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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개는
솔밭 사이사이를 꼬불꼬불 기어오르는 이 고개는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욱신욱신 삭신이 아리도록 얻어맞고 친정집이 그리워 오르고는 했던 고개다 바람꽃에 눈물 찍으며 넘고는 했던 고개다 이런 시절에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어머니를 데리러 이 고개를 넘고는 했다 고개 넘으면 이 고개 가로질러 들판 저 밑으로 개여울이 흐르고 이끼와 물살로 찰랑찰랑한 징검다리를 뛰어 물방앗간 뒷길을 돌아 바람 센 언덕 하나를 넘으면 팽나무와 대숲으로 울울한 외갓집이 있다 까닭없이 나는 어린 시절에 이 집 대문턱을 넘기가 무서웠다 (중략) ---p. 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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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시인이기보다 혁명가로 살고 불리기 원했던 김남주는 그 바람대로 이제 뭇사람들의 가슴속에 진정한 시인이자 혁명가로 남았다. ‘불의 연대’ 80년대를 지나 자본의 세기가 찬란하게 만개했음에도 그를 ‘영원한 혁명가’ ‘한국의 체 게바라’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놀랍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고 10년이 되기까지, 험난한 시절을 산 탓에 정리되지 못한 김남주의 시편들을 찬찬히 모으고 가다듬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생전에 그의 시는 펄펄 살아 뛰는 무기로 사람들에게 각광받으면서 여러 권의 단행본과 선집·전집으로 나왔지만 옥중에서 밀반출된 시편들이 다수여서 대개 저자의 교정을 거치지 못한 채 책으로 묶였기 때문이다. 출감 후 저자가 개고 또는 개제(改題)하여 단행본으로 펴내기도 했으나 그전 단행본의 시편들은 그것대로 살아 있어서 혼란스러운데다 김남주 문학의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았다.
김남주 시인의 10주기를 기려 염무웅(廉武雄, 영남대 독문과) 교수가 엮은 『꽃 속에 피가 흐른다』는 편자가 생전에 고인과 맺은 오래고 특별한 우의(편자는 김남주가 1974년 여름 계간 『창작과비평』에 등단작들을 투고할 당시 이 계간지의 편집자였다)를 바탕으로 특유의 꼼꼼함을 발휘하여 그런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다. 김남주가 쓴 시가 470여편에 달하며 이 가운데 300편 남짓은 9년 3개월의 수감생활 중에 씌어진 것이고, 그의 단행본 시집들에는 중복수록 작품이 다수라는 것, 유고시집에 수록된 초기작 몇편의 발굴경위 등 흥미로운 사실들이 「발문」을 통해 밝혀진다. 이 선집이 가장 완벽한 판본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해도, “아직 실증적 차원에서 더 검토되어야 할 여지가 많”은 김남주 문학을 충실히 결산하여 그의 삶과 시세계의 전모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전6부 120편으로 구성된 이 선집은 크게 시인의 삶과 문학의 흐름을 따랐다. 1부는 이념적 뼈대를 갖추기 전의 소박하면서도 우렁찬 초기작들이 중심이다. 그 한 구절이 이 선집의 제목이기도 한 「잿더미」는 솟구치는 강렬한 이미지들로 읽는이의 가슴을 뛰게 한다. 2-4부는 민중적 현실인식이 잘 벼린 칼처럼 촌철살인의 통찰력에 실려 다가오는 옥중시편들이 주이며, 5부는 출감 후 실생활 속에서 겪는 고뇌와 결의를 다룬 시편들이다. 6부는 유고시집에서 뽑은 것들로 시인의 마지막 숨결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작고 10년, 오늘 다시 펼쳐읽는 김남주의 시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의 조건을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 성찰의 거울로 남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