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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部
발등을 밟았다 걸음을 멈추고 두 장례(葬禮) 山과 땅 속으로 거금 15만圓 5部 보리팰 무렵의 개가(凱歌) 가을의 연극(演劇) 청산리(靑山里)와 샛노루바우 자치(自治)도 안 돼 제 발로 걸어서 낮과 밤 어둠이 짙어 가고 그 뒤에 올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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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를 먼저 사기로 했다. 그리고는 쇠고기를 살 생각이었다.
돼지고기는 중국 사람이 외바퀴 구루마에 싣고 다니며 파는 게 값이 싸다. 붐비는 장꾼들 틈에서 쌍가매는 쉽게 돼지고기 외바퀴를 찾을 수 있었다. “한 근 게바(달라는 중국말).” “한 근?” 탐탁지 않은 눈치였으나 중국 사람은 그 이상 아무 말 없이 칼을 집었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엄청나게 큰 칼이었다. 낮에 나온 반달이 연상되었다. 자루가 따로 달려 있을 뿐, 그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 칼로 썩, 구루마 위의 고기를 볐다. 저울에 달았다. 많도 적도 않은 모양, 그대로 신문지에 싸 주었다. “조금 더 놓소.” 고기 사는 여인네들이 의례건 하는 버릇대로 쌍가매는 말했다. 힐끔 중국 사람이 쌍가매를 쳐다보았다. 아니꼽다는 표정, 무어라고 볼멘소리는 했으나 가죽이 붙은 비게 한 꼬투리를 잘라 던지듯 주는 것이었다. 받지 않았다. 비게는 땅에 떨어졌다. (이거는 개진가?) 욱 치밀었으나, 싸울 생각은 없었다. --- p.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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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 이한복은 월강(越江)이 금지되어 있는 두만강 건너편 북간도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 어느 날 밤, 몰래 감자를 가져온 그는 관가에 잡혀가 신관 사또에게 가벼운 태형을 맞고 풀려난다. 사또는 백두산정계비를 확인하고, 정부의 묵인하에 조선인들은 떼를 지어 간도로 이주한다. 손자 창윤이 청인 지주의 밭에서 몰래 감자를 캐다 잡혀 변발을 당한 채 청국인의 모습을 하고 돌아온다. 이한복은 손자의 머리를 자르다가 분함에 쓰러져 죽고 만다.
제2부 : 청국에서는 조선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차츰 토지 문제 때문에 청국인과 마찰이 심해진다. 조선인 대표는 차츰 청국인 지주 동복산의 심복으로 행세하며 지주의 송덕비를 세우기에 이른다. 창윤은 이들이 건립하려던 송덕비 비각을 불태우고 용정으로 도망가서 사포대(私砲隊)에 지원한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9년 간도협약을 체결되면서 간도 이권을 청에 넘겨주고 조선인들은 유랑민 신세가 된다. 제3부 : 사포대 탄압이 심해지자 창윤은 고향으로 잠시 돌아왔다가 다시 용정으로 가서 기와 굽는 일을 하고, 아들 정수는 신명(新明)학교에 다니면서 신학문을 배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1919년 3월 초순 용정에서 각 학교 주민들이 모여 3.1 만세 시위를 벌인다. 제4부 : 창윤은 비봉촌에 정착해 살며 독립운동을 하는 정수가 무사하기를 빈다. 정수는 홍범도 장군의 부대에 들어가 청산리 전투, 샛노루 바위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사살하는 등 전공을 세운다. 전쟁터에서 창덕은 정수를 만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김좌진 장군이 이끈 청산리 전투에서는 조선인이 승리를 거두나 일본은 이에 보복하기 위해 양민을 학살하고 그 와중에 영애의 아버지도 죽는다. 제5부 : 점차 일본군의 탄압이 심해지자 정수는 중국계 학교에 조선어 선생으로 취직한다. 집으로 돌아온 정수는 어머니 쌍가매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설득과 애인 영애의 권유로 결국 자수를 하고 5년형을 선고받는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정수는 감옥에서 출감하고 아들을 기다리던 창윤은 그 사이에 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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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역사 속 공간으로서 간도를 다룬 소설 『북간도』
조선 말기, 계속된 가뭄으로 먹을 것이 궁해진 국경지대 조선 농민들이 ‘월강죄’라는 국법을 어기고 먹을 것을 찾아 간도땅을 넘나드는 것으로 소설 『북간도』는 시작한다. 민족적 리얼리즘 작가로 평가받는 안수길은 이 북간도를 배경으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주해야 했던 이주민의 역사와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인으로 남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여야 했던 그들의 고된 삶, 그리고 애환을 그리고 있다. 특히 저자는 18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간도가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일본에 의해 <간도협약>이 체결된 과정을 마치 역사가가 쓴 것처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또한 조선의 변방에서 북간도로 이주하여 살다 간,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간도를 개척하고 목숨처럼 땅을 지켰던 농민들의 삶을 통해 조선인이 나라를 잃은 망국민이 되면서 겪어야 했던 역사를 말하고 있다. 곧 구체적인 역사 사건들을 토대로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캐려고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북간도』는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도 높지만,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소설로 풀어놓은 역사적 기록물로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 당시 함경 이북의 간도 방언을 그대로 옮기고 있어, 지금은 잊혀진 그 지역의 사투리를 되살려냈다. 왜 지금 『북간도』인가? - 재출간의 의의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로 인해 각계에서 간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중국이 역사 왜곡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그 땅에 대한 영유권일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역사에서는 잊혀져 있었던 땅, 간도에 중국이 관심을 갖고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도는 옛날부터 토지가 비옥하고 광물이 많이 매장돼 있으며, 어업자원과 산림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 한국과 중국, 러시아 3국의 경계선이 맞닿아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러한 간도가 어느 나라에 귀속되느냐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현재 간도의 귀속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국제조약이 있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가 처음으로 국경 문제를 의논해 합의하고 세운 것이 바로 백두산정계비이다. 이후 조선인들은 비옥한 토지, 간도의 존재를 알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황무지를 개척했다. 청나라가 이 간도 주민들을 자국민으로 편입하려 하자, 만주에 진출하려는 야욕을 갖고 있던 일본은 조선을 배제한 채 중국과 1909년 간도지역을 중국에 넘겨준다는 내용의 간도협약을 맺었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간도협약이 당시 조선이 외교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맺은 조약이므로 무효라고 말한다. 또한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맺은 카이로 선언 등에 따라 일본이 점령했던 지역이 해방된 것처럼 간도 역시 원래대로 되돌아가야 했으나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환원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라고 한다. 5년 후면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되지만 지금도 간도의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 간도는 누구 땅이었나? “이 지역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으로 조선,청 대표가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쓴 것에서 보듯 조선국은 간도 조선인 보호용으로 두만강 인근에 변계경무서를 설치했고 1902년엔 간도관리사 종3품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했다.” - 조선일보 기사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