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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어린 시절 나의 정신적 유산
제2부 나의 학창 시절 제3부 미국 앨라배마 대학교 유학 시절 제4부 귀국과 대학에서 강의 시작 제5부 실천적 삶으로서 사회 민주화 운동과 여성·통일 운동 제6부 귀향 후 진해에서의 실천 활동과 단상 제7부 학문과 실천에 대한 나의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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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바로 위 고모 이름은 이애시인데 사랑 애(愛), 베풀 시(施), 즉 ‘사랑을 베푼다’는 뜻이다. 아버지 이름은 언약 약(約), 믿을 신(信)으로 이약신이다. 아버지와 고모의 이름 모두 기독교적인 이름이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나까지 포함해 3대째 기독교 집안이 되는 셈이다.
---「제1부 어린 시절 나의 정신적 유산」중에서 교장실에서 나를 불러 갔더니 형사 두 사람이 와 있었다. 일본 사람하고 조선인 형사 두 사람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나에게 “어떻게 애국 사상을 갖게 되었나”라고 물었다. 내가 쓴 그 시를 반 후배가 가지고 있다가 끌려가면서 전부 압수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지하 서클에 연루되었던 것이었다. 시를 쓰게 된 동기와 사상에 대해 몇 시간 동안 문초당했다. (……) 이 사건으로 나는 4학년 졸업반이었는데 한 달 정학을 맞았고 반에서 1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졸업 때 도지사상을 받지 못했다. ---「제2부 나의 학창 시절」중에서 우리 집이 개화된 집안이고 아버지도 일찍부터 호주도 다녀오고 하셨으니 서양에 딸들을 보내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시고 그런 염려도 없으셨다. ‘너희가 가고 싶으면 가라’는 입장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런 혼란기에는 제대로 공부도 못 하니 나가서 빨리 공부하고 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우치 교수가 나는 잘 모르고 내 동생을 귀엽게 보고 자기 딸처럼 보아 부르려고 했는데, 자기들 생각에 어린 여자를 혼자만 오라고 하는 게 보기 좋지 않아 언니인 나까지 초청했다고 했다. 우리 둘 다 미국에 가는 게 좋지는 않았지만, 카우치 교수 덕분에 나와 동생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제2부 나의 학창 시절」중에서 미국 사회에 여성들이 직업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지역의 사회와 정치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봉사 활동을 하는 모습이나 조직 활동을 하는 모습을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인간이 개인적으로 자아의식을 확고하게 확립해 자율적으로 살아가면서 사회와 국가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그런 것을 깨닫게 되니 ‘내가 귀국하면 조국은 분단되었지만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러면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이루어 언젠가는 자율성을 회복하게 되고 민족 통일을 이룩하지 않을까’라는 참으로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제3부 미국 앨라배마 대학교 유학 시절」중에서 YWCA에서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하면서 지역사회 발전을 여성 생활과 관련해 연구했다. 소비자 문제하고 자녀 양육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주부들의 문제를 조사해 그 지역의 문제를 파악하고 여성들을 조직해 그들의 공동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라는 내용을 담은 조그만 책자를 썼다. 이것이 「여성은 지역사회의 주인이다: 지역사회 발전과 여성의 역할」이라는 교육 자료다. ---「제4부 귀국과 대학에서 강의 시작」중에서 여성단체협의회와 여성단체연합이라는 두 세력이 힘을 합쳐 ‘가족법’ 개정을 이루었다는 것은 여성운동사에 중요한 지평을 연 사건이다. 30여 년 투쟁해 여성의 친권과 재산 분할권을 얻어낸 것이다. 여성의 힘으로 ‘가족법’을 개정하는 대단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제5부 실천적 삶으로서 사회 민주화 운동과 여성·통일 운동」중에서 국내외적으로 정대협 활동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역사의 증언자로 우뚝 서게 하고, 그들의 기본 생활을 그나마 국가에서 보장하게 되었다는 것이 큰 소득이었다. (……) 우선 할머니들이 너무 가난하게 사는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져 처음에는 정대협에서 모금을 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드렸다. 한두 번 모금하다가 ‘이것은 국가가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생활지원법’ 제정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시위도 많이 했는데, 결국 법이 제정되어 할머니들이 생활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제5부 실천적 삶으로서 사회 민주화 운동과 여성·통일 운동」중에서 진해에 와서 내 개인적인 연구와 함께 진해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정책을 제안하고자 조사 연구를 하다가 이 지역의 어린아이들이 아무런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마침 MBC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전국에 특정 지역을 선정해 어린이 도서관을 지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진해기적의도서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제6부 귀향 후 진해에서의 실천 활동과 단상」중에서 가족이라는 것은 결국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이 같이 살면 그것이 가족’이다. 앞으로 가족 개념은 이렇게 바뀔 것으로 본다. 내가 어떤 노인을 어머니라며 모시고 살 수도 있다. 정적인 인간관계로서 어머니처럼 모시고 사는 것이다. (……) 가부장제의 혈연과 혈통에 묶인 가족에 대한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 ---「제7부 학문과 실천에 대한 나의 생각」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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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효재, 1세대 여성학자로서
