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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의 초상화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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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책 머리에
왜 작곡가의 초상화인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조지 프리드릭 헨델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드비히 판 베토벤
니콜로 파가니니
조아키노 로시니
프란츠 슈베르트
엑토르 베를리오즈
펠릭스 멘델스존
프레데릭 쇼팽
로베르트 슈만
프란츠 리스트
리하르트 바그너
주세페 베르디
안톤 브루크너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
요한 슈트라우스
요하네스 브람스
러시아 5인조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
에드바르 그리그
구스타프 말러
클로드 드뷔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 시벨리우스
아놀드 쇤베르크
버르토크와 코다이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1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과 같은 대학원에서 음악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음악평론에 입선했으며 객석예술평론상, 서울예술평론상을 수상했다. 중앙일보 음악전문기자, 서울시립대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 서양음악연구소 총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서울대, 한국해양대, 경상대, 추계예대, 건국대에 출강 중이다. 저서로는 『음악의 사회사』,『레인보우 클래식』,『위기의 아트센터』, 『음악회 가려면 정장 입어야 하나요?』, 『오페라 보다가 앙코르 외쳐도 되나요?』, 『섬, 그 바람의 울림: 제주국제관악제25년』,『음악사를 바꾼 결정적 순간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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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3월 31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498쪽 | 526g | 130*194*30mm
ISBN13
9788962574043

책 속으로

헨델은 식도락가이자 대식가로 유명했다. 체격도 큰 편이다. 초상화에서도 항상 배가 불룩 튀어나와 있다. 식사 때마다 와인을 즐겨 마셨는데 당시엔 부패를 막고 풍미도 높이기 위해 포도주에 납을 섞었다. 헨델이 시력을 잃고 마비성 발작과 통풍에 시달린 것이 납중독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조셉 구피의 그림 ‘듣기 좋은 수퇘지’와 ‘매력적인 짐승’은 지칠 줄 모르는 헨델의 식탐을 풍자한다. 헨델은 돼지머리를 하고 맥주통 위에 앉아 오르간 건반 뒤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낸다. 주변에 음식과 술, 드럼, 호른, 트럼펫, 바순이 보인다. 관악기와 타악기는 관현악적 효과에 집착해 무조건 큰 소리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헨델의 음악적 욕심을 비꼬았다. 헨델이 밟은 종이 위에는 연금, 자선, 귀족, 우정 등의 단어가 적혀 있다.
---「헨델」중에서

하이든은 미남형 얼굴의 소유자는 아니다. 왜소하지만 다부진 체격에 이마는 넓고 눈동자는 부리부리하다. 비강 폴립 때문에 코가 더욱 커 보이고 콧구멍은 짝짝이다. 짙은 갈색 피부 때문에 어릴 때부터 별명이 ‘검둥이’였다. 에스테르하치 궁정의 부악장으로 갓 부임한 하이든의 교향곡을 듣고 감동한 파울 안톤 대공이 도대체 이 곡을 누가 작곡했는지 물었다. 이때 하이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이 검둥이가 작곡했다는 말인가”라고 외쳤다고 한다.
---「하이든」중에서

모차르트는 루이 15세의 애첩인 퐁파두르 여후작의 궁정에서 열린 송년 음악회에 출연했다. 여후작도 뛰어난 클라비코드 연주자였다. 모차르트는 예의를 갖춰 손에 키스하려고 했으나 부인이 거만한 표정으로 손길을 뿌리쳤다. 그러자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 키스를 거부하는 이 여자분은 도대체 누구예요?” 비센테 데 파레데스는 1890년경에 그린 수채화에 이 에피소드를 담았다.
---「모차르트」중에서

파가니니는 항의조로 편지를 쓰긴 했지만 자신을 둘러싼 온갖 루머와 음해도 결국 유명세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해 내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연주회 흥행에 도움을 주는 홍보 수단으로 여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게마다 수많은 초상화가 팔리고 있었다. 그림들은 나의 특성을 그럭저럭 표현했지만 나를 정말 닮은 그림은 없었다. 나는 웃었고 그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파가니니」중에서

