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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문 / 06
· 머리말 / 10 제1장 근대 민족자본 형성과 식민경제(1900~1940년대) / 19 제1절 광주읍성과 근대도시로의 발돋음 / 21 1.1 전라남도 관찰부 광주로 이전 / 21 1.2 일본인 진출과 충장로 상권의 형성 / 24 제2절 일제강점기 광주지역 경제 개요 / 27 2.1 1900~1920년대 광주경제현황 / 27 2.2 1930~1940년대 광주경제현황 / 33 2.3 광주 무역현황 / 34 제3절 일제강점기 금융 현황 / 37 3.1 광주농공은행의 설립과 영업활동 / 37 3.2 광주지방금융조합 / 39 3.3 호남은행 / 39 3.4 식산은행 광주지점 / 44 제4절 광주상공회의소 창립 / 44 제2장 전시경제 체제와 공업화 초기(1950~1960년대) / 49 제1절 해방과 1950~1960년대 경제상황 / 51 제2절 공업화 시작과 산업화의 기틀 마련 / 61 제3절 아시아자동차 공장 설립 / 64 제4절 광주공업단지조성 / 66 제5절 광주연초제조창 유치 / 69 제6절 광주은행 설립 추진 / 70 제7절 경제개발의 소외와 이촌향도(離村向都) / 71 제3장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광주권 생산도시화운동(1970~1980년대) / 79 제1절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도약하는 전환점 / 81 제2절 중화학공업 체제의 완성 / 84 2.1 3저(低) 호황과 고도성장 / 84 2.2 대외개방 압박 가중 / 87 2.3 88서울올림픽 계기로 민주화 요구 봇물 / 91 제3절 1단계 광주권 생산도시화운동 전개 / 94 제4절 본촌·송암공단 가동 / 99 제5절 하남공단 착공 / 108 제6절 직할시 승격 서해안시대 거점 부상 / 109 제7절 2단계 광주권 생산도시화운동 전개 / 117 7.1 ‘광주생산도시화 촉진의 해’ / 117 7.2 광주지방 생보사 설립 추진 / 124 7.3 500개 중소기업 창설 추진 / 125 7.4 한남투자신탁 발족 추진 / 125 7.5 광주무역센터 건립 및 제2직업훈련원 개원 추진 / 126 7.6 광주첨단과학산업연구단지 특별법 제정건의 / 127 제4장 고도성장 후유증과 개발소외 극복 노력(1990~1999년) / 129 제1절 “무한경쟁시대, 우물 안을 벗어나자” / 131 제2절 “공장 지을 인프라가 필요하다” / 137 제3절 덕산그룹 부도 / 138 제4절 IMF여파 주요기업 부도 도미노 / 140 제5절 “나라 살리자” 금모으기 운동 동참 / 142 제6절 “실직 벗어나자” 몸부림-실업극복위원회 / 145 제7절 “미래 먹거리 찾자”-첨단산업과 SOC확충 / 147 · 사례 연구: 첨단과학산업단지의 실증분석 / 149 · 진단과 제언: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세제지원 제안 / 196 제5장 밀려드는 세계화 충격과 서남권중핵도시 부상 몸부림(2000~2009년) / 205 · 진단과 제언: 광주경제의 회고와 전망 - 경제전반과 제조업분야를 중심으로 / 210 제1절 알짜 ‘한국전력’ 광주·전남혁신도시로 유치 / 218 제2절 광주시청·전남도청 청사 이전 / 220 제3절 불완전한 KTX 개통과 36년 걸린 호남선복선화 / 221 · 진단과 제언: 철도교통과 광주역 / 223 제4절 광주지하철시대 도래 / 226 제5절 미국 발 금융위기 파장 / 228 제6절 광산업·디자인·첨단부품소재 3대 핵심전략산업 육성 / 230 제6장 “미래 먹거리를 찾자” 산업고도화 기반 조성 박차(2010~2019년) / 235 제1절 광주은행 지역상공인 인수 실패 / 241 제2절 금호아시아나 유동성 위기 / 243 제3절 자동차 100만대 생산도시 클러스터 조성 / 244 제4절 88올림픽고속도로 4차선 완공 / 245 제5절 광주형 일자리 사업 / 246 · 사례 연구: 자동차산업 분석 / 248 제7장 제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시대(2020년~현재) / 253 제1절 광주글로벌모터스(GGM) 설립 / 258 제2절 광주 인공지능(AI) 중심도시 조성 / 259 제3절 광주경제자유구역 지정 / 264 · 참고문헌 / 270 · 찾아보기 / 272 |
ILTAE KIM,金逸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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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근대 민족자본 형성과 식민경제(1900~1940년대)