선생님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문학을, 미국 앨라배마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셨다. 1958년 이화여대에 사회학과가 개설되자 교수로 부임해 1990년 정년 퇴임하실 때까지 교편을 잡았다. 1960년대에 이화여대 여성자원개발연구소를 만들었고, 1970년대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여성학 강좌를 개설하며 훗날 한국 여성운동의 주축이 될 많은 제자를 길러내셨다. 그러던 중 1980년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연루되어 4년간 해직 교수 생활을 하셨다. 선생님이 해직 시절 만든 여성한국사회연구회는 오늘날 한국가족문화원과 젠더교육플랫폼효재로 발전해 제자들이 젠더 교육과 여성·가족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해직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창립을 주도하셨다. 부지런한 학자로서 선생님은 『가족과 사회』, 『여성과 사회』,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 『분단시대의 사회학』 등 100여 편의 책과 논문을 남겼으며, 한국사회학회와 한국가족학회 회장을 지내셨다. 이이효재, 분단 사회학의 개척자로서 선생님은 미국에서 구조기능주의와 민주주의를 배우고 돌아와 한국에도 근대화와 민주주의가 정착되면 가족 구조도 민주화되어 여성 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보셨다. 하지만 귀국한 후 맞닥뜨린 분단의 현실과 가부장적인 현실 앞에서 서구의 이론은 설명력이 없음을 깨달으셨다. 이러한 선생님의 고민은 분단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한국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분단시대의 사회학’으로 이어졌다. 선생님은 분단된 사회에서 가부장적 가족 문제와 여성 문제를 연구하며, 그 실천 과제로 민족 분단의 극복, 평화통일,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을 자신의 평생 과제로 삼으셨다. 그리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동체’의 건설을 꿈꾸셨다. 선생님의 분단시대의 사회학 주창은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에게 분단에 대한 학문적 인식과 통일운동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이효재, 실천하는 여성운동가로서 1990년대부터 선생님은 오늘날 한국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운동, 가족법 개정 운동, 호주제 폐지 운동,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 등을 주도하셨다. 이들 운동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내외적 공론화, (가족법 개정에 따른) 여성의 친권과 재산 분할권 확보, 호주제 폐지라는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졌다. 또한 ‘위안부’ 문제를 고리로 남북한과 일본의 여성학자와 여성운동가들을 모아 서울, 평양, 도쿄에서 수차례 토론회를 여는 등 선생님은 여성 문제와 통일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이셨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선생님은 명실상부한 한국 여성계의 대표로서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국내의 대표적인 여성운동 단체들을 이끄시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고희를 넘긴 나이에 고향인 경남 진해(현 창원시 진해구)로 귀향해 돌아가실 때까지 지역에 자리를 잡고 지역 어린이와 여성들을 위해 봉사하셨다. 지역 여성들과 함께 여성학 공부 모임을 만들었고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관 운동에 불을 지피셨다. 지역 여성들이 풀뿌리 조직을 꾸리는 데, 지역 어린이들이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쉼 없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조언을 주셨다. 이이효재, 여성운동의 대모(代母)로서 선생님은 실천하는 여성학자이자 실천하는 여성운동가로서 선구적인 자취를 남기셨다. 책에도 언급되지만, 선생님은 ‘여성운동의 대모(代母)’라는 칭호는 싫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시대 상황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며 그 호칭은 싫다”라고 하셨다. 본인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라는 평가가 선생님께 결코 과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생전 선생님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상을 받으셨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수여하는 올해의여성상(1993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수여하는 인권상(1994년), 유관순상(2005년), YWCA가 수여하는 한국여성지도자상 대상(2012년)을 받았고, 사후에는 국가모란장(2020년)을 추서받으셨다. 한마디로 선생님은 여성운동, 평화통일운동, 지역운동에서 개척자와 선구자로 시대정신에 충실한 삶을 사셨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