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독자에게
제1서가 미셸 우엘벡_지도와 영토, 복종 밤하늘에 솟구친 불꽃처럼 제2서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_거꾸로, 저 아래 심장이 얼어붙는 아름다움 제3서가 이언 매큐언_체실비치에서 소설 기계의 시대에 관한 질문 제4서가 존 파울즈_프랑스 중위의 여자 맥주를 마시며 소설을 읽는 시간 제5서가 프랑수아즈 사강_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타인이 꿈꾼 세계를 엿보며 제6서가 도리스 레싱_19호실로 가다, 금색 공책 환멸과 몰락 제7서가 아니 에르노_세월 우린 아직 혼란 속에 서 있다 제8서가 줄리언 반스_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원히 미쳐 있는 세계 제9서가 김시습_금오신화 이 몸이 본디 환상이거늘 제10서가 어니스트 헤밍웨이_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길 잃은 친구와 함께 걷기 제11서가 나쓰메 소세키_산시로 차가운 도시의 골목길을 서성이며 제12서가 필립 로스_에브리맨 행복한 엔딩을 원하는 독자에게 참고문헌 에필로그 |
신경진의 다른 상품
|
『지도와 영토』에는 예술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소설 곳곳에 지뢰처럼 파묻혀 있다. 이 폭발물이 터질 때마다 나는 밤하늘에 솟구친 불꽃을 바라보듯 감탄했다.
-- p.24 미셸 우엘벡은 삶의 균형감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어떻게 그토록 확신할 수 있는지는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소설이라는 예술 형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소설의 구조적 형식미는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영역인데,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정확히 할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엘벡의 소설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형식의 균형미를 느끼게 된다. 주인공들의 삶이 혼란에 빠져 휘청댈수록 소설의 형식은 균형을 갖추게 되는 것이 보면 볼수록 놀랍다. -- p....) 우엘벡은 이 ‘형식미를 구축’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작가다. -- pp.25-26 책을 읽는 행위는 이제껏 가보지 못한 영토를 방문하는 일과 유사하다. 그래서 위험하다. 지도가 있다면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유일한 위안이다. -- p.26 나는 이 서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책장이 너무 깔끔하게 정리가 잘되어 있지 않은가!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게 하는 단정함이다. -- p.27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동안 읽은 소설을 통해서 그의 책장을 채우고 있는 책들을 유추해낼 수 있다. 작가의 텍스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엘벡은 골방에 틀어박혀 선배와 동료 작가들이 쓴 책을 읽고 자신만의 소설을 완성했다. 인류의 모든 텍스트는 이런 식의 재공정 과정을 거쳐 나온다. 따라서 한 작가가 무엇을 읽었는지는 그의 텍스트에 지문처럼 남아 있어서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 -- p.29 나는 소설에서 언급된 책들이 제드의 책장뿐만 아니라 작가인 우엘벡의 책장에도 꽂혀 있으리라 믿는다. ‘무엇을 읽어야 할까?’에 대한 확실한 답은 사실 작가들의 책 속에 광맥을 이루어서 파묻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가 생산한 위대한 지적 유산들을 모두 게걸스럽게 먹어 치울 수는 없다. 한정된 시간만이 허락된 개인은 선택의 여지 없이 독서에서 편식을 해야만 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 편식이라는 조건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리고 찾아낸 방법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장을 훔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p.30 작가들은 아무리 노력해봐야 거기까지는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과 마주치기 마련인데 내게는 『거꾸로』가 바로 그런 소설이었다. -- p.38 『거꾸로』는 출간 이후 세기말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염증을 느꼈던 데카당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만약 이 세계가 지옥이라고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거꾸로』를 읽어야 한다. -- p.44 미란 결국 인간을 소외시킨다. 아름다움을 좇는 것은 연금술에 도전하려는 욕망보다 백배는 더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거꾸로』는 출간 이후 세기말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염증을 느꼈던 데카당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만약 이 세계가 지옥이라고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거꾸로』를 읽어야 한다. -- p.44 소설은 이야기이면서도 이야기가 아니라는 역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범적인 작품이 『체실비치에서』이다. 정상급의 프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 특출난 능력을 독자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매큐언은 이 점에서 거의 실수가 없다. 그는 소설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숨겨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작가다. -- p.66 『체실비치에서』를 통해 이언 매큐언은 독자에게 ‘당신은 시대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라고 정중하게 질문하고 있다. 