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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머리말: 재탕의 시대 레트로 풍경 프롤로그?뒤돌아보지 마: 노스탤지어와 레트로 ‘오늘’ 1 팝은 반복된다: 박물관, 재결합, 록 다큐, 재연 2 토탈 리콜: 유튜브 시대의 음악과 기억 3 임의 재생에 빠지다: 음반 수집과 물체로서 음악의 황혼 4 좋은 인용: 록 큐레이터의 출현 5 일본 닮아가기: 레트로 제국과 힙스터 인터내셔널 ‘어제’ 6 이상한 변화: 패션, 레트로, 빈티지 7 시간을 되돌려: 복고 광신과 시간 왜곡 종족 8 미래는 없어: 펑크의 반동적 뿌리와 레트로 여파 9 록이여 영원하라 (영원하라) (영원하라): 끝없는 50년대 복고 ‘내일’ 10 흘러간 미래의 유령: 샘플링, 혼톨로지, 매시업 11 잃어버린 공간: 마지막 프런티어와 약진을 향한 노스탤지어 레트로 풍경(짤막한 반복) 12 낡음의 충격: 21세기 첫 10년의 과거, 현재, 미래 감사의 글 참고 문헌 부록?코리안이 본 코리아의 경우?함영준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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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상하는 각본은 대재앙이 아니라 점진적 쇠퇴에 가깝다. 팝은 그렇게 종말을 맞는다. ‘빵’ 소리가 아니라 네 번째 장까지 트는 법이 없는 박스 세트와 함께, 대학 초년에 죽도록 듣던 픽시스나 페이브먼트 앨범을 한 트랙씩 충실히 재연하는 공연의 값비싼 입장권과 함께, 팝은 종언을 고한다.
이처럼 레트로 의식은 문화 전반에 퍼졌지만, 그게 가장 만성화한 곳은 음악이다. 어쩌면 이는 특히나 음악에서 레트로가 옳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팝은 현재형이어야 하지 않나? 팝은 여전히 젊은이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젊은이는 노스탤지어를 느끼지 않아야 정상이다. 소중한 기억을 뒤로할 정도로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팝의 본질은 ‘지금 여기’에 살라는, 즉 “내일은 없는 것마냥” 살면서 동시에 “어제의 족쇄는 벗어던지라”는 충고에 있다. 금융업자가 미래에 투자한다면, 밴드는 과거에 투기했다. 실제로 그 모습은 갖은 영향과 고위험 옵션, 안전한 장기 상품이 뒤엉켜 싸우는 증권시장을 닮았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는 영국 포크 지분을 팔고 80년대 초 독일 아트 펑크에 투자하는 편이 유리해 보인다. 그러나 책이 출간될 즘 영향 중개인은 전혀 다른 상품을 추천할지도 모른다. 몇몇 예외를 빼면 박스 세트는 끝까지 듣기가 대체로 불가능하며, 여러 면에서 볼 때 실제로 들으라고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용도는 소유나 과시, 즉 고상한 취향과 지식을 증언해주는 데 있다. 보비 길레스피가 한때 시사한 대로 음악이 도서관이라면, 박스 세트는 아무도 펼쳐 읽지 않는 가죽 양장본에 해당한다. 큐레이팅돼 죽어버린 음악이다. 60~70년대라고 독창성 없는 음악인이나 그룹이 드물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런 음악인이 크게 성공하는 일도 흔했다. (비틀스에 크게 빚진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가 좋은 예다.) 그러나 그들도 비평적으로는 존경받지 못했다. 그런 존경은 진정한 혁신가 몫이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달라진 점은, 대놓고 모방하는 그룹이 상당한 찬사를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10여 년을 지나오면서 록 음악은 점차 패션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게 됐다. 시대 양식을 순전히 임의적으로 돌려쓰는 지경까지는 미처 이르지 않았지만, 그날도 멀지는 않은 듯하다. 한때 음악 스타일은 소비 사양이 아니라 긴박한 표현 욕구나 세대 내 연대감, 정체성 정치의 문제였다. 그러나 록이 근본적으로 예술 또는 반항으로 보였던 시대와 달리, 오늘날 그 모든 복장 놀이는 정서적 투자나 동일시를 끌어내지 않고도 즐길 수 있다. 매시업은 팝의 역사를 감자처럼 으깨서 무분별한 회색 디지털 데이터 곤죽으로, 향미도 영양가도 없이 텅 빈 탄수화물 에너지의 혈당 폭발로 주물러낸다. 