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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1부 테마 기행 현대문명의 공간에 대한 상상력 존재의 비의(秘意)를 찾는 여정 야생화의 시세계 자연의 충분조건과 문명의 필요조건 신춘문예제도의 문제점 친일문학론의 맹점 ‘황토현’의 뜨거운 상징을 뛰어넘기 2부 시인 산책 밀고 당기는 몸과 산문시의 리듬 -정진규論 무지개를 보는 눈 -오탁번論 바람의 현상학 -김명인論 절망과 소망의 경계에 서 있는 생명의 노래 -최두석論 긴장과 단순함의 사이에서 -송재학論 눈먼 창녀의 고백 -김영승論 치밀한 관찰력의 장인 -김기택論 물구나무 서서 보는 풍경 -김신용論 죽음에 세 들어 있는 삶의 풍경 -전동균論 자연과 풍속의 내면화 - 문태준論 상처와 욕망의 가계 - 유홍준論 3부 시집 기행 황지우의 불교적 상상력 -시집 『게 눈 속의 연꽃』이 쓰인 내력 북어의 눈 -최승호 시집 『모래인간』 상처학교의 시인 -황학주 시집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유목의 새로운 풍경 -이재무 시집 『푸른 고집』 닫혀 있는 상자의 내밀함 -이경림 시집『상자들』 어리고 비린 길의 풍경 -문인수 시집 『동강의 높은 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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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비롯한 예술품들은 이러한 탈신비화에 저항할 만한 존재조건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생명을 지닌 존재처럼 신비로운 속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것들을 함부로 취급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그것들의 존재 가치는 상품의 매뉴얼처럼 조목조목 정리되지도 않는다. 그것들의 그러한 존재가치야말로 소진되지 않는 자연의 생명력에서 비롯되거나 유추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문명의 ‘필요조건’으로는 규명하거나 장악할 수 없는 신비감을 ‘충분조건’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대한 나의 친화감은 아마도 자연의 ‘충분조건’으로서의 생명력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콘크리트가 가로막는 자연의 생명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시에 드리워진 자연의 존재감을 찾아 나서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 p.6 현대사회에서도 시인이 자연을 노래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근대 이후부터 현대사회로 진행될수록 삶의 모든 존재 조건과 가치가 도구적 쓰임새의 지배를 점점 더 받게 된 상황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척도로 도구적 쓰임새가 더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존재의 중요한 가치가 결핍되고 존재의 중요한 속성들이 배제되는 삶의 허탈감과 불안을 느끼게 된다. 자연의 사물들은 이러한 삶의 허탈감과 불안을 되새기고 초극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일깨우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 p.25 현대예술은 문명이 제공하는 삶의 필요조건을 진단하는 일에만 분주한 것이다. 현대예술은 삶의 필요조건이 은폐하고 있는 삶의 보다 큰 범주인 자연의 충분조건에 대한 탐색에는 인색하다. 그 탐색은 낡았으므로 더는 건질 게 없다는 판단이 삶의 피폐함을 수락하거나 피폐함에 중독되어 버린 자의 시선이라면, 문명의 필요조건과 대립하는 자연의 충분조건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는 시인의 시선은 그런 피폐함을 뛰어 넘으려는 꿈과 의지를 품고 있다. --- pp.5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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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적 이성’과 ‘산문의 시대’
흔히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산문의 시대’라고 한다. 감성과 직관보다는 논리와 이성이 환영받는 시대이니 운문보다는 산문이 흥하고 산문이 시대정신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과연 산문의 정신은 인과율과 논리성에 근간을 두고 있어 근대적인 합리성과 자본주의의 효율성이란 개념에 부합한다. 하지만 산문의 시대와 이를 지탱하는 정신은 모든 점에서 타당한가? 산문은 베일에 싸인 신비나 밝힐 수 없는 영성을 규명하고 분석하고 드러내며 이성 앞에 신비는 탈을 벗고 경이는 발가벗겨진다. 미몽과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란 점에서는 분명 긍정적이지만 산문은 곧 ‘도구적 이성’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이는 모든 것을 가치와 쓸모로 판단하고 이에 어긋난 것들은 가차 없이 용도폐기해 버리는 자본주의의 전략과 맞닿아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도구적 이성은 길가에 핀 꽃 한 송이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돈 한 푼 벌어다주지 않는 예술 작품에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자연보다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선호하고 물질의 풍요로움을 위해 주저 없이 정신의 빈곤함을 선택하는 이 사회는 ‘괴물의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 시인가? 그리고 왜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는가? 