알레고리가 저변에 깔려 있어 소설을 상대적으로 많이 읽지 않은 독자들은 애초에 이 질문을 발견하지 못한 채 오직 주인공들의 감정적 실패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해서는 『체실비치에서』를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에드워드의 실패는 현대 지성의 실패이고 역사 발전을 믿는 진보 진영의 실패다. 내가 이언 매큐언은 귀신이 아닐까, 의심했던 것은 그가 이 거대 담론을 작은 이야기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 p.71 이언 매큐언의 책장에서 훔칠 책은 못해도 수백 권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독서 편력을 17편에 이르는 소설에 흩뿌려 놓았다. 그래서 정리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매큐언은 2012년에 『스위트 투스』를 써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첩보와 추리, 장르 소설의 얼굴을 차용하고 있지만, 실상 현대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독창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다. -- p.73 확실히 매큐언처럼 좋은 작가는 심미안도 좋다. 그는 소설을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도구로 이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작가다. 그러면서도 그는 흥미를 기대하는 독자들의 요구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 균형을 유지하기란 실로 어렵다.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소설도 변화하고 있다. 만약 현대소설이 어떤 진화의 과정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놓쳐서는 안 된다. -- p.181 이언 매큐언은 『체실 비치에서』를 써서 우리가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잃게 되는지 순수한 관조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실증주의 소설을 쓰는 그는 형이상학자인 쇼펜하우어의 초월적 세계를 부정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을 읽으면 존재의 심연 속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 pp.78-79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과는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이 세계의 룰이다. 나는 불현듯 갈증을 느껴서 마트에 들어가 차가운 맥주를 샀다. 집으로 돌아가서 식탁에 앉아 맥주와 땅콩을 펼쳐놓고 예전처럼 존 파울즈의 길고 두꺼운 소설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행위는 고립 속에서 연대감을 확인하는 일이다. 몰라도 여태껏 전 세계 수백만 명이 존 파울즈의 소설을 읽으며 맥주를 마셨을 것이다. 이 즐거움을 모르고 사는 인간은 불행해지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 그런지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첫 페이지를 펼쳐보면 알게 된다. -- pp.100-101 나 역시 게오르그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정의한 소설의 역사적 의미에 공감한다. 그러나 창작의 영역에서 소설을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도식적으로 판단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여성주의 소설의 확산을 내세우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한 개인의 혼란스러운 역사를 읽는 것으로 의미를 집중하는 쪽이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를 더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p.110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는 최근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소설로 독자에게 소개되고 있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소설은 무심한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여성주의’가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가히 페미니즘 소설의 백미, 혹은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보여준 레싱의 소설 작법에 더 관심이 끌렸다. 압도적인 도입부, 흥미로운 플롯, 독자의 감정을 흔드는 묘사와 서술, 삼인칭 작가의 적절한 개입, 사실주의의 불편한 교훈과 망상, 자본과 물질적인 삶에 대한 환멸과 지성의 몰락에 대한 주제 의식 등, 모든 요소가 완벽한 단편소설이다. -- p.123 그녀의 빛나는 지성은 하나의 성이라는 편협한 한계를 벗어나 보편성이라는 드넓은 하늘로 솟구친다. 내가 작가들의 서재 혹은 작업실에 주목한 것은 도리스 레싱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책장에 마음을 빼앗겼다. -- p.126 에르노의 말처럼 우리는 조부모와 부모, 형제, 자매, 친구와 같은 운명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모든 과거의 장면은 사라지고 세계에는 낯설고 이질적인 새로운 미래의 형상만 남게 된다. 남은 것은 오직 한 인간의 망상과 기억뿐이다. 이 실패의 현장을 기록하는 것이 소설이다.아니 에르노는 80년대 후반, 마흔을 넘긴 나이에 68혁명의 실패를 담담히 추억한다. -- p.149 소설을 읽으면 허무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의외로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되묻고 싶은 욕망을 억누른다. 