그 모든 장난기와 재미에도, 매시업은 연민을 자아낸다. 그건 척박한 장르다. 거기서는 아무것도, 심지어 매시업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이팟이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처럼, 매시업도 음악사의 모든 차이와 경계를 밀어버리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 기계에는 유령이 없다. 유산 문화를 장난스레 패러디하는 혼톨로지는, 매시업과 레트로가 대변하는 ‘미래 없음’에 저항까지는 아니더라도 우회하는 길을 두 방면에서 탐색한다. 첫째 전략은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게서 무단이탈했다면, 급진적 본능이 있는 이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공식 서사 내부에 숨은 대안적 과거를 발굴하고, 팝의 공식 서사 후미에서 기이하되 비옥한 줄기와 걷지 않은 길을 찾아내 역사의 지도를 다시 그림으로써, 과거를 낯선 외국으로 바꿔놓는다. 앞부분에서 나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거래하는 힙스터 증권시장 개념을 다소 엉뚱하게 동원해 음반 수집가 록과 금융업을 비교했다. 그러나 그 유사성은 사실 상당히 놀랍다. 세계 경제는 파생 상품과 불량대출 때문에 무너졌다. (…) 마찬가지로, 힙스터 귀족이나 블로그 귀족만 양식적 짜임새를 이해할 수 있으리만치 지시성을 고도화한 밴드와 미세 장르는, 월가나 런던 금융가의 극소수만 헤아릴 수 있는 ‘복합 금융 상품’을 닮았다. 첫머리에서 던져놓고 아직 답하지 않은 질문이 하나 더 있다. 레트로 마니아는 계속 머물까, 아니면 그 역시 하나의 역사적 단계로서 언젠가는 뒤에 남겨질까? 바로 이런 진퇴양난에서 슈퍼 하이브리드나 포스트 프로덕션 같은 이론, 즉 지평선에 떠오르는 ‘새 시대’를 밝히고 싶지만 설득력이 모자란 소망이 나타났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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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상하는 각본은 대재앙이 아니라 점진적 쇠퇴에 가깝다. 팝은 그렇게 종말을 맞는다. ‘빵’ 소리가 아니라 네 번째 장까지 트는 법이 없는 박스 세트와 함께, 대학 초년에 죽도록 듣던 픽시스나 페이브먼트 앨범을 한 트랙씩 충실히 재연하는 공연의 값비싼 입장권과 함께, 팝은 종언을 고한다.
이처럼 레트로 의식은 문화 전반에 퍼졌지만, 그게 가장 만성화한 곳은 음악이다. 어쩌면 이는 특히나 음악에서 레트로가 옳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팝은 현재형이어야 하지 않나? 팝은 여전히 젊은이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젊은이는 노스탤지어를 느끼지 않아야 정상이다. 소중한 기억을 뒤로할 정도로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팝의 본질은 ‘지금 여기’에 살라는, 즉 “내일은 없는 것마냥” 살면서 동시에 “어제의 족쇄는 벗어던지라”는 충고에 있다. 금융업자가 미래에 투자한다면, 밴드는 과거에 투기했다. 실제로 그 모습은 갖은 영향과 고위험 옵션, 안전한 장기 상품이 뒤엉켜 싸우는 증권시장을 닮았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는 영국 포크 지분을 팔고 80년대 초 독일 아트 펑크에 투자하는 편이 유리해 보인다. 그러나 책이 출간될 즘 영향 중개인은 전혀 다른 상품을 추천할지도 모른다. 몇몇 예외를 빼면 박스 세트는 끝까지 듣기가 대체로 불가능하며, 여러 면에서 볼 때 실제로 들으라고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용도는 소유나 과시, 즉 고상한 취향과 지식을 증언해주는 데 있다. 보비 길레스피가 한때 시사한 대로 음악이 도서관이라면, 박스 세트는 아무도 펼쳐 읽지 않는 가죽 양장본에 해당한다. 큐레이팅돼 죽어버린 음악이다. 60~70년대라고 독창성 없는 음악인이나 그룹이 드물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런 음악인이 크게 성공하는 일도 흔했다. (비틀스에 크게 빚진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가 좋은 예다.) 그러나 그들도 비평적으로는 존경받지 못했다. 