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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SCENE 1 1. 몬트리올영화제와 임권택 2. 모스크바영화제와 고 강수연 3. 로테르담영화제와 홍상수 4, 수교국과 영화교류(김지미, 윤일봉, 정윤희) 5, 칸영화제와 이창동 6. 애주가 모임 ‘타이거클럽’ 7. ‘넷팩’ 친구들 8. 아시아·태평양영화상(APSA) 9 부산국제영화제 창설 10. 화려한 퇴장 SCENE 2 11. 영화와의 첫 인연, 영화진흥공사 12 남양주 종합촬영소 건설 13. 예술의전당, 기획에서 준공까지 14.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조성 15. 국립국악당 건립 16. 부산 영화의전당 건립에 올인 17. 운당여관과 정동극장의 복원 2. 동기를 부여한 페사로영화제 23 SCENE 3 18. 나의 공직생활과 윤주영 장관 19. 문예중흥 5개년계획안의 성안 20. 영국 공보성 초청 영국 시찰 21.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 방문 22. 강원도 동계아시아경기대회 사무총장 23.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창설 24. 강릉국제영화제 창설과 중단 SCENE 4 25. 나의 유년시절 26. 부산피난시절 27. 별난 모임 ‘86회’ 28. 테니스와 함께한 50년 29. 목포의 ‘오빠부대’ 30. 최현 그리고 최승희 31. 원곡 김기승 선생님과 서예 배우기 32. 두주불사(斗酒不辭) 33. 영화감독으로 데뷔, 〈주리〉 34. 칸영화제와 영화 〈영화 청년, 동호〉 6. ‘돈’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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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공직 30년과 영화 인생 36년은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했던 기간이기도 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미친 듯이 일했던 60여 년이었다. 90을 바라보는 지금도 나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해 2월, 나는 촬영용 카메라(캠코더)를 샀다. 다큐멘터리영화를 찍는다고 다르덴 형제, 뤽 베송 등 거장 감독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위기에 직면한 국내외 ‘작은 영화관’을 찾아다니며 카메라에 담고 있다. 이 또한 ‘미친 짓’이 아닌가 싶다. ---「프롤로그」중에서 강수연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곧바로 ‘배우’가 되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이끌 정도의 리더십이 있는 건 물론 무엇보다 명석하고 창의력이 뛰어나 이따금 강수연에게 어려운 일을 상의해 왔었다. --- p.25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18일, 사이먼 필드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부터 심사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전문을 받았다. 국내 영화제에서도 영화심사를 해본 일이 없는데 큰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도 아닌 심사위원장이라니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교보문고에서 회의 진행에 관한 영문 책을 구해 용어부터 메모했다. --- p.32 칸, 베를린, 베니스영화제는 ‘세계 최초로 상영되는 영화’(월드 프리미어라고 부른다)만을 선정, 상영하고 다른 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3대 영화제에서 수상을 원하는 감독이나 제작자는 다른 영화제에서 초청해도 응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영화제 간에는 좋은 영화를 먼저 초청하기 위한 물밑싸움이 치열하다. --- p.53 뉴델리에서 개최된 회의는 ‘아시아영화진흥기구’(The Network for the Promotion of the Asian Cinema) 즉 ‘넷팩’의 창설 회의가 되었다. 따라서 나는 창설회원이 된 셈이다. 그 이후 야마카타(山形·1991), 하와이(1993), 마닐라(1995)에서의 총회를 거치면서 ‘넷팩’은 그 외연을 넓혀 갔다. --- p.71 2012년 나는 단국대학교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을 창설하여 대학원장을 맡고 있었다. 브리즈번의 그리피스 영화대학과 제휴해서 두 대학 학생들이 함께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 p.83 내가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창설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문화의 불모지’인 부산에서 국제영화제가 성공하겠느냐는 우려와 함께 젊은 영화인들과 어울려 대규모 국제행사를 벌리다가 ‘패가망신’한다고 극렬하게 만류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오기와 집념’으로 영화제 창설을 밀어붙였다. --- p.89 1995년 8월 18일 오전 10시 서울시청 앞 프라자호텔 커피숍에서 부산 경성대 이용관 교수, 영화평론가 전양준, 부산예전의 김지석 교수와 영화사 ‘열린판’의 김유경 대표를 만났다. 