문학평론가 이경호가 시와 소설을 아우른 이전의 평론집과는 달리 시에 대한 글만 묶어 평론집을 낸 것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자본주의 문명의 무한한 개발 욕구와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보조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산문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자연히 소설보다는 시를 읽게 된 것이다. “문명의 쓸모를 수락할 수 없는 운명을 간직하고 있는” 시에게서 예술과 문화를 ‘획일화’시키고 ‘표준화’시키는 ‘문화산업’에 저항할 힘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자신의 문학관을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가 노래한 「무지개」를 통해 밝히고 있다. 저자에게 문학이란 마치 “어린아이가 무지개를 처음 볼 때 느끼는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철근과 콘크리트가 만든 인위의 장벽 속에서 오직 “무지개”의 경이로만이 삶을 축복으로 맞이하게 만들 수 있다. “천상에 이르는 다리 같은 저것. 저것의 경이로움은 자연이 삶에 베푸는 싱싱한 탯줄 같은 것”이며 “저것으로 우리의 유년은 자연에 대한 신비의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머리보다 마음의 움직임으로 세상을 체험하는 자세”를 노래하고 “이성보다 감성의 가치를 역설한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고, 또 노래해야 하는가? 그것은 쓸모의 노예가 되어버린 존재의 가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과 관련이 깊다. 모든 존재를 용도와 목적성에서 판단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작품의 존재 가치는 도구적 속성을 뛰어넘는 자연의 자생적이며 무목적적인 속성을 또는 존재의 정체되지 않고 새롭게 생성되는 속성을 구현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꽃이나 나무 같은 자연은 자족성과 자생성을 속성으로 존재하는 반면, 문명의 도구는 제작성과 용도성을 특징으로 삼는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문명의 도구는 유용하지만 용도에서 어긋날 때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란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도구적 쓰임새가 강조될수록 “인간은 존재의 중요한 가치가 결핍되고 존재의 중요한 속성들이 배제되는 삶의 허탈감과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의 사물들은 이러한 삶의 허탈감과 불안을 되새기고 초극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일깨우는 촉매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는 것이며, 저자는 생태환경문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있다. 인위에 대한 거부, 자연스러움의 참신함 자연에 대한 강조는 곧 인위에 대한 거부로도 읽힐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저자는 과도한 시적 상징이나 의미의 과잉 그리고 이에서 비롯된 진부한 시어들을 비판하고 자연스러움이 곧 시적 참신함으로 이어짐을 강조한다. 이는 「‘황토현’의 뜨거운 상징을 뛰어넘기」란 글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황토현은 반봉건, 반외세 민족운동인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장소로 현대문학 속에서 뜨거운 역사적?정치적 상징으로 되풀이되어 왔다. 신동엽의 ??금강?? 제17장 말미에 나오는 황토현, 김지하의 「황톳길」, 이성부의 ?전라도1? 등등에서 나타난 황토현의 상징 역시 마찬가지다. 민중의 슬픔과 한, 계급적 억압과 정치적 갈등, 그리고 이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몸짓이 황토현의 주된 상징이었다. 물론 이러한 시들이 저마다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민중시의 노선이 정치운동화에 앞장섬에 따라 “저항과 분노의 자세를 황톳길에 부여하려는 시편들은 표현의 참신함이나 치밀함을 감당하려는 의욕보다 가열한 의지와 격앙된 감정을 토로하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시어와 의식의 진부함을 넘어서는 작품으로 서정주의 ?麥夏?를 제시한다. 黃土 담 넘어 돌개울이 타 罪 있을듯 보리 누른 더위- 날카론 왜낫(鎌) 시렁우에 거러노코 오매는 몰래 어듸로 갔나 바윗속 山되야지 식 식 어리며 피 흘리고 간 두럭길 두럭길에 붉은옷 닙은 문둥이가 우러 땅에 누어서 배암같은 게집은 땀흘려 땀흘려 어지러운 나-ㄹ 엎드리었다. 여기서 황톳길은 원시적 생명력과 강인함, 죄의식과 관능미를 표현하여 토착적인 속성을 견지하면서도 정치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독특한 시의 유형을 발굴해 낸다. 생태환경문제가 무엇보다 절실하고 또 시의 주제와 내용으로 활발하게 표현되는 오늘날, “민중의 역사와 정치적 현실을 껴안는 뜨거운 상징으로서의 황토현을 뛰어넘는 새로운 황토의 서정”이 필요한 것이다. 문명이라는 ‘유령학교’와 자연이라는 ‘상처학교’ ‘실용’이 시대정신으로 강요되는 사회, ‘인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억누르는 사회, “문명이 제공하는 삶의 필요조건을 진단하는 일에만 분주”할 뿐, “삶의 필요조건이 은폐하고 있는 삶의 좀더 큰 범주인 자연의 충분조건에 대한 탐색에는 인색”한 이 사회는 분명 상처투성이의 사회다. 하지만 더욱 문제인 것은 “상처를 입히면서도 상처를 가리고 위장하는” 문명이라는 ‘유령학교’이다. 상처를 상처로서 인식하지 못함은 치료는커녕 상처를 더욱 깊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위태롭다. 해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바라는 것은 “삶의 현실에서 입은 상처의 기억을 자연에서 찾아내고 치유하는 시인의 모습”이다. ‘유령학교’에서 삶의 피폐함을 수락하거나 피폐함에 중독된 현대인들이 자연을 통해 비로소 상처를 일깨우고 나아가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기를 저자는 꿈꾸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