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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디스크

CD 1

  • 01 Dvorak : Cello Concerto in B minor op.104
  • 02 Dvorak : Klid (Silent Woods) for Cello and Orchestra op.68 No.5
  • 03 Dvorak : Slavonic Dance in E minor op.72 No.2
  • 04 Dvorak : Rondo for Cello and Orchestra op.94
  • 05 Dvorak : Humoresque in G flat major op.101 No.7
  • 06 Dvorak : Songs My Mother Taught Me

아티스트 소개 2

작곡Antonin Dvo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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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닌 드보르작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체코의 작곡가로,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의 보헤미안적인 민속 음악적 작품성 풍색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이다.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현재는 체코 공화국) 근처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나서,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드보르작은 즈로니체에 있는 외삼촌과 리마 선생이 부친을 설득한 보람으로 1857년 16세에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음악가가 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프라하에서는 오르간 학교에서의 교육보다도 학우이며 훗날의 지휘자 칼레르 벤달과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체코의 작곡가로,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의 보헤미안적인 민속 음악적 작품성 풍색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이다.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현재는 체코 공화국) 근처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나서,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드보르작은 즈로니체에 있는 외삼촌과 리마 선생이 부친을 설득한 보람으로 1857년 16세에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음악가가 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프라하에서는 오르간 학교에서의 교육보다도 학우이며 훗날의 지휘자 칼레르 벤달과 친교를 맺고, 재학 중부터 오케스트라에 가담하여 바이올린을 켜서 수확을 올렸다. 특히 그 오케스트라가 당시 명성을 얻고 있던 바그너를 영입하고 있던 관계도 있어 드보르작은 퍽 오래도록 바그너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바그너식의 오페라나 음악극의 체코판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바그너의 멜로디나, 특히 화성의 특징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받아들였다. 드보르작은 꽤 노력형이어서 학생시절부터 친척집에 기숙하면서 침식을 잊고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프라하의 일류 호텔이나 레스토랑에 출연하고 있던 갈레루 코므자크 악단에 가담하여 비올라를 켜게 되었으나 1862년에 체코인을 위한 국민극장이 건설될 때까지의 임시극장이 개관되어 악단과 더불어 이 극장 전속 오케스트라의 핵심이 되어 약 10년간 근속하였다. 1866년부터 스메타나가 이 극장의 오페라 감독에 취임, 자작의 오페라 등을 지휘하게 되었으므로 바그너, 슈베르트나 베토벤의 영향과 함께 스메타나의 민족주의적인 음악사상이 그의 작품을 채색하게 되었다. 드보르작은 오케스트라 동료들로부터 작곡 같은 것을 해서 무엇하느냐고 핀잔을 받았으나 묵묵히 작곡을 하였으며 특히 1861년(20세 때)부터 실내악의 대곡(작품 1의 현악 5중주곡)을, 또 1865년부터 교향곡(제1과 제2를 이해에)을 작곡한 것은 당시의 슬라브계의 민족음악의 작곡가들이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대체로 이와 같은 순음악보다도 표제 음악이나 오페라에 끌려 있던 것과 대조적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드보르작의 이러한 순음악에 대한 열정은 죽기 약 9년 전인 1895년까지 계속된다. 후기 낭만적 음악의 화성조직이나 색채적인 오케스트라의 사용법이라든가 그러한 개개의 기법에 이끌렸어도 고전적인 음악형식을 저버리려고 하는 그 무렵의 작곡계의 일반적인 경향에는 반대였고 새로운 고전주의를 목표로 한 점에서 독일의 대작곡가 브람스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 사실 브람스에게는 매우 총애를 받아 드보르작의 작품이 1877년 이후 베를린의 지므로크 음악출판사를 통해 출판되었고, 체코 이외의 나라에서 연주하게 된 것도 브람스의 소개로 된 것이었다.