모두가 초면인 이들은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창설하기 위해 준비 중인데 그 ‘선장’ 격인 집행위원장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부산의 파라다이스호텔에서 5억원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망설이던 나는 김지석 교수의 열정과 의지에 마음이 흔들렸다. --- p.91 그 후 33년간 강수연과 나는 부녀처럼, 남매처럼, 친구처럼 격의 없이 지내왔다. 21세의 너무 젊은 나이에 왕관을 쓴 것이 ‘멍에’였을까, 그녀는 ‘월드스타‘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절제하면서도 강인하게 살아왔다. 돌아가신 부모와 큰오빠를 모시고 여동생을 돌보면서 억센 가장으로 힘들게 살아왔다. --- p.119 서울 서초동의 예술의전당은 여러 사람의 협업으로 조성된 우리나라 최대·최고의 복합문화공간이다. 나는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재직(1980.8~1988.4)하면서 기획에 참여했고, 부지선정과 설계자선정을 주도했으며 추진상황을 수시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전관 개관(오페라극장 준공)을 1년 앞두고 초대 사장을 맡았었다. 그만큼 애정이 깃든 예술의전당이기에 지금도 자주 찾는다. --- p.133 나는 부지선정을 위해 서울 남쪽으로 과천, 수원, 대전과 계룡산 일대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을 수원 이남에 건설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 p.146 해운대 해변에 세우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부산시가 전용관 건립 부지를 발표하자 신세계백화점, 롯데백화점, KNN부산방송, 동서대가 동시에 이곳으로 자리를 잡았고 영상 관련 시설들이 조성됨으로서 그런대로 부산영상센터가 해운대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었다. --- p.159 나는 윤주영 장관처럼 창조적인 개혁 의지, 일에 대한 열정과 집념, 강한 추진력을 갖춘 분을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나는 윤 장관 재임 기간 여러 차례 보직을 옮겨 다니며 보직과 관계없이 측근에서 최선을 다해 보필했다. --- p.183 문화정책의 기조와 정신문화·전통문화·문화예술·대중문화·지방문화·문화시설 등 분야별로 중요하고 시급한 정책과제에 대한 의견을 묻는 ‘전수 우편조사’를 실시했다. 104명으로부터 925건의 의견이 접수되었다. 그만큼 문화계의 관심이 높았다. --- p.188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이렇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다. 이처럼 4년간의 피난생활을 했다. 중퇴를 했거나 비행 청소년이 안 된 것만이 천만다행이었다. --- p.252 각 경기장에서는 7일간 21개국 827명의 선수가 겨루는 열띤 경기가 펼쳐졌다. 폐막식을 하루 앞둔 1월 5일 저녁에는 춘사영화제 시상식이 열려 많은 감독과 배우 들이 참석하여 대회 열기를 고조시켰다. --- p.220 ‘허행초 모임’은 2000년 ‘허행초상’을 제정하면서 제1회 수상자로 손기상 삼성문화재단 고문 이 수상했고, 2001년 12월 27일 내가 제2회 허 행초상을 수상했다. 그 후 한상우 김영태 조동화 선생께서 수상했지만, 시상제도가 없어졌다. --- p.286 배우 고 강수연이 ‘술’로 영화제 스태프와 게스트들을 ‘눕혀 놓았다’라고 전설처럼 전해 졌다. 내가 그해 강수연의 뒤를 이었다. 나는 도수가 약한 와인보다는 43~55도에 달하는 이 고장의 명주 ‘그라빠’(Grappa)를 좋아했다. --- p.301 나는 즉석에서 “1989년 이후 20여 년간 임 감독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100편이나 영화를 찍는 것을 보고 아무나 쉽게 영화를 만드는 줄 알고 연출했는데 찍어보니 역시 임 감독께서 고수였음을 알게 됐다”라고 응답해 폭소가 터졌다. --- p.301 올해 5월(5.14~5,24)에 열린 제77회 칸영화제에 나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동호〉(Walking in the movies)가 ‘칸 클래식’ 부문에 공식 초청되었다. “나는 지난 24년간 이곳에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또는 게스트로 참가했지만, 이번에는 배우로 왔다. 이처럼 90이 가까운 ‘올드보이’로 이 자리에 선 것은 믿을 수가 없고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인생은 꿈이고 영화도 꿈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짧고 영화는 길다. 영화는 결코 죽지 않는다. 영화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영화를 사랑할 것이다. 나는 칸을 사랑한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을 사랑한다. 티에리(집행위원장), 크리스티안(부위원장), 제럴드(칸 클래식 책임자)에게 감사드린다.” 한 문장, 한 문장 말할 때마다 박수와 폭소가 터졌다. --- p.313 이어서 90분간 〈영화 청년, 동호〉가 상영되었다. 영화를 보고 있는데 새삼 감회가 새로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자막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면서 장내를 가득 메운 관객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순간 당황했고 감격했다. 두 손으로 답례했고 김량 감독에게 악수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칸영화제 25년 만에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했다. --- p.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