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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부 달뫼 길
02부 달팽이 길 03부 읍내 길 04부 산막이 길 05부 시와 소리의 길 06부 습지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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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우리 생명의 탯줄/ 시인 이원규
최초의 길은 빛길과 바람길과 물길이며, 별과 해와 지구와 달의 우주적인 길이었다. 그 이후에 동물과 식물과 사람의 길이 생겨났으니, 자주 가면 길이 되고, 오래 잊히면 그 길은 사라져갔다. 왜, 언제, 어떻게, 무엇으로, 어디에서, 누구와 ‘자주 가고 오는 것’이야말로 길의 존재 증명이었다. 대충 생기는 길은 없으니 세상의 모든 길은 간절함 그 자체였다. 슬로시티 담양의 골목길이 주목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담양은 가장 담양다울 때 비로소 담양이다. 누구에게나 절절한 심리적 공간이나 문화적 공간이 없다면 서사, 형상화, 시공 초월 등 그 어떤 창작예술도 보나 마나 읽으나 마나 맹탕일 것이다. 담양의 골목길 스토리북은 나무 스토리북과 더불어 새 지평을 열었다. 이 골목길 스토리북에 나오는 김정한 작가의 사진들과 심진숙 시인의 글은 담양이라는 ‘풍경의 깊이’를 제대로 보여준다. 흑백과 컬러 사진의 절묘한 시선과 구도의 조화, 마을의 다양한 골목길들을 독창적으로 묘사하고 재해석한 이 책에 깊이 매료될 수밖에 없다. 담양의 골목길들이 저마다 한편의 단편영화처럼 생생하게 살아나고, 담양의 시간과 공간과 사람(時空人)이 더불어 어깨춤을 추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한다. 사진과 문학의 새로운 성과이자 소중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슬로시티 담양의 고품격 가이드북이자 사진과 글로 찍고 쓴 보물 지도가 아닌가. 그저 한 권의 지역 소개 책자가 아니라 문화사적인 새 발명품이 되었다. 골목길이라니, 문득 그 제목만으로도 내 청춘의 심장을 벌컥 열어젖히는 옛 노래가 떠오른다. 골목길 접어 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 중략... 바보처럼 한마디 못하고서 뒤돌아가면서 후회를 하네 -김현식 노래 <골목길>(엄인호 작사 작곡의 1988년 발매된 신촌블루스 2집) 부분 고 김현식의 절창 <골목길>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이 노래의 배경은 도시의 골목길이겠지만 그 무슨 대수랴. 내 나이 또래라면 그저 흥얼거리기만 해도 그 순간 30년은 더 젊어질 것이다. 이 스토리북을 보고 읽는 동안 나와 담양의 시절 인연들이 연거푸 떠올랐다. 내게 담양의 기억은 너무나 색다른 풍경으로 남아 있다. 겨우 산죽이나 보던 경상북도 문경 출신의 나로서는 전라남도 담양의 거대한 대나무숲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어린 시절 경북의 오지마을까지 바구니와 키 등 죽공예품을 이고 지고 팔러오던 분들의 고향을 아주 뒤늦게 제대로 알아본 것이다. 그리하여 담양의 대나무 숲길에서 참 오랫동안 서성거리며 고재종과 손택수 시인 등의 시를 다시 음미하고, 소쇄원과 명옥헌과 유서 깊은 정자들. 그리고 삼지천마을의 옛 담장길 등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재초등학교의 천연기념물 느티나무에 오래 마음을 준 적도 있다.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나무의 사계>에 출연하면서, 이 노거수 신목의 4계절을 영상으로 담기 위해 찾아갈 때마다 얼마나 큰 감동과 위로를 받았던가. 또한 전고필 대표의 향토사전문책방 이목구심서에서 여는 ‘말술학교’의 술연자로 참가하고, 돌아가신 가수 이동원 선생과의 작은 콘서트, 담양문화원의 초대로 ‘역사의 빛 의향 문화재’ 행사에서 만난 오래된 친구 영화감독 김전한과 한옥 팬션 조아당에서의 술자리 등도 행복한 추억들이다. 그런데 담양이 내게 아주 깊이 다가온 것은 15년 전이다. 2008년 4월5일부터 12일 동안 목포 하구둑에서 가마골 용소까지 영산강 150km를 도보 순례 할 때였다. 