브람스를 비롯하여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인 한스 폰 뷜로, 지휘자인 한스 리히터, 당시 빈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평론가 한슬리크 등 독일,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음악인 지위를 얻게 된 것도 드보르작의 명성과 작품을 세계적으로 만드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1884년 말 영국에도 9번 방문하여 영국을 위해 <유령의 신부> 및 <교향곡 제7번 D단조>를 쓰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국제인으로서 사는 것을 바라지 않고 끝까지 체코인으로 살아갔다. 빈으로 이주하도록 재삼 권유된 것을 거절한 것도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빈 정부에 대해 독립투쟁을 밀고 있던 동포들을 버리고 자신만 빈에서 안일하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1890년부터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과 그 밖의 것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1892년의 51세 때 뉴욕의 국민음악원의 원장으로 초빙되었다.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현악 4중주곡 <아메리카> 등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드보르작의 작품이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1894년의 여름 휴가로 귀국(이 때 피아노 독주곡, 8개의 <유모레스크>를 작곡했다. 그 중에서 7번째 곡이 바이올린으로 편곡되어 유명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가기가 싫어졌지만 일단 돌아가서 결국 다음해 봄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오래도록 미국에 머물러 있을 것을 바라는데도 불구하고 계약을 중도파기하고 귀국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슬라브풍의 음악에 흑인과 인디언의 멜로디를 조화하며 작곡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귀국 후 만년의 약 10년간은 일반 민족주의 음악의 작곡가와 같이 오페라와 교향시에 주력하여 <루살카>(1901 초연)와 같은 귀여운 오페라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력이 그 정상에 달한 것은 이 이전, 특히 도미 직전인 수년간으로 추측된다. 피아노 3중주곡 <도무키>(1890-1891)가 그 좋은 한 예이듯이 종래의 독일류의 음악형식에 구속되지 않은, 슬라브인의 변화와 대조를 좋아하는 민족성에 한층 잘 맞는 새로운 형식적 질서를 낳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01년엔 빈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귀족이 되었고, 같은 해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이 되기도 한, 독립 전의 체코의 문화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받은 뒤 1904년 뇌일혈로 사망, 국장으로 모셔졌다.

드보르작은 이른바 귀재형의 음악가는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평범 속에 위대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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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Yo-Yo 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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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마,馬友友 ,Ma Youyou

프랑스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 첼리스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아버지 마샤오쥔(馬孝駿)과 성악가인 어머니 마리나 루(盧雅文)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요 마는 바이올린, 그 다음엔 비올라, 그리고 첼로를 배웠다. 요요 마가 일곱살 때 그의 가족은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레너드 로즈에게 배웠다. 이듬해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텔레비전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아이작 스턴과 카네기 홀에서 함께 연주하는 등, 미국 전역에서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1972년부터 말보로 음악제, 아스펜음악제 등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1977년부터는 유
프랑스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 첼리스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아버지 마샤오쥔(馬孝駿)과 성악가인 어머니 마리나 루(盧雅文)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요 마는 바이올린, 그 다음엔 비올라, 그리고 첼로를 배웠다. 요요 마가 일곱살 때 그의 가족은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레너드 로즈에게 배웠다. 이듬해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텔레비전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아이작 스턴과 카네기 홀에서 함께 연주하는 등, 미국 전역에서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1972년부터 말보로 음악제, 아스펜음악제 등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1977년부터는 유럽으로도 연주 활동의 폭을 넓혔다.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 등 최고의 악단과 협연한 그는 1978년에는 잘츠부르크와 루체른 음악제에도 출연했다. 워낙 어린시절부터 연주해 왔기에 그의 연주 활동 경력도 40년이 가까워진다.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는 음반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첼리스트 중의 한사람이라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솔리스트로서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으며 실내악 연주도 활발히 하였다. 김영욱, 엠마누엘 액스와의 트리오 활동부터 아이작 스턴, 제이미 라레도, 초량린, 리처드 스톨츠만 등과 파트너십을 이루며 실내악 활동을 하였다. 2012년 폴라음악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 줄리어드 스쿨 음악학교
- 하버드 대학교 인문학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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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매일
2004년 09월 17일
시간/무게/크기
크기확인중