제1절 광주읍성과 근대도시로의 발돋음 1.1 전라남도 관찰부 광주로 이전 지역 경제사는 시간과 공간의 좌표 상에 변화하는 경제 현상을 기록하는 작업일 것이다. 근대 광주경제를 언급할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시간적 및 공간적 설정이다. 시간적으로 근대 경제는 도시의 형성과 더불어 태동했기에 당연한 수순이고 공간적으로 근대도시 광주의 기원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광주·전남을 관할하는 행정치소가 소재한 곳은 나주였다. 남도의 젖줄 영산강과 드넓은 평야를 품에 안은 나주는 천혜의 지정학적 입지 때문에 부족국가시대부터 행정의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8도 체제 하에서 전라도 서남부의 행정 중심지로서 위상을 확고히 구축해 왔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근대화 바람을 타고 외국의 문물과 제도가 유입되면서 행정체제의 개편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895년 5월 을미개혁으로 종전의 8도 체제를 폐지하고 23부(府), 331군(郡) 체제로 바뀌면서 나주목(牧)은 나주부(府)가 되었다. 그러나 단발령 항쟁 뒤인 1896년(고종 33년) 8월, 그간 1년 남짓 운영해오던 23부(府) 체제가 다시 13도(道) 체제로 바뀌었다. 이 때 전라도는 전남과 전북으로 분리되었고, 더불어 나주에 오랫동안 존속해온 행정치소인 전라남도 관찰부가 광주로 옮겨오게 되었다. 당시 광주는 지금의 충장로 1~3가를 중심으로 하는 읍성도시였다. 충장로는 광주읍성 북문과 남문을 연결하는 가장 오랜 대로이다. 이 거리는 조선시대 성내 간선도로인 중로(中路)로 7.2m 폭을 유지해 오늘날 9.1m 노폭으로 확장되었지만 옛 길 너비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길은 조선시대 광주에 부임하는 원님들이 거쳐 가던 곳이기도 하다. 전라남도 관찰부의 설치(1896)와 목포의 개항(1897)을 기점으로 광주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반도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일본 민간인 진출을 촉진하였다. 이 무렵 일본인 자본은 양조업을 중심으로 광주지역에 진출해 교두보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0년 일제 식민통치와 더불어 광주에 일본인 상인들이 물밀 듯 들어와 읍성 일대 충장로의 상가형성이 본격화되었다. 1.2 일본인 진출과 충장로 상권의 형성 충장로 1~3가 거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점령한 상가였다. 메이지유신으로 서구식 경제방식에 눈을 뜬 일제는 도시의 가장 중심인 객사(광산관) 주변에 전방을 열기 시작했다. 1912년 지적통계에 따르면 광산관에서 북문(구 충장치안센터)까지의 거리 땅 1만3천562평 중 47.6%인 6천466평을 일본인들이 사들여 일본식 집을 짓고 장사를 시작했다. 일제는 국유로 남겨졌던 광산관 부지마저 1922년 일본인들에게 팔아넘겨 충장로 1~2가 땅 가운데 우체국 등 공공건물을 제외한 땅은 모조리 일본인 소유가 되었다. 그렇다고 충장로 1가에서 3가까지가 전적으로 일본인 상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진 1-2. 1930년 붉은 벽돌건물 시절의 전남도청 1917년 일본인 기타무라 유이치로(北村友一郞)가 펴낸 책 ‘광주지방사정(光州地方事情)’에는 당시 읍성 일대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당시 광주시내 상황은 울퉁불퉁한 흙더미가 즐비했고, 볏짚지붕을 얹은 보잘 것 없는 집으로 둘러싸인 구불구불하고 좁은 도로가 있었는데 조선인의 상습적인 분뇨살포로 이상한 냄새가 진동했고 온돌의 밥 짓는 연기로 황혼녘에 시야를 가려 통행하는데 참으로 불편했다. 그러나 누문과 성벽 철거와 함께 넓은 도로를 동서로 냄으로써 시내구역이 정리됨과 아울러 초가집도 점차 자취를 감췄고 기와나 양철지붕을 얹은 일본식 가옥이 지속적으로 건축됐다. 뿐만 아니라 본정통(本町通)에는 일본인 점포가 즐비하고 광주농공은행, 광주우편국 등 대형건물도 볼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시가지 형성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면서 성 안팎의 구획이 통일되고 조선인들이 일본인과 뒤섞여 사는 일도 대부분 사라졌다.” 한마디로 기타무라의 글은 종전의 광주시내 도로는 구불구불하고 불결하기까지 했는데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반듯하고 화려한 면모를 갖추게 됐다는 것이다. 다분히 식민통치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폄하와 일본인의 우월의식을 담고 있어 실상을 왜곡한 측면이 있으나 충장로의 당시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충장로에 본격적으로 한국인 상점이 등장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한국인 상점은 주로 충장로 4가와 5가에 집중됐다. 이를 통해 충장로 4가부터 5가는 한국인 상가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충장로 3가에도 일부 한국인 상점들이 1920년대부터 들어서 있었는데 충파 맞은편의 김세라 상점(고무신)과 김준실의 남해당(완구 및 악기점), 충파 옆의 심상엽 포목점과 김막동의 어물전 등이 그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충장로에는 일본인 외에 많은 외지 한국인들이 들어와 장사를 했다. 개성출신으로 1929년 광주에 온 허명학 형제는 옛 한국은행 자리인 금남공원에 송도약방을 차렸다. 강진 병영과 제주 출신도 있었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