에 그래미상까지 받았지만 이제 ‘원로’ 취급을 받는 톱스타 ‘오’와 ‘비’가 아주 외진 어느 바에서 만나 나누는 대화로 전개된다. 평소 앙숙이던 이들은 날이 바짝 서 있는 말을 쉬지 않고 농담을 섞어가며 나눈다. 일상적으로 흐르던 대화는 과거 어느 영광의 시절을 소환하고, 이들은 갑자기 같은 무대에 오른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상상하기 힘든 두 사람의 컬래버레이션은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적 화제가 되는데, 이후 펼쳐지는 미디어나 대중의 반응은 지금 언론의 세태를 반영하는 듯해 흥미롭다. 「비둘기, 공원의 비둘기」는 주인공인 ‘서’의 이야기와 그가 구상 중인 또 하나의 이야기가 액자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경계는 몹시 흐릿해 독자들은 어디서부터가 상상의 영역인지를 알기가 힘들다. 특별한 수입 없이 공원을 전전하는 ‘서’는 공원에서 주기적으로 돈을 줍는다. 마치 샘 솟듯이 돈이 솟아나는 공원을 둘러싸고 치밀한 먹이사슬이 생성되는데, ‘서’가 이 공원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하며 일대 혼란이 발생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경계가 모호한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어느새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체제를 돌이켜보게 된다. 「오토바이의 묘」에는 오토바이를 훔쳐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두 소년 현도와 도림이 등장하는 가운데, 초점화자는 이들에게 도난당해 축사로 끌려온 오토바이 ‘루피’다. 루피는 현도의 차지가 되고 도림은 현도가 원래 타고 다니던 ‘할배’라는 낡은 스쿠터를 물려받는다. 서로에게 조금씩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현도와 도림의 경쟁의식, 사랑받지 못해 외로운 할배의 루피를 향한 질투, 맹목적으로 달리는 게 싫어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 루피의 절규가 얽히고설키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오토바이 절도가 성행하자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와중에 현도와 도림의 갈등이 폭발하며 작품은 클라이맥스를 맞이하는데 그 충격적인 결말은 우리가 방황했던 시절과 그때의 요동치는 마음을 되짚어보게 한다. 비교적 짧은 「악당에 관하여」는 소설쓰기에 관한 메타적 이야기로 작가 임국영의 고민이 응축되어 있어 소설집 전체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며, 코로나19 거리두기 상황에서 폐업하는 술집 ‘레인보우야’의 마지막 영업을 소재로 한 「굿바이 레인보우」는 아직 지나지 않은 재난의 시대를 흘러간 올드팝을 배음으로 삼아 잔잔하게 풀어낸다. “얼마나 오랜만인가, 이런 소설을 만나는 것이!” 두근두근, 이 이야기를 읽는 순간 당신은 움직이게 된다 문학평론가 최가은이 해설에서 말하듯 이 소설집은 “수많은 레퍼런스와 다채로운 이야기로 구성되었음에도 수록작 전반은 물론, 전작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와도 연속적 구조를 지”닌다. 이 의도적인 변주와 반복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독서의 재미를 높여준다. 또한 책을 덮었을 때 가죽재킷과 스킨헤드, 그리고 지나간 록 음악으로 상징되는 임국영의 세계에 우리가 한발 들어섰음을 실감하게 한다. 소설가 강영숙은 『헤드라이너』의 인물들이 원하는 자유를 현실의 독자들이 만끽하길 바라며, “얼마나 오랜만인가, 이런 소설을 만나는 것이!”라는 감탄의 추천사를 보내왔다. 또한 시인 구현우는 “농담이 묻어 있는 서사를 따라가다보면 농담조로 넘기기 어려운 기분이 뒤따른다”며 대책없이 가볍기보다는 발디딘 곳을 돌아보게 하는 『헤드라이너』의 묵직한 뒷맛을 상기시켜주었다. 삶에 지쳐 생활반경을 지켜내는 것조차 벅찬 이들, 혹은 한번쯤 인생의 궤도를 바꿔보고 싶은 이들은 반란을 꿈꾸는 「헤드라이너」 속 소년들의 “시작하는 거야?”(97면)라는 외침에 심장이 두근거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순간에 충실한 수많은 이들은 “아마 다시는 이런 순간이 오지 않겠죠”, “멍청아, 모든 순간이 그래”(「바크」 144면)라는 오와 비의 짧은 대사에서 긴 여운을 느낄 것이다. 이렇듯 젊은 소설가 임국영이 주는 감동은 웃음과 섞여 있기에 더욱 크고,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기에 더욱 넓다. 