클림트는 베토벤을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불굴의 개인주의자로 보았다. 그의 천재적 음악이야말로 세기말 인류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사랑과 헌신의 찬가라고 굳게 믿었다. 특히 ‘합창 교향곡’을 아방가르드 예술의 투쟁에 대한 상징으로 보았다. 클림트와 말러는 베토벤처럼 적대 세력과 예술적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베토벤」중에서

1838년 쇼팽은 상드의 소개로 열두 살 손위의 들라크루아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들라크루아는 편지에서 쇼팽을 항상 ‘몽 셰르 프티 쇼팽’이라고 불렀다. 내 사랑하는 꼬마 쇼팽이라는 뜻이다. 같은 해 5월 쇼팽은 한밤중에 파리 귀족의 살롱에서 극소수의 상류층을 위해 연주회를 마련했는데 상드는 여기에 들라크루아를 초청했다. 당시 쇼팽과 상드는 아직 동거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연인 관계였다. 상드는 들라크루아에게 자기가 쇼팽과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달라고 졸랐다. 둘은 생제르맹 데프레에 있는 들라크루아의 화실을 방문했다. 그림에 업라이트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들라크루아도 평소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를 즐기던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쇼팽」중에서

르누아르는 바그너를 무척 존경했다. 1876년 그가 무척 아끼던 후배 화가 자크에밀 블랑슈 부친의 부탁을 받고 ‘탄호이저’의 두 장면을 화폭에 담았고 1882년 이탈리아 여행 도중 팔레르모에서 바그너를 어렵사리 만나 초상화를 완성했다. 대작곡가는 ‘파르지팔’의 완성을 앞두고 시칠리아에 머물고 있었다. 햇볕과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할 생각이었다. 르누아르는 바그너에게 초상화를 그릴 시간을 잠시 내달라고 부탁했다. 두 차례 거절당한 끝에 ‘파르지팔’ 완성 직후 35분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을 허락받았다. 바그너는 완성된 그림을 보고 개신교 목사 같다며 크게 웃었다. 르누아르는 열렬한 ‘바그네리안’은 아니었다. 1896년 친구와 함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다녀왔는데 음악이 지루해 여섯 시간 동안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편지에 적었다. 그림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바그너」중에서

쇤베르크는 말러를 ‘성자’라고 부르면서 매우 따랐다. 저서 『화성법』도 그에게 헌정했다. 말러는 쇤베르크가 빈 예술아카데미 강사 자리에 지원했을 때 뒤에서 많이 도와주었다. 그는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의 작품을 끔찍이 아끼면서 버팀목과 조언자가 되어주었다. 또한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무도 쇤베르크를 돌봐줄 것 같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말러」중에서

출판사 리뷰

낭만주의 시대에 최고의 예술로 추앙받던 음악
그 음악가들의 홍보 수단이던 초상화
모차르트 그림 하나쯤은 가져야 고매한 취향을 뽐낼 수 있던 시대

먼 나라에 사는 생면부지의 음악가도 이름만 알면 인터넷 검색으로 사진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다. 작곡가나 연주자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놓고 다양한 포즈의 프로필 사진을 곁들여 활동상을 알리느라 바쁘다. 요즘은 유튜브를 통해 음악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진이 보급되기 전 음악가의 초상화란 권력층이나 부유층, 아니면 음악가 자신이나 가족 또는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이 책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부터 졸탄 코다이까지 34명의 작곡가 초상화와 기념상을 시대순으로 정리하고 화가와 음악가 간의 숨겨진 이야기, 장르를 넘나드는 우정과 그들의 인생을 담았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초상화라면 그 작품의 탄생 배경에 주목해 보자. 생생한 당시 유화, 수채화, 판화, 사진, 캐리커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남아있는 동상, 흉상, 기념비, 데스마스크, 부조 등의 입체 작업까지 고루 담았다. 저자가 ‘음악과 미술의 만남’을 주제를 다룬 두 번째 작업이다.

