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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욕실을 찾은 민형은 욕실문을 열고, 그 안의 유리문을 열고, 또 그 위에 쳐진 커튼을 대충 걷어낸 뒤 욕조로 직행해 샤워기를 틀었다. 이가 떨릴 정도로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 위로 떨어져 전신을 적셨다. 보기만 해도 추운 모습이었지만,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민형은 샤워 꼭지를 잠그고, 벽을 짚었던 손을 떼어내 몸을 돌린 후, 등을 타일 벽에 기댔다. 그러고도 한참을 그렇게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독한 저혈압인 데다 살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리다 보니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세진은 즐거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올라갔다. 밥상도 그럴싸하게 차려놨겠다, 세현이도 씻기고 먹였겠다, 그리고 얼마 있으면 그도 깨어날 것 같으니……. 꽃단장해야지. 모처럼 민형과 단란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없었다. 세진은 목욕재계에 때때옷으로 갈아입고 예쁘게 꽃단장을 해야겠다는 일념에 불타올랐다. 이번에야말로 그에게 자기가 엄연히 성숙한 ‘여자’임을 확실하게 인식시키겠다고 다짐하며 세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상의를 벗어서 걸어두고는 ‘짝’ 박수를 쳤다. 아! 목욕물부터 받아둬야지. 민형은 명상에 빠진 사람처럼 눈을 감고 그대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슬슬 평소의 정신 상태로 돌아오고 있는 컨디션을 확인하며. 그러나 민형은 자기 컨디션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귓가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콧노래 소리로 미루어 판단하건데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콧노래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환청은 환청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확연해졌다. 게다가 잠시 뒤에는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박수 소리까지 들렸다. 결국 민형은 눈을 떴다. 그리고 딱 마주쳐 버렸다, 반쯤 벗은 세진의 눈과. 젖은 옷을 전신에 감고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민형, 반쯤 벗은 채로 욕실 유리문을 열고 그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서 있는 세진. 민형은 이게 꿈이나 환상,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세진이 그의 집에 있을 리 없으니까. 다 좋은데, 어째서 저 애가 벗고 있는 거지? 이런 의문까지 품었다. 세진이 굳어진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은 물론 얼굴까지 굳어져 버린 것뿐. 그 상태로 대략 10초 정도가 흘렀다. 슬슬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있던 참인 민형은 어쩌면 이게 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제 세현이 때문에 세진이네 집에서 잤던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런 그의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각에 확신을 심어주는 상황이 발생했다. “계신지 몰랐어요. 밖에선 커튼 때문에 안 보이거든요.” 피해자라면 세진이지 옷 다 입고 있는 민형이 아닌데 왜 이런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세진은 그렇게 말했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