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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부 일상을 걷다 지하철 건설하면 나라 망합니다!-역사를 안고 달리는 ‘서울지하철 1호선’∥성수대교는 그저 흘러간 옛이야기가 아니다-부실공화국의 증거, ‘성수대교’를 찾아∥누가 짜장면을 하찮다 하는가-지금은 사라진 ‘소공동 차이나타운’을 찾아∥그곳에 ‘광장’은 없다-대한민국 중심 거리 ‘세종로’를 거닐며∥더이상 지역 차별의 공간이 아니다-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을 찾아∥우리에게는 사스보다 더 경계해야 할 증후군이 있다-신림9동과 압구정동 사이∥달동네가 사라진다고 도시빈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을 찾아 2부 장소를 걷다 누가 ‘말죽거리 신화’의 이면을 보았나-부동산 투기의 현장, ‘강남’을 찾아∥기어이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서울시청이 부숴버린 ‘서울시청’을 찾아∥한국은 테일러 가족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행촌동 ‘딜쿠샤의 비밀’을 찾아∥그 많던 건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최초의 엑스포장 ‘경복궁’을 찾아∥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구로동맹파업의 현장 ‘가리봉 오거리’를 찾아∥이곳을 시범 삼아 튼튼히 지으라-한국 최고最古의 시민아파트, ‘회현 제2시범아파트’를 찾아 3부 의미를 걷다 독재, 흘러간 과거가 아니다-‘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과 신당동 ‘박정희 가옥’을 찾아∥이제 잊어도 되는 ‘추억’일까-‘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일본군 ‘위안부’, 국가나 민족 간의 문제만은 아니다-수요시위의 현장 ‘일본대사관’ 앞을 찾아∥네거티브 문화유산의 존재 이유-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을 찾아∥한국 방송의 역사는 그대로 이어진다-정동 ‘경성방송국’ 터를 찾아∥전시되지 않은 역사를 생각한다-전쟁을 기념하는 ‘전쟁기념관’을 찾아 4부 문화를 걷다 눈썰미를 지닌 이들이 그리운 이유-사라져가는 ‘피마길’을 걸으며∥워낭소리를 대신하는 한숨소리-사라져가는 땅의 이야기, ‘뚝섬’과 ‘마장동’을 찾아∥독재자는 왜 어린이를 사랑했을까-새로운 변신을 앞둔 ‘어린이대공원’을 찾아∥민주화운동의 ‘소도’는 어디를 향하는가-약자들의 안식처 ‘명동성당’을 찾아∥그 자체로 한국인의 삶과 함께해온 동반자였다-리모델링 중인 ‘장충체육관’을 찾아∥우생학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경성제국대학’의 흔적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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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짜장면을 하찮다 하는가-지금은 사라진 ‘소공동 차이나타운’을 찾아 화교들의 지역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일이 벌어진 것은 1966년 들어서였다. 박정희 정권이 251명의 간호사를 처음 서독으로 파견한 그해 말에 제36대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방한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용병 격으로 베트남에 1개 군단 규모의 군대를 파병해놓은 상태였으니, ‘보스’의 방한을 허투루 준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 인구가 379만 명 정도이던 그때, 일반 시민 155만 명에 학생 100만 명 그리고 공무원 20만 명 등 모두 275만 명을 동원해 김포공항에서부터 환영식이 열리는 서울광장까지 24킬로미터에 달하는 연도 주변에 빈틈없이 도열시켰다. 존슨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팻말과 꽃다발,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게 하고 마치 북한에서 하는 듯한 ‘열렬한 환대’를 베푼 것인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막상 환영식이 열리는 서울시청 주변의 낙후한 환경을 미리 손보지 않아 쇠락할 대로 쇠락한 소공동 차이나타운의 모습이 그만 미국 텔레비전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고 만 것이다._43~44쪽 그곳에 ‘광장’은 없다-대한민국 중심 거리 ‘세종로’를 거닐며 당초 육조대로는 지금의 일민미술관 앞에서 끊겼기 때문에 숭례문으로 가려면 동쪽으로 돌아 보신각에서 우회전을 해야 했다. 즉 당시 육조대로는 북쪽과 남쪽이 막힌 광장 형태였다. 그런데 일제는 1912년 육조대로의 남쪽, 그러니까 동아일보사와 동화면세점, 코리아나호텔 사이에 있던 황토현이라는 언덕을 밀어버리고 경성부청사(현 서울시청사)와 숭례문을 거쳐 경성역(현 서울역)과 용산까지 이어지는 도로 연장 공사를 강행했다. 경성 통치의 중심인 경성부청, 교통의 핵심인 경성역, 제국주의적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용산의 일본군 기지를 직선으로 잇기 위한 조치였다. 1926년이 되어서는 남산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에 있던 조선총독부까지 옮겨오면서 화룡정점을 찍었다. 이를 두고 일본인들은 근대화를 위한 길이라 했지만, 수많은 조선인들에게는 침략과 수탈의 길에 불과했다. 그렇게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는 일제의 조선 지배를 위한 ‘지리적 출발점’이 되었다._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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