그런 존경은 진정한 혁신가 몫이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달라진 점은, 대놓고 모방하는 그룹이 상당한 찬사를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10여 년을 지나오면서 록 음악은 점차 패션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게 됐다. 시대 양식을 순전히 임의적으로 돌려쓰는 지경까지는 미처 이르지 않았지만, 그날도 멀지는 않은 듯하다. 한때 음악 스타일은 소비 사양이 아니라 긴박한 표현 욕구나 세대 내 연대감, 정체성 정치의 문제였다. 그러나 록이 근본적으로 예술 또는 반항으로 보였던 시대와 달리, 오늘날 그 모든 복장 놀이는 정서적 투자나 동일시를 끌어내지 않고도 즐길 수 있다. 매시업은 팝의 역사를 감자처럼 으깨서 무분별한 회색 디지털 데이터 곤죽으로, 향미도 영양가도 없이 텅 빈 탄수화물 에너지의 혈당 폭발로 주물러낸다. 그 모든 장난기와 재미에도, 매시업은 연민을 자아낸다. 그건 척박한 장르다. 거기서는 아무것도, 심지어 매시업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이팟이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처럼, 매시업도 음악사의 모든 차이와 경계를 밀어버리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 기계에는 유령이 없다. 유산 문화를 장난스레 패러디하는 혼톨로지는, 매시업과 레트로가 대변하는 ‘미래 없음’에 저항까지는 아니더라도 우회하는 길을 두 방면에서 탐색한다. 첫째 전략은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게서 무단이탈했다면, 급진적 본능이 있는 이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공식 서사 내부에 숨은 대안적 과거를 발굴하고, 팝의 공식 서사 후미에서 기이하되 비옥한 줄기와 걷지 않은 길을 찾아내 역사의 지도를 다시 그림으로써, 과거를 낯선 외국으로 바꿔놓는다. 앞부분에서 나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거래하는 힙스터 증권시장 개념을 다소 엉뚱하게 동원해 음반 수집가 록과 금융업을 비교했다. 그러나 그 유사성은 사실 상당히 놀랍다. 세계 경제는 파생 상품과 불량대출 때문에 무너졌다. (…) 마찬가지로, 힙스터 귀족이나 블로그 귀족만 양식적 짜임새를 이해할 수 있으리만치 지시성을 고도화한 밴드와 미세 장르는, 월가나 런던 금융가의 극소수만 헤아릴 수 있는 ‘복합 금융 상품’을 닮았다. 첫머리에서 던져놓고 아직 답하지 않은 질문이 하나 더 있다. 레트로 마니아는 계속 머물까, 아니면 그 역시 하나의 역사적 단계로서 언젠가는 뒤에 남겨질까? 바로 이런 진퇴양난에서 슈퍼 하이브리드나 포스트 프로덕션 같은 이론, 즉 지평선에 떠오르는 ‘새 시대’를 밝히고 싶지만 설득력이 모자란 소망이 나타났다. 미디어 서평 지난 25년간 그보다 더 예민하게 시대정신을 추적하고 정의한 음악 평론가는 떠올리기 어렵다. ?데이브 해즐럼, 『가디언』 대중음악이 지금 이 순간을 노래하는 음악이라면, 과거가 가만히 흘러가기를 거부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레트로 숭배, 노스탤지어의 유혹, 음악 문화의 미래를 탐정의 차가운 눈과 애호가의 뜨거운 가슴으로 분석한다. ?롭 셰필드, 저술가 신선하게 날카롭다. (…) 우리가 시간과?그리고 공간과?맺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두툼히 기술한 책으로서, 『 레트로 마니아』는 매우 널리 읽힐 가치가 있다. ?수크데브 산두, 『옵저버』 사이먼 레이놀즈는 대중음악의 미래에 관해 냉혹한 질문을 던진다. … 오늘날 음악이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통렬한 비평. ?패트릭 소어, 『데일리 텔레그래프』 엄청나게 재미있고 요익한 논쟁거리. ?에밀리 매케이, 『NME』 『레트로 마니아』의 최고 성취는 스스로 비판하는 문화적 질환에 전혀 일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전에 본 듯하고 들어본 듯하다는 의심에 지친 독자라도, 이처럼 다양하고 날카로우며 흥미로운 각도에서 레트로에 접근한 책은 읽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현재는 과거로 무너져 내리는지 모르지만, 이 책은 오랫동안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그레그 밀너,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