허공으로 사라지고 마는 청각예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몸부림으로 세운 수많은 동상과 기념비들…

음악가를 그린 초상화는 작곡가의 얼굴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데 있지 않다. 작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든 초상화는 화가의 손끝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상화, 미화, 영웅화, 신격화되는 페르소나다.

최근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가지고 생전 모차르트의 모습을 복원했다. 우리가 흔히 알던 바르바라 크라프트의 초상화에서 흰색의 소라 모양의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빨간 옷을 단정하게 입고 있는 모차르트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닮게’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위대한’ 작곡가로 보이게끔 하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음악가의 초상화란 음악을 눈으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예술이다. 영상도, 사진도 없던 시절, 연주되는 음악은 오로지 현장 연주를 통해서만 향유할 수 있다. 따라서 흘러가는 음악은 유한한 시간성을 가지고 속절 없이 흘러가고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붙잡을 방법은 없다. 그래서 작곡가(음악가)는 화가 앞에 자리했다.

음악가들의 초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지대했다. 하이든이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인기를 누릴 때 때마침 판화로 제작된 초상화를 모으려는 열풍이 불었다. 유명인의 이목구비를 닮아보려는 심리에다 이제 막 생겨난 셀럽 문화가 초상화 수집을 부채질했다. 어떤 작곡가의 초상화 사본을 수집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음악 취향 수준이 판가름 났다.

음악가에게 초상화는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수단이었다. 음악계에서 성공하려면 가능한 모든 홍보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이든도 초상화 제작을 위해 화가의 스튜디오에 기꺼이 방문했다. 유화나 드로잉 등 오리지널이 있어야 이를 바탕으로 판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든과 계약을 맺은 출판사에게 초상화는 악보 판매를 위한 홍보 수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든과 악보출판사는 운명공동체였다.

18세기 이후 작곡가의 초상화는 유화뿐만 아니라 판화, 실루엣 등 다양한 매체로 제작되면서 개인 소장의 사적 영역에서 서점, 악보 가게, 미술 상점 등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중산층을 위한 공공 음악회가 급성장하면서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서 판화로 제작된 작곡가 초상화의 컬렉션 붐이 일었다. 유명 음악가의 초상화 판화를 많이 소장할수록 예술적 안목이 높다는 증거로 여겼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사진 초상화가 주요 홍보 수단으로 떠올랐다. 프란츠 리스트는 어떤 작곡가보다 사진 스튜디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수십 년에 걸쳐 250여 종의 다양한 사진을 남겼다. 19세기 영웅 숭배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곡가 기념상은 문화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오스트리아 빈이 ‘음악의 도시’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시내 곳곳에 세운 수많은 음악가 기념상과 기념관이 적잖이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미국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 세운 베토벤과 베르디 기념상은 각각 독일계와 이탈리아계 이민 사회에서 건립했다.

포토 저널리즘으로서의 초상화

로시니, 오펜바흐, 베를리오즈, 리스트, 베르디, 바그너 등 유명 음악가들은 캐리커처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처음엔 가까운 사람들끼리 재미 삼아 스케치를 주고받다가 판화로 제작되어 풍자신문의 1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캐리커처는 특정 작곡가와 그의 음악을 당대의 청중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신문에 실린 평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당시의 지배적인 여론을 담아낸 일종의 다큐멘터리이자 포토 저널리즘이다. 캐리커처는 특징적인 동작이나 자세를 과장하고 비틀어 독자의 웃음을 자아내는 한편 세간의 평가를 한 치의 양보 없이 반영했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담는 데 반해 캐리커처는 작곡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거울처럼 비춘다.

결국, 작곡가의 초상화는 음악도상학(Iconography of Music)의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작곡가의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이유는 당대 또는 후세의 평가가 그림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리에 박힌 특정 작곡가 이미지도 그림이나 조각, 영화를 통해 조작되거나 부풀려진 신화 조작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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