전문가 리뷰

드보르작
데이비드 포일 / (번역·글: 정준호)
한 세기 전 파란만장한 인생을 끝마쳤을 때 드보르작은 고작 63세였다. 다행히 명성은 오랜 세월을 이어 갔고, 그와 같이 만년에 동료로부터나 청중에게 깊은 존경과 애정을 받은 작곡가는 많지 않다. 2004년 온 세계가 1904년 5월 1일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난 작곡가의 100주기를 기린다. 지난 100년 간 드보르작에 대한 평가에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존경과 애정이 더욱 커지고 심오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1895년 초에 뉴욕에서 완성되어 이듬해 런던에서 초연된 <첼로 협주곡 B단조, Op 104>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이 곡은 모든 첼로 협주곡 중에서 가장 유명하며, 드보르작에게 호의적이지 않던 비평가도 걸작이라 평가했다. 드보르작은 동시대 작곡가들에 비해 첼로가 가진 잠재력과 표현력을 깊이 이해했던 듯하다. 이런 느낌은 요요 마가 이 음반에서 들려주는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매혹적인 소품 <고요한 숲>에서 더욱 분명하다. 만년의 브람스가 드보르작의 새 첼로 협주곡의 스코어를 연주해 보고는, 친구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일찍이 자신이 첼로의 가능성을 깨닫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이 기념 앨범에는 드보르작이 첼로를 위해 편곡한 세 개의 다른 소품이 포함되어 있다. 둘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곡(<슬라브 춤곡 2번 E단조, Op 72>와 <위모레스크 G플랫 장조, Op 101>로 이차크 펄먼이 함께 했다)이고 하나는 피아노 반주 곡(<집시 멜로디, Op 55> 중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노래'로 원래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편곡한 곡이다)이다. 선율은 고상하다. 드보르작의 유려한 특징은 첼로로 연주될 때 미묘한 차이가 있다. 협주곡뿐 아니라 여러 다양한 실내악에 이르기까지, 요요 마는 평생 동안 안토닌 드보르작의 음악을 연구하고 연주했다. 이러한 친밀함의 바탕에는 경이로움, 변함없는 애정, 존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요요 마의 연주는, 1922년 드보르작의 미국 시절 친구이자 동료였던 빅터 허버트가 표현했던 그 '따스함'을 담고 있는 듯하다. "우리 모두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친절하고 상냥했으니까요. 그의 크고 아름다운 눈은 빛을 발하는 따스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린이처럼 꾸밈없고 자연스러웠습니다. 그가 우리를 떠났을 때, 우리는 뉴욕의 음악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한 거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존경스럽고 사랑스러운 친구를 잃었습니다."



첼로 협주곡 B단조, Op 104

<첼로 협주곡>은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나 <현악 사중주> '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드보르작의 미국 체류 기간 중인 1894년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신세계 교향곡>이 그런 것처럼 인디언이나 흑인 영가의 멜로디를 직접 차용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신대륙의 활력과 기상이 구대륙의 깊은 전통과 어우러져 있을 뿐이다. 작곡가가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관을 보고 악상을 적었다는 일설도 있다. 슈만이나 생상스 등의 협주곡을 능가하는 낭만주의 최고의 협주곡으로 브람스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오페레타 작곡가 빅터 허버트의 <첼로 협주곡 2번>을 듣고 영향을 받아 수정했다는 의견도 있다. 1896년 런던 필하모닉 협회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와 영국 첼리스트 레오 스턴의 독주로 연주되어 대성공을 거뒀다.



고요한 숲, Op 68-5

<첼로 협주곡>과 함께 가장 유명한 드보르작의 첼로 음악이다. 원곡은 1884년 완성한 피아노 연탄을 위한 여섯 개의 모음곡 <보헤미아의 숲으로부터> 중 다섯 번째 곡이다. 1891년 작곡가와 그의 친구인 첼리스트 하누스 위한의 순회 리사이틀을 위해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로 편곡했으며, 1893년 미국에서 다시 첼로와 관현악 반주를 위한 음악으로 다시 태어났다. '느리게 노래하듯이'라는 지시어에서도 보듯이 체코의 젖줄인 블타바강의 수원이 시작하는 울창한 숲의 술렁임이 잘 묘사되어 있다.



슬라브 춤곡 2번 E단조, Op 72

드보르작의 <슬라브 춤곡>은 브람스의 <헝가리 춤곡>의 영향을 받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것으로 작곡되었으며, 이후 작곡가 자신이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의 각 여덟 곡이 있으며, 여기 실린 의 2번은 슬라브 춤곡인 '소세츠카'의 음형을 띄고 있는 감미로운 곡이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듯한 주제가 밝은 표정으로 바뀌고, 이어 마주르카의 특징을 보이는 선율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오스카르 모라베츠의 바이올린과 첼로, 오케스트라를 위한 편곡이 연주되었다.



위모레스크 G플랫 장조, Op 101

원곡은 피아노 독주를 위한 여덟 개의 모음집이지만, 그 중 이 하나만이 주로 연주된다. 드보르작이 1894년 체코로 귀국한 직후, 미국 시절의 스케치를 가지고 작곡했다.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 편곡도 유명하며 여기서는 역시 모라베츠의 편곡이 사용되었다.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노래', <집시 멜로디, Op 55> 중

일곱 개의 연가곡집 중 네 번째 곡으로, 드보르작은 보헤미아 시인 아돌프 헤이두크가 독일어로 쓴 시에 1880년 곡을 붙였다. 드보르작의 가곡 중 가장 유명한 곡으로 가사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 내게 노래를 가르쳐 주실 때 눈물을 흘리셨건만, 이제는 내가 같은 노래를 가르치며 눈물을 흘리네."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을 위한 편곡을 요요 마가 첼로로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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