당시 한반도 대운하 반대를 위해 불교-개신교-천주교-원불교 등 종교인들이 나섰는데 그때 나는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도보순례단의 총괄팀장이었다. 103일 동안 4대강 3천 리를 걸을 때 관방제림, 습지, 대나무 숲길, 발원지 등 영산강의 아픈 물소리와 바람 소리를 깊이 모시며 길잡이를 했었다. 그때 생각이 나서 2008년 4월 16일 영산강 순례를 마치며 남긴 ‘담양 선언문’을 찾아보았다. 마음이 아프고 또 아픕니다. 강가에 앉아 영산강을 바라보노라면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이 강을 따라 생명이 있고, 우리의 삶과 자연이 이루어 온 공동체가 있으며, 시간이 더해져 만들어 온 역사와 문화가 있습니다. 그 세월을 함께 가꾸어 온 영산강이 아파하고 있기에 순례단도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순례단은 목포의 하구둑으로 항문이 막힌 채 시름시름 죽어가는 영산강을 바라보며 꼭 그만큼의 아픈 몸으로 기도하며 순례했습니다. 썩은 강물 속에 주검처럼 떠오르는 ‘호남운하’의 허상을 뼈아프게 확인하고 또 확인했습니다. 생명의 젖줄이 죽어가니 물고기들도 죽거나 병이 들고, 철새들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영산강을 버리고 포기하는 동안 마침내 영산강도 우리 인간들을 버리거나 내치는 단절의 보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러나 영산강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강변 유채꽃들이 만발하고 산벚꽃이며 복사꽃 흐드러진 천하의 절경은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직 강물과 우리 인간들만이 이 좋은 봄날에 스스로 소외된 채 중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지금 읽어도 당시 암울하기만 했던 심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 당시에는 국수 거리와 관방제림 바로 아래의 강물도 다 썩어 있었다. 물고기가 살기는커녕 악취가 날 정도였다. 발원지에서 출발하자마자 영산강은 죽어가고 있었다. “우리 순례단 또한 많이 지치고 아팠습니다. 문득 위기의 영산강을 닮다 못해 ‘내 탓이오’가 아니라 ‘네 탓이오’를 하며 서로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얼마나 다행인가. 그동안 슬로시티 담양 읍내의 강물, 영산강에 물고기가 돌아오고 온갖 철새들도 다시 찾아들기 시작했다. 아직 영산강 하구까지 맑게 되살아날 길은 멀지만 그래도 조금씩 상류부터 그 가능성이 엿보이고, 담양의 생태 문화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이 날로 긍정적으로 번지고 있으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이처럼 썩고 문드러지던 영산강 물길이 다시 열리듯이 허물어지고 잊히던 골목길이 다시 제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물고기와 철새들이 돌아오듯이 골목길에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옛날처럼 깔깔거리며 뛰어노는 아이들은 잘 안 보이고 갈수록 할머니들의 유모차와 빈집만 늘어가지만, 그래도 이곳에 그 누군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첫 주인공인 시골살이 주연의 말이 눈물겹다. 근데 전 이 소박한 골목길도 이뻐 보여요. 금방 무너질 듯 서 있는 흙돌담도, 시멘트 블록도, 파란 양철담도, 아무렇지 않게 잘 어울려 있잖아요. 햇살과 그늘조차도 편안하게 어울리잖아요. 아, 꾸밈없는? 네, 음, 진짜 미인의 민낯 같은 그런 거요. -본책, 01. 달뫼길 부분_ 그렇다. 마을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가 날마다 생산되거나 소멸되는 곳, 지극한 현실이었다가 어느새 추억과 역사가 되거나 전설이 되는 곳이 바로 우리들의 더없이 소중한 골목길이다. 그 이름마저 아름다운 달뫼길처럼... 월산천 물줄기 따라 습지가 이어지고 세월 묵은 다리들이 그림처럼 놓인 곳, 꾸밈없는 옛 모습을 간직한 담장들이 순하게 열어주는... -본책, 01. 달뫼길 부분_ 그리고 할머님이 돌아가신 뒤 옛집에 온 절망적인 주희, 그녀의 시각으로 본 아름다운 묘사도 깊이 다가온다. 부채 할아버지 작업실에서 나와 물억새와 고마리가 우거진 월산천 둑길을 따라 걷는데, 물억새와 대숲이 춤추고 있었다. 