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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디스크

CD 1

  • 01 카루소
  • 02 오 나의 태양
  • 03 작은 입술
  • 04 무정한 마음
  • 05 열정
  • 06 엄마
  • 07 거룩한 밤
  • 08 신의 어린 양
  • 09 탄식하고 슬퍼하는 영혼
  • 10 청아한 아이다
  • 11 남몰래 흘리는 눈물
  • 12 4월의 새벽은 너무나 상쾌해
  • 13 별 밝은 밤에
  • 14 불타는 이 마음

CD 2

  • 01 타오르는 불꽃을 보라
  • 02 여자의 마음
  • 03 다시 한번 그녀를 볼 수 있다면
  • 04 하늘과 바다
  • 05 꿈과 같이
  • 06 꽃노래
  • 07 봄바람이여, 어찌하여 날 깨우나
  • 08 오 낙원이여
  • 09 밭에서 목장에서
  • 10 의상을 입어라
  • 11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 12 참을 수 없는 사랑
  • 13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그녀에게 전해주오
  • 14 별은 빛나건만
  • 15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미인
  • 16 그대의 찬 손
  • 17 공주는 잠 못 이루고

DVD

  • 01 <요정 빌리> 서곡
  • 02 안녕의 꽃으로 덥힌 보금자리여
  • 03 주인님 들어 보세요
  • 04 울지 마오, 류여
  • 05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 06 그대의 찬 손
  • 07 내 이름은 미미
  • 08 오 아름다운 아가씨여
  • 09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 10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 11 세기딜리아
  • 12 버찌의 이중창
  • 13 빌랴의 노래
  • 14 그대는 나의 모든 것
  • 15 내 남자는 가버렸어요
  • 16 그라나다
  • 17 미녀들 속에서
  • 18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미인
  • 19 서머타임
  • 20 바람으로 오는 나의 노래
  • 21 오 나의 태양
  • 22 축배의 노래

아티스트 소개 1

연주Luciano Pavaro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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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노 파바로티

성악가 (테너)

Luciano Pavarotti의 다른 상품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매일
2004년 12월 14일
시간/무게/크기
291g | 크기확인중

제작사 리뷰

파바로티 베스트
가장 사랑 받는 테너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소리는 당연히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일 것이다. 이런 친밀감은 음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의 손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악기들의 소리보다는 성악가들의 목소리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한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이들조차 피아노 소리로 만으로는 폴리니와 침머만을 구별해내기 어렵지만, 파바로티와 도밍고의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것(설사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모른다 하더라도)은 어지간한 음악 팬들이라면 누구라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음악 이전에 이미 목소리의 차이에 대한 적응이 이루어져 있고, 아름다운 음성에 대한 선호도 역시 본능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겠는데, 대부분의 청중들이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연주자들보다 성악가들의 공연에서 더욱 열광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녹음 기술이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갖추고, TV 등의 영상 매체까지 이미 음악 소비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던 20세기 후반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위 '3 테너'의 시대였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치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가 바로 그들인데, 모두 60대 중후반에 접어들고 있어 이제 무대에서의 멋진 모습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 하더라도 대부분 음악 팬들의 뇌리에는 아직까지 이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빼어난 가수는 과연 누구였을까? 백혈병으로 인해 연주활동을 중단했다가 재개한 카레라스가 나머지 둘에 비해서 조금 쳐진다는 것은 대개 인정하는 바이지만, 파바로티와 도밍고 사이의 판단은 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시기부터 항상 편을 갈라 싸워왔던 뜨거운 감자와 같은 화두이다.
파바로티를 지지하는 이들은 탁 트인 고음에서의 시원한 느낌과 목소리의 심지, 또, 가벼운 역할과 무거운 역할을 동시에 소화해낼 수 있었던 범용성을 장점으로 부각시켰고, 도밍고를 아끼는 이들은 이에 질세라, 바그너까지도 가능한 엄청난 체력과 오페라 무대에서의 빼어난 연기력과 준수한 외모 등을 거론하곤 했는데, 음악적인 완성도를 떠난 대중적인 인기도에 있어서 만큼은 항상 파바로티가 승리를 거두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파바로티가 타고난 소탈한 성품이 한 몫을 담당했다 할 수 있겠는데, 귀족적인 풍모의 도밍고는 어딘지 모르게 멀리 느껴지는 반면, 넉넉한 뱃살과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파바로티의 모습이 훨씬 더 서민적인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외모뿐만 아니라 언론 매체를 통해 비추어지는 모습 또한 그러했는데 80년대 중반 테니스계를 풍미했던 멕켄로와 파바로티가 함께 테니스를 치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웃음을 지어내게 만드는 코미디에 가까운 풍경이기도 했다.

