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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서기 1000년을 조명하는 첫 시도
옮긴이의 글 | 과거를 통해 미래를 견제하려는 유럽의 노력, 그 산물 프롤로그 | 서기 1000년, 세계의 중심은 아시아였다 Ⅰ. 시간관 | 시간을 관찰하고 측정하고 관리하다 천 년 전의 밀레니엄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순환적인 시간과 직선적인 시간 위기와 불행의 시간은 따로 있다 시간의 조직화를 이룬 달력 천문학과 수학과 종교의 만남 시계의 발명이 가져온 시간의 역기능 Ⅱ. 문화의 전수 |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전하다 문자의 힘 92 덧붙이는 글: 부정과 왜곡 >> 문자기록 없는 아프리카 역사에 대한 오해 역사 속의 ‘곧은’ 붓(正筆)과 ‘휘어진’ 붓(曲筆) 1000년 전의 세계를 기록하다 서기 1000년의 예술적 풍요 Ⅲ. 농경문화 | 도시와 국가의 경제 기반을 이루다 정치제도까지 좌우한 농촌의 생활리듬 자연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얻어낸 생산물 물을 다스리기 위한 각별한 노력들 천대도 존중도 받지 않은 생산의 주역 조세 징수를 위해 국가가 농민을 보호하다 토지 남용과 인구 증가가 일조한 마야의 쇠퇴 Ⅳ. 도시와 도시인 | 농촌과 무역을 발판으로 성장하다 이름만큼 다양했던 도시의 형태 오늘날의 맨해튼보다 컸던 당시의 대도시 성곽에 둘러싸인 정치·종교·군사·문화의 중심지 농촌의 생산력에 기생한 도시경제 화폐의 발달로 강화된 국가의 영향력 수출용 도자기에서 선박까지 다양한 수공업의 발전 무역과 상업을 통한 부의 집중과 사채업의 등장 노동에 대한 이중적 태도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도시에 모이다 권력에 맞서기 시작한 시민들의 작은 움직임 사치와 궁핍이 공존하는 도시 생활 서기 1000년의 오락 문화 종이와 인쇄 발달로 가속화된 교육의 확산 종교의 위안과 합리주의의 필요성 도시와 국가 간 공생관계의 변화 Ⅴ. 통신과 무역 | 타문화 교류를 가속화한 통신과 교통의 발달 아시아가 주도한 국제화 움직임 이방인에 대한 환상과 오해들 타문화 교류의 물꼬를 튼 무역의 힘 수로 이용으로 활기를 띠게 된 대륙간 무역망 보석, 원자재에서 노예까지 다양한 상품들의 교역 신용거래 단계에까지 이른 화폐의 발달 의사소통, 사회통합, 신분상승의 중요한 조건 군사적 필요에 의해 가속화된 우편체계의 발전 전쟁과 외교와 무역의 절묘한 공존 다각도의 문화 교류로 이어진 종교 전파 놀이문화가 지닌 놀라운 파급력 소통수단은 여전히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Ⅵ. 지난 천 년 | 전쟁과 정복과 약탈로 재편된 세계의 판도 부록 | 서기 1000년 무렵의 한국 찾아보기 이 책의 저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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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도 이미 12세기 무렵에는 이민족들이나 다른 지방을 향한 모험심 넘치는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었다. 그리고 고딕시대가 되어서는 비로소 유럽 대륙에도 국제적인 성격이 확실히 도입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정확히 서기 1000년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추정되지만, 그런 발견은 사실 고도로 문화가 발달한 민족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북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린란드를 출발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북동부 지역에 도달했던 일명 붉은 에리히(Erich des Roten)의 아들인 레이프 에릭슨(Leif Eriksson, 970~1020)이라는 바이킹이었다. 이주를 시도한 사람들은 이들 말고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토착민들의 저항에 부딪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의 전설적인 무용담은 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075년에 와서야 아담 폰 브레멘(Adam von Bremen)이라는 사람 이 비로소 언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빈란드(Vinland)라고 불리던 아메리카 대륙이 정말 그 당시에 발견되었는지 여부는 오늘날에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뉴펀들랜드에서 발견된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적 유물들로 미루어보건대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것은 서기 1000년경으로 짐작된다. --- p.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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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서기 1000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이 이 질문의 정확한 의미를 우선 파악해야 하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고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시대를 계산하는 방법도 서로 달랐고 서로 다른 개념과 다른 측정 방식을 썼기 때문에, 만일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일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우선 시간에 관한 서로의 합의점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시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종교와 문명기원의 신화, 사회제도 즉 삶의 의미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단순하게 서로 시계를 비교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서기 1300년경에 기계적인 시계가 발명되면서 사람들은 도시 한복판에 솟아 있는 시계탑을 보고 비로소 공통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 근대 초기에 와서는 항해를 하는 데 필요한 정밀시계가 등장하면서 정확한 위치와 시간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지역적 시간제도가 확립되고, 훗날에 가서는 국제적인 시간체계도 확립될 수 있었다. --- p.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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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00년경의 농업체계는 근본적으로 보자면 상당히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흉작과 식량기근과 같은 위기는 늘 있어왔지만 이는 어느 정도 다양한 여러 체계들 가운데 일부분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심하게 변동을 보이는 이러한 현상들은 일상의 한 부분이었을 뿐, 근본적인 위협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서기 1000년 당시의 농업체계와 사회는 위기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다는 의미에서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흉작과 자연재해가 가혹한 운명이 가하는 타격을 의미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고통을 받았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당시의 이러한 사건들을 살펴볼 수 있게 자료를 남겨놓은 사람들은 중국의 행정관리들뿐이었다. 동쪽의 저장성 지역에는 송나라시대 전 기간에 국가적인 규모의 원조가 88차례나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318년 동안 이 지역의 주민들은 38차례의 기근과 54차례의 홍수, 37차례의 가뭄재해를 겪었다고 한다. --- p.259~2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