책 속으로 그들이 장례식장에 나타난 것은 새벽 세시 무렵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선뜻 실내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나 역시 그들을 들이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들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성은 남자 셋 여자 하나였다. 그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는 흠잡을 데 없는 스킨헤드였다. 스킨헤드는 중세 스칸디나비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텁석부리였으며 키가 작고 몸이 단단해 보였다. 또다른 남자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30대를 넘길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나이가 짐작되지 않는 것은 순전히 헤어스타일 때문이었다. 먹칠한 바가지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풍성하고 둥근 머리모양이었던 것이다. ―「볼셰비키가 왔다」 8면 “아들, 사랑하는 거 알지?” “알죠. 잘 알죠.” 모른다고 할 수 없었다. 정말 알 것 같았으니까. 이상한 얘기였다.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 있다니. 나는 내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이유로 증오했다. 지금이라면 말해도 좋지 않을까. 오늘 술자리를 시작했을 때부터 끄집어내고 싶었던 본심을, 기억을 더듬고 시간을 장황하게 역행해도 서두조차 꺼내지 못한 이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좋을까. ―「태의 열매」 56면 “보이, 이 곡을 좋아하나?” 스킨헤드가 물었다. 로니는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뭇매를 맞은 직후였기 때문에 대답하기 곤란했다. 누군가 로니의 입에 담배를 물리고 불을 붙였다. 말보로 레드였다. 역시나. 그것은 로커의 담배였고 로니 역시 말보로 레드를 피웠다. 로니는 깊숙하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러자 방금까지 폭격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만 들리던 귓속으로 에디의 기타 솔로가 파고들었다. 로니는 피떡이 된 눈을 억지로 뜨고 달 가까운 곳으로 승천하는 리프트를 바라보았다. 멋지군. 내가 원하던 광경이야. “방금 좋아졌습니다.” 스킨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그는 아주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는데 그 소리가 로니에게는 또렷했다. “이제 마저 맞자.” ―「헤드라이너」 115~16면 BAR-K의 입구는 허름하기 짝이 없었으나 은근하게 새어 나오는 기품을 숨기지 못했다. 순전히 발밑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음악 덕이었다. 그 음악이란 메인스트림 팝에 조금이라도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라, 이 노래가 왜 나와? 하는 마음으로 걷는 속도를 늦출 만한 것들이었다. 빗대자면 엘비스가 나올 대목에서 클리프가 나온다거나 마이클 말고 프린스를, 너바나를 틀어놓을 바에는 펄 잼을, 용필 대신에 영록을 선곡하는 미묘함이었다. ―「바크」 125면 금기를 깼더군. 지향성이 결여된 음성이었다. 외부에서 들려온 소리가 아닌 내부로부터의 송신에 가까웠다. 허술하게 빗대자면 자신에게 복화술로 말을 걸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가로등 불빛을 등진 누군가의 앞에 나는 서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그의 머리 위로 어떤 형상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본 뒤에야 그것이 날개를 접고 도사린 날짐승임을 알 수 있었다. 새,라는 단어가 입술을 비집고 나오기 직전 또다른 누군가에 의해 고개가 처박혔다. ―「비둘기, 공원의 비둘기」 156면 현도가 나를 버리고 배달을 그만둬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도림은 새로운 오토바이를 훔쳐 오자고 제안했다. 현도는 노발대발하며 도림을 윽박질렀다. 경찰이 절도범을 잡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또다른 범죄를 저질러서 좋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도림에겐 당장 자신이 느낀 모멸감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무리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도림은 오토바이가 필요했다. 훔친 물건이면서 값비싼 오토바이가. ―「오토바이의 묘」 213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