당신은 이 허무한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떠맡았느냐고, 단 한 번이라도 시대와 공동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소설을 읽는 행위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여성주의 문학은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앞으로 남겨진 시간 동안 내 책장에 페미니즘 소설들이 들어찰 것을 예감한다. 해안으로 밀려드는 파도를 한 줌의 모래로 막을 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난 세계에서는 평등주의의 이상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꺾인 것은 개인의 의지일 뿐이지 실체적 진실은 아니다. 한국 문학에서도 프랑수아즈 사강과 도리스 레싱, 아니 에르노와 같은 걸출한 작가들이 등장해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작가들의 책장 훔치기』 퇴고 막바지에 스웨덴에서 핵폭탄이 터졌다. 작가 한강이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충격적인 일이다.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다음에 기회가 주어지면 ‘한강의 책장 훔치기’에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 pp.149-150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드러난 결말의 충격적인 반전은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우리는 마치 삶을 이해하고 있는 듯 태연하게 살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삶의 실체적 진실을 들여다보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체의 핵심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혼란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는 게 이 소설의 결말이다. -- p.156 그의 책장은 마치 현대의 교양과 지식을 대변하듯 질서정연하다. 동시에 까칠한 그의 심미안을 잘 보여준다. 그의 독서 편력은 광범위하고 자로 잰 듯 정확하다. 또한 유쾌하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줄리언 반스는 주인공 토니와 세 친구를 묘사하면서 독서 편향으로 각 캐릭터의 특징을 잡아냈다. -- p.165 그의 질서정연한 책장에서 뽑아낼 단 한 권의 책은 흔들림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귀스타브 플로베르다. 줄리언 반스는 내게 조금은 얄미운 태도로 질문한다. “플로베르를 모르면서 소설을 이해했다고?” -- pp.165-166 짧은 내 삶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어준 건 소설밖에 없었다. 소설은 인간의 생애를 다루는 장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여기에는 나보다 앞서 고민한 선배들의 발견이 큰 도움이 되었다. -- p.271 그렇다. 독자들은 행복한 결말을 원한다. 훼손된 세계에서 벌어지는 문제적 개인의 길 잃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소설은 실패의 기록이야. 어쩔 수 없지.” 아내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아니, 그렇지 않아. 소설은 ‘실패한 꿈에 대한 기록’이야. 단순한 실패가 아니야.” 나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소설은 실패한 꿈에 대한 기록이다. 인류가 근대사회에서 발견한 이상, 휴머니즘과 유토피아를 향한 꿈, 국민국가와 자본제 생산양식이라는 억압적인 구조에서 좌절한 개인과 집단의 실패를 기록하는 예술 장르가 바로 소설이다. -- p.286 내 상상의 책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무엇을 가장 먼저 읽을지 고민이 될 뿐 좌절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다. 도저히 실패할 수 없는 도전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바로 그런 기쁨을 누리는 일이다. -- p.289 현대문학은 시대의 유행과 변화에 따라 크게 요동치는 영토이다. 애초에 올바른 지도를 제작하는 게 불가능한 분야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시도를 한 것은 나름의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과 소설을 좋아해서 어떻게 하면 한정된 시간 내에서 효율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 소설가가 되고 사람들 앞에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는 자연스럽게 이 고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내가 내린 최종 결론은 여전히 ‘불가능하다’이지만 이 과정에서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 나름의 불완전하지만, 효용성을 지닌 지도를 갖게 되었다. 아마 이 지도는 오류투성이에 치명적인 결함을 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 pp.294-295 |
|
이 시대의 걸출한 작가들은 어떤 책을 읽을까?
거장의 서재에 자리잡은 책들을 읽으며 내가 이어 쓸 이야기의 입구를 찾는다 작가 신경진은 난생처음 완성하여 발표한 첫 소설로 세계문학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생겨났다.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로드맵이 없고 무엇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무르익지 않았다는 생각에 막막해졌다. 이제부터 그 길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는. 텅 빈 주머니 속에 시린 손을 넣는 기분으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다. 새로 읽음과 동시에 처음 읽는 사람들의 가이드를 자처해 해설을 하며 자기만의 서가를 꾸준히 채워나갔다. 그러다 어느날 탁월하다고 느껴지는 작가들과 그들이 읽어온 책들을 탐구해 온 여정을 소개해 달라는 어느 어리숙한 편집자의 주문을 받게 된다. 그는 단숨에 써내려간다. 