둑길 아래는 물결의 소리 위로 소금쟁이가 활을 그리고, 푸른 하늘과 구름이 선명하게 비쳐들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자갈까지 환히 보이는 물의 얼굴, 곁에서 고마리가 하얀 꽃 무리를 쏟아냈다. -본책, 01. 달뫼길 부분_ 물억새, 고마리, 대숲은 그 명명만으로도 더불어 춤을 추고, 하늘과 구름과 자갈까지 다 품어버린 물의 얼굴은 또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환희로운가. 우리 현대인들이 무엇을 잃고 또 잊어버린 채 서로 외면하며 사는지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특히 창평 삼지천마을 옛돌담길을 보라. 있는 그대로 지구의 가장 아름다운 골목길이 아닌가. 시간마저 느리게 가는 슬로시티 담양의 창평 삼지천마을에는 곳곳에 한옥 카페와 민박집, 대문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매화나무집, 겁나 많은 석류나무집, 아궁이가 이쁜 엿집, 나무를 사랑하는 집, 돌탑을 사랑하는 집, 정원이 아름다운 집 등이 대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이한다. -본책, 02. 슬로우길 부분_ 그런데 너무 가슴 아프게 눈길을 끄는 폐가가 있으니 바로 ‘고정주 고택’이다. 골목길 접어들자마자 대문부터 본채까지 거의 다 허물어질 정도로 방치되어 있어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 고택은 담양 근대교육의 선각자인 춘강 고정주의 고택이야, 창평지역 근대교육의 효시인 영학숙과 창흥의숙의 모태가 되었어. 한말 민족운동의 근원지라는 점에서 현대사적 의미가 크지. 부농형 양반가가 갖추어야 할 구성요소를 두루 잘 갖추고 있어. 그런데 왜 이렇게 상태가 험해요? 문화재라면서 왜 관리를 안 해요? 문화재이긴 하지만 사유재산이라 후손이 원하지 않으면 행정에서도 어쩔 수가 없어.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사연이 있겠지. -본책, 02. 슬로우길 부분_ 이 또한 아직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끊긴 지 오래인 마을, 문화재로 잘 관리하기는커녕 그 유명한 고택이 폐가로 방치되는 것도 우리 시대의 민낯이 아닌가. 나 또한 사진을 찍고, 드론을 띄워 살펴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웠다. 다 허물어지기 이전에 좋은 대책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골목길 스토리북의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모두 흥미롭다. 저마다 새로운 공간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주연과 주희 외에 문화원 사무국장 은영, 커피 작가와 택배 작가(화가), 그리고 고향을 둘러보며 향수에 젖는 여자인 커피 작가의 어머니 등이 담양의 주요 공간과 이야기에 잘 스며든다. 지실마을길, 소쇄원길, 미암길 등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재연한다. 그리고 주연의 시골살이 1년 회고도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카메라맨 아저씨 덕분에 주연의 추억들은 무사했다. 서울에 돌아온 주연은 사진을 정리하면서 함께 해준 사람들을 기억했다. 삐뚤빼뚤한 흙돌담길에 그들이 없었더라면, 억새 휘날리는 논둑길에 그들이 없었더라면, 노란 담벼락 길도 그들이 없었더라면, 어둔 관방제림 노거수, 낡은 섶다리, 돌담길 빈집, 노을 지는 습지, 내가 찍는 사진이 그들과 함께이지 않았더라면... -본책, 06. 습지길 부분_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아니라 길이 있고, 사람이 사는 집과 집 사이에 골목길이 있다. 골목길은 우리 인생의 탯줄 같은 것이다. ‘고향의 원형질’로서 맨 처음 세상으로 나서는 길이자 죽기 전에 반드시 돌아오고픈 유일무이한 길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골목길은 인간사뿐만 아니라 지수화풍의 이 우주적인 질서 속에서 완성된다. 인생이란 젊어 골목길을 나섰다가 늙어 골목길로 돌아오는 것이다. 설사 그곳이 낯선 골목길일지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