대기만성과 고진감래

파바로티는 1935년 이탈리아의 모데나, 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장래 각종 음반에서 상대역으로 열연을 했던 미렐라 프레니 역시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두 사람이 같은 유모의 젖을 빨면서 자랐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한 일화인데, 그 유모의 젖에는 발성을 돕는 독특한 무엇인가가 들어있었던가 보다. 그의 아버지는 빵을 만들어 파는 평범한 인물이었지만, 노래에 꽤 많은 관심이 있었기에 파바로티는 어린 시절부터 티토 스키파, 베냐미노 질리, 엔리코 카루소 등의 노래 소리를 음반으로나마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는데, 그가 성악가로서의 꿈을 키우게 된 계기는 바로 12살에 접했던 질리의 연주회였다. 질리는 당시 50대 후반으로 전성기는 이미 지나있었지만, 소년의 귀에는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고 멋진 노래였음이 분명하다. 파바로티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그 흥분을 주체할 수 없어 연주가 끝나자마자 질리에게 달려가 나도 커서 당신과 같은 테너가 되겠다고 이야기했고, 질리는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나 빠듯했던 가정 형편은 그에게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성악가로의 길은 멀고도 험난한 과정임에 분명했고, 가족들에게 확실한 기약 없는 뒷바라지를 부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해보겠다는 아들의 결심에 그의 어머니는 '너의 노래 소리는 언제나 감동적'이라면서 찬성해 마지않았지만, 아버지는 성공한 성악가가 되는 것이 얼마나 가능성이 낮은 일인지 아느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30살까지 딱 10년의 기간동안 성악에 매진하기로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파바로티는 아리고 폴라에게 본격적인 성악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폴라는 발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교사여서 처음 6개월 동안 파바로티가 한 것이라고는 모음 발성뿐이었다. 어지간한 젊은이라면 이 지루한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을 것이지만, 파바로티는 오히려 다양한 방법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목소리의 변화를 재미있어하며 열심히 연습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폴라가 일본으로 이주함에 따라 파바로티는 만토바의 에토레 카포갈리아니의 문하에 합세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어린 시절의 소꼽친구이기도 했던 미렐라 프레니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가 성악에 매진한 것도 어느덧 7년 가까이 지났지만, 성공은커녕 사실 이렇다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고, 파바로티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는데, 1960년 갑자기 목소리가 트이는 것을 느꼈고, 때마침 살소마지에로라는 작은 도시에서 열게 된 독창회에서 꽤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이에 용기 백배한 파바로티는 페리 콩쿠르에 참가하여 우승 트로피를 손에 쥐게 되었고, 그 경력이 바탕이 되어 몰리아니 프라델리가 지휘하는 '라 보엠'에 출연,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치러냈다.
1963년 영국 코벤트 가든에의 데뷔도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스테파노의 대역으로 출연했던 이 공연에서 조안 서덜랜드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존 잉펜의 눈에 띄게 되었던 것이다. 서덜랜드는 소프라노로서는 상당히 우람한 체격을 자랑하던 고로 노래는 물론이고, 시각적인 요소까지 충족시킬 수 있는 상대역을 찾기가 마땅치 않았는데, 이후 파바로티가 그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이다. 1965년의 호주 순회 공연을 시작으로 인연을 맺게 된 서덜랜드는 그에게 실로 큰 도움이 되었다. 파바로티는 후일 서덜랜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는데, 서덜랜드는 그녀의 가슴에 직접 손을 얹어놓게 하면서 횡경막을 이용한 발성을 조언했을 정도였으니 서덜랜드의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파바로티는 이 호주 순회 공연 이후 곧 라 스칼라 무대에 오를 수 있었고, 1967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를 통해 미국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미국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낸 것은 그의 두 번째 메트로폴리탄 방문이었던 1972년부터였는데, 역시 서덜랜드와 함께 노래했던 푸치니 <연대의 아가씨>에서 그는 무려 아홉 음절이나 계속 이어지는 하이 C를 그야말로 완벽하게 들려줌으로서 뉴욕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것이다. '하이 C의 제왕'이라는 그의 별명 또한 이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공연을 직접 보러 왔던 그의 아버지는 비록 '아직 네 노래는 질리나 스키파 같지는 않구나'라고 인색하게 평가했지만, 긴 시간동안 자신을 갈고 닦으면서 기다려야 했던 파바로티에게 이제 남은 것은 쭉 뻗어있는 탄탄대로였다. 그는 그 길을 따라 그대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타고난 그의 목소리는 밝은 가벼운 리리코이다. 젊은 시절에는 '라 보엠'이나 '사랑의 묘약' 같은 리릭 오페라들만을 주로 노래했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점점 드라마틱한 작품에도 도전했는데, '일 트로바토레'는 물론에고 심지어 '오텔로'를 노래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리리코 역에만 전념했었다면 지금 더 나은 목소리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의 경쟁은 선택의 여지를 없애는 치열한 것이었다.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한 경력의 도밍고는 드라마틱한 목소리의 화신이었고, 파바로티가 그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니면, 적어도 그가 하는 것을 파바로티가 못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한국에서의 파바로티

파바로티가 최정상의 테너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국내 공연 기록은 그리 적은 것이 아니다. 체조 경기장에서 수많은 스피커를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했던 1993년 공연까지는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것인데, 그가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던 것은 1977년의 일이다. 공연은 이화여대 강당에서 이루어졌고, 당대 최고의 음악 평론가인 이순열 선생의 눈부신 평을 여기 옮겨 보자.

"파바로티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일부 청중은 그것이 정말일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했고, 일부에서는 그도 또한 '가짜 세계적'이 아닌가 하고 경원했다. 그러나, 카루소 이래 가장 뛰어난 테너라는 표현이 파바로티에게는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다. 값싼 물감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고귀한 색조로 가득 차 있는 그의 노래에는 격정을 표현하면서도 재능없는 가수들이 곧잘 나타내 보이는 신파조의 과장이 없었고, 적절한 절제 속에서 향기 높은 예술성이 만발해 있었다. 그의 정확한 딕션에 의해 절절이 품위로 가득 찬, 그러면서 성악에서 우리들이 바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충족시켜주는 노래를 불렀다."

여기 두 장의 음반과 한 장의 DVD에는 평소 파바로티가 즐겨 부르던 대표적인 작품들이 가득하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1977년, 이대 강당을 빼곡하게 채웠던 모든 청중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그 감동의 순간을 재현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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