『작가들의 책장 훔치기』는 어느날 갑자기 소설가가 된 저자가 소설문학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여행한 시간들 속 반짝이는 장면들을 캡처해 모든 한 권의 앨범과도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과 세계문학이라는 보편공간을 겹쳐낸 이 독특한 이야기의 오솔길에는 독자가 자신의 발걸음을 겹쳐 읽을 수 있는 시공간의 지표가 풍성하게 제공된다. 『작가들의 책장 훔치기』는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서가에서 시작한다. 예술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가득한 『지도와 영토』로부터 출발하는 이 여정은 마지막 챕터인 필립 로스의 서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미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놓지 않는다. 한 작가의 서가를 탐색할 때마다 그가 참조한 작가를 찾아내고, 때로 다른 작가의 서가로 훌쩍 건너뛰기도 한다. 그렇게 낯설고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비장함이나 무거움과는 거리가 멀어서 독자도 가벼운 산책을 따라나서듯 지치지 않고 따를 수 있다.. 작가들의 서가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인생의 장면들을 그려내 보여주며 문학과 삶을 나란한 현존으로 구성해내는 저자의 솜씨는 또다른 미학적 차원을 구성한다. 어느날, 깨어보니 작가가 되었고, 이 낯선 상태에 어리둥절한 채로 일면식도 없는 작가들의 서재를 꾸준히 탐색해 온 저자의 시간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은 실존적 몸부림일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이 그려놓았듯이 어느날 깨어나 보면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한 마리 벌레가 되어 있고, 벌레가 어떤 존재인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알아내야 하는 동시에 그런 채로 살아가야 하는 방법론의 문제를 안고 몸부림친다. 어쩌면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라는 루카치의 문장에 섬뜩한 고독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세계를 자신이 구축해 갈 수밖에 없고 그 몸부림이 무용한 것일지라도 이 단단한 세계에 새로운 차원을 여는 조그마한 금이라도 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가들은 글을 쓴다. 『작가들의 책장 훔치기』는 저자 신경진이 읽은 책 속에서 발견한 틈 속을 비집고 자기에게만 열리는 문을 열어 그 속으로 걸어가 본 자신의 여정을 소개하는 책이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독자들도 자기에게만 열리는 그 문을 발견하기를 기대하면서. ‘함께 읽어보지 않을래요?’ 하고 유혹하지만 그 여정에서 자기 지도는 자기만이 그릴 수 있는 것임을 전제한 채로. 이언 맥큐언의 서가에서 저자는 존 파울즈와 도리스 레싱으로 가는 문을 연다. 그렇게 하나의 소설에 뒷배경으로 자리하는 서가의 책들을 들여다보면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책들의 목록이 나온다. 미셸 우엘벡과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줄리언 반스는 보들레르의 책을 가리키고 있다. 미셸 우엘벡과 도리스 레싱, 아니 에르노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필립 로스는 도스토옙스키의 방에 함께 있다. 이언 맥큐언과 필립 로스는 존 업다이크의 서가에서 마주치곤 한다. 존 파울즈, 아니 에르노, 필립 로스는 카프카를 사랑했다. 존 파울즈와 프랑수와즈 사강은 스콧 피츠제럴드를 좋아했으며. 프랑수와즈 사강과 줄리언 반스는 카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와 프랑수와즈 사강, 아니 에르노, 줄리언 반스, 필립 로스는 플로베르의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와 프랑수와즈 사강, 도리스 레싱은 스탕달의 책을 빌려서는 영원히 반납하지 못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필립 로스는 제임스 조이스를 좋아하여 어느 우주에서인가 만나 끝나지 않는 토론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작가들은 시대와 장소를 제각각 달리하여 나타나지만 어떤 별빛은 함께 끌어안고, 어느 하늘에서는 서로를 끌어당기고, 원고지 위에서는 서로를 밀어내며 자신만의 빛을 조율해 나간다. 문학이라는 우주에서는 수시로 크고 작은 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샛별처럼 떠올랐다가 어느날 자취를 감춘다. 8차선 고속도로를 나란히 달리다가도 막다른 골목에서 전진도 후진도 안 되는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세월이라는 교차로를 지나고 신호등 앞에 멈춰 서면서 서서히 질서를 이루어나가는 듯 하다가도 어느날 나타난 새로운 눈동자 속에서는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만다. 그가 책을 읽으며 상상한 어떤 장면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나는 앞으로 남겨진 시간 동안 내 책장에 페미니즘 소설들이 들어찰 것을 예감한다. 해안으로 밀려드는 파도를 한 줌의 모래로 막을 수는 없다. (?) 한국 문학에서도 프랑수아즈 사강과 도리스 레싱, 아니 에르노와 같은 걸출한 작가들이 등장해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150쪽) 클래식이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독자가 나타나는 순간 언제든지 처음부터 다시 줄을 서야 하고 헤쳐 모였다가도 다시 멀어져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다. 그 속을 탐험하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수시로 새로 쓰여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오늘의 이 세계는 지금 시작하는 시도의 일부가 모인 것일 뿐. 그 속에서 당신은 어디쯤 가고 있는가, 누구와 어떻게 겹쳐 있는지, 또 어떻게 독립적일 것인가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