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소문제2부 상처제3부 불꽃해설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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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野 多?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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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가 영원히 나를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17세기 토스카나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뒤틀린 욕망과 사랑이 바꿔놓은 하얀 코 여자의 삶전구가 발명되기도 전인 17세기 이탈리아, 그곳에는 대를 이어 품질 좋은 양초를 판매하는 나르디 상회가 있었다. 100킬로미터 떨어진 피렌체 지역까지 양초를 납품할 정도로 규모가 있는 상회를 운영하는 나르디 씨의 고민거리는 딱 하나, 스무 살을 모두 넘긴 네 자녀의 혼사였다. 어린 시절에는 그 나이 애들 같지 않게 무뚝뚝한 표정과 적은 말수로 ‘양초 가게 엘레나’라고 불리며 시장 상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나르디 상회의 막내딸 엘레나는 어느덧 숙녀티를 내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라, 이제는 마을 청년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양초 가게 엘레나’라는 별명의 의미를 바꿔나갔다. 그녀의 어머니 프란체스카는 그 시절의 여느 여인들(예를 들어 엘라나의 언니 아디나 같은)이 그러하듯 엘레나가 정숙한 여인이길 바랐지만, 엘레나는 사교 모임에 가 “러브레터 따위 하나같이 장황하고 허풍스럽고 자신에게 취해 있다”는 말을 하며 어머니의 화를 돋우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나르디 상회의 네 자녀 중 가장 먼저 결혼 소식을 알려온 건 뜻밖의 일이기도, 혹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녀가 불행에 휩싸인 미망인이 되어 친정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쩌면 결혼 첫날밤, 자신의 아내가 순결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귀한 양초를 백 개나 챙겨 성당에 달려가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남편 자코모의 행동에서, 엘레나의 평탄치 못한 삶은 이미 예견되었을지 모른다. 처형대를 뒤로한 채 아내에게 달려든 사형수와평생 ‘하얀 코 여자’로 살아가게 된 비운의 여인결혼식을 올린 지 겨우 2년을 조금 넘겼을 무렵, 엘레나의 남편 자코모는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현장에서 체포된다. 짧은 결혼 기간 동안에도 엘레나를 향한 짙은 의심과 집착을 보인 자코모였기에,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신을 모욕한 이를 향해 칼을 휘두른 행동은 갑작스럽지만 어쩌면 언젠가 찾아올(혹은 언젠가 엘레나에게 닿았을지도 모를) 필연적인 위험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형대를 뒤로한 채 아내와의 마지막 접견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내에게로 달려든다. 자신의 죽음 이후 아름답고 젊은 미망인이 될 ‘양초 가게 엘레나’를 향해 다가올 남자들을 미리 처단하기 위해, 그들 대신 그녀의 얼굴을 훼손시키기로 결심하곤 그녀의 코를 물어뜯는다. 결국 엘레나는 또다시 자신을 세간의 입방아 위에 평생 올려둘 깊은 상처를 얻게 되었다. 그녀의 나이 고작 22살의 일이었다. 질투심과 욕망에 눈이 멀어 사형대를 뒤로한 채 아내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든 사형수와 그로 인해 칩거 생활을 하며 자신의 코를 하얗게 칠하는 여자. 이 끔찍한 사건이 무색하게도 《하얀 코 여자》는 17세기 이탈리아 항구 도시의 이국적인 전경과 함께 너무나 평온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흘러간다. 토스카나 지역에서 생산된 품질 좋은 밀로 엮은 밀짚모자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거리 공연을 하는 악단, 교역이 활발한 수출항 시장의 상인들이 파는 조그마한 수제 바구니나 싱싱한 소라고둥, 드넓은 해안가를 가로질러 다니며 여유롭게 산책하는 수많은 마차들…. 저자 고노 다에코가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이던 시절에 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와카미 히로미는 그녀의 소설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마치 명필이 붓을 움직이는 것처럼 고노 다에코는 소설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것은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매우 침착한 형태에 의거한 수법, 그것만으로 고노 다에코의 작품은 완료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어쩐지 그 이상의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미스터리를 도무지 풀 수 없다.”《하얀 코 여자》를 집어 든 독자들에게 고노 다에코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파격적이고 섬뜩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수백 년도 전에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국가에 살다 간 어느 한 여인의 삼십여 년의 생애 그 자체이다. 일본 아쿠타가와상 최초의 여성 심사위원이자일본 예술가 최고의 영예인 일본 문화훈장을 수여받은 시대의 거장고노 다에코의 문학적 정수를 담다엘레나에게 발생한 일련의 사건은 그녀의 삶에서 일어나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일지 모르나 이 소설이 보여주는 가장 기이하고 미스터리한 면모는 아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지 않고, 아내가 원하는 사소한 일들에 싫은 티 없이 기꺼이 응해주는 것. 이것만으로도 17세기의 토스카나에서 자코모는 좋은 남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엘레나는 종종 광기에 가까운 집착과 질투를 보이는 남편의 모습을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세간의 사람들이 엘레나에 대한 소문을 통해 그녀의 행실이나 사건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함부로 상상하듯, ‘남편’이란 존재에 대해 엘레나도 세간의 평판을 거울삼아 자신의 코를 물어뜯은 살인자라는 사실보다 세간이 말하는 ‘좋은 남편’으로 그를 평가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사건 이후에도 그를 그리워하며 그와 다시 한 몸이 되길 원하고, 자코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 또한 사형대에 오르기 위한 방안을 고민한다. “엘레나가 방화의 이유를 깊이 고민하는 것은 방화 그 자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죽고 싶기 때문도 아니고, 어떤 방식이라도 괜찮으니 누군가가 자신을 죽여줬으면 해서도 아니었다. 엘레나는 벽돌에 고개를 올리고 도끼로 내려쳐진 자코모와 그저 같은 몸이 되고 싶었다.” _본문 중에서 대체 누가 양초 가게 엘레나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가 방화를 계획하고 죽음을 통해 자코모와의 합일을 원하게 된 데는 복수심이나 자기 파괴적인 마음이 작용한 게 아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남편으로 인해 삶이 무너진 여인의 삶을 통해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노 다에코는 소설 작법에 대한 저서인 《소설의 비밀을 벗긴 12장》에서 ‘소설은 인생의 지침이 아니다’라며 소설의 역할을 정확하게 명시한다. “교양을 위해 소설을 읽는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다. 재미있기 때문에 읽었고, 지금도 그렇다. 재미있는 작품은 읽고 있는 동안의 기쁨에 더해, 다 읽고 났을 때의 묘미 또한 각별하다. 그 작품의 내용이, 설령 내용면에서는 거칠더라도, 혹은 주인공의 자살로 끝맺고 있더라도, 인간이라고 하는 것, 자연을 포함한 이 세상이라는 것이 이처럼 깊은 맛이 있는 것이었던가 라고, 인간과 이 세상이라는 것이 그 작품을 읽기 전보다도 신선하게 느껴진다.”고노 다에코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 일본의 소설가 다케다 다이준은 이런 말을 남겼다. “작가가 그럴 작정으로 쓴 작품이더라도, 독자는 역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찾아내려 한다”라고. ‘양초 가게 엘레나’라고 불리며 평생을 세간의 수군거림 속에 살아간 위태로운 여인. 우리는 그녀의 삶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와 같이 타인 시선과 평가, 뒷말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현실 속의 수많은 ‘양초 가게 엘레나’를 떠올리고, 그들이 그저 ‘하얀 코 여자’라 불리며 살아가지 않기를, 그들의 삶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기를 염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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