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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방 안에 숨겨놓은 타인 노을 숨기는 옷 최초의 공연 동물원 양동이 겹겹이의 방식 작은 풀들은 미끄러지며 자란다 언니의 새벽 엄마의 지붕 물웅덩이를 발음하려다 서니사이드 업Sunny-side up 귀신같은, 귀신같은 아홉 개의 채널과 엄마의 보자기 욕조 2부 이 구역은 이제 중성이야 비가 오기 전 춤을 추는 새 엄마는 날지 못하고 주사위 텀블위드Tumbleweed 언니의 거위 잘린 귀 헌터 타임Hunter Time 무릎에서 민들레가 자라면 꼬리 언어 생식 바스락거리는 셈법 12시와 울음 산책 그림책 도그 바이트Dog Bite 별안간의 팬케이크 올드패션드 러브Old-Fashioned Love 처음 입은 인간 2인용 요람 쉽게 열리는 무릎 불안의 사생활 신월 여름 공연 3부 혼자 마를 줄도 아는걸요 비치 러버Beach Lover 폐어肺魚 버드 세이버Bird Saver 분장실 엄마의 엄마에게 필라테스 언니 틈 그림에 가까이 가지 마세요 일렉트리컬 프로미스Electrical Promise 타임키핑Timekeeping 거짓말 구애, 구애 당신의 집 원더랜드 페르소나Wonderland Persona 영장류처럼 긴 팔을 사랑해 뒤집힌 파라솔 4부 나는 복숭아를 좋아해요 나비 정원 돌의 문서 뺨 맞은 관계들 벌룬의 저주 언니의 노래 꽃 없는 열매 아픈 공기 풍선 부는 사람 수레 무대 항아리 마을 불면증 오렌지 섹션Orange Section 절취선 코끼리 그룸Groom 복숭아 해설 에로스의 시학ㆍ김보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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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의자를 놓아두고
무대를 누비는 생生의 퍼포머 우리는 불가능을 담보로 공연을 계획했다. 무대는 벌판이어도 좋고 지평선이어도, 간이 정류장 또는 당근밭이어도 좋았다. 중간에 무산된다 해도 우리의 목표는 사실, 거기까지였음을 주제로 공연을 했다. 빈 의자가 있는 데면 어디라도 좋았다. ―「여름 공연」 부분 시적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시인이자 독특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좌중을 압도하는 음악인인 이린아는 그야말로 ‘퍼포머performer’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보경은 이에 주목하여 “이린아의 시에서 무대는 삶 자체의 은유”이며 그 무대 위의 배역은 “외적 강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증명을 위한 필연적인 일”임을 짚는다. 수다한 가면을 바꿔 써가며 무수한 페르소나를 선보이되 결코 ‘진짜’ 얼굴은 잃지 않는, 유려한 퍼포머 이린아의 공연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이때 무대의 형태는 아무러하여도 상관없다. 누군가 앉았다 갈 빈 의자만 있다면, 관객의 자리만 마련되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뿐 관객의 유무 또한 상관없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언제나 기다리는 역할”(「언니의 노래」)이고, “관객이 없는 가수가 되거나/음역을 갖지 못한 악기의/연주자”(「양동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도 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토록 결연한 태도로 정성껏 꾸린 무대에 매료되지 않을 이가 어디 있으랴. 독자라는 이름의 관객들은 곧 천천히 객석을 채워나간다. 한껏 끌어안은 기억으로 단단해진 몸 빗줄기 아래서도 이어지는 완전한 춤 나는 인간이 자신의 신체 능력을 정할 수 있다고 믿어요. 이건 선천적인 것들에 대한 잔인한 비평은 아니에요. 내가 말하려는 건, 정말로, 자기 몸에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것도 자기 몸에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두 자기 자신만 결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비가 오기 전 춤을 추는 새」 부분 이린아에게 시는 “붕붕거리던 노래가 다 빠진 그때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던 것”(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소감)이다. 노랫소리가 사그라진 뒤에도 무대 위에 여전히 남겨지는 것은, 마지막까지 “배역을 벗어나선 안”(「최초의 공연」) 되는 것은 ‘몸’일 터. 이린아의 시는 곧 몸의 시이기도 하다. 우리 몸은 “1층을 단단하게 안정”시켜야 하는 “집”(「필라테스 언니」)이어서, 무너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경험이라는 재료를 골고루 쌓고 다져나가며 손보아야 한다. 보드랍고 연한 경험만으로 세워진 집은 오래 버틸 수 없기에, 다루기 까다롭고 위험한 재료라고 해서 내던질 수는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 재료를 적극적으로 주무르는 방식인 ‘기억’이며, “나의 몸에 어떻게” 좋고 나쁜 경험들을 “기억할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비가 오기 전 춤을 추는 새」). 이에 “정말로 잊을 수 있다면,/네 상처를 포기할 수 있”(‘시인의 말’)느냐는 시인의 물음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편식하지 않고 “기억하기 좋은” 단맛도 “기억하기 싫은”(「별안간의 팬케이크」) 쓴맛도 전부 삼켜 단단해진 몸으로, 시인은 노래가 다 빠져나간 뒤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고 춤을 춘다. 이 몸짓은 “비가 오든 말든 마음껏”(「비가 오기 전 춤을 추는 새」) 계속된다. “아프지 않으면,/빗방울은 으스러지는 고통이 되고 말”(「아픈 공기」) 테지만, 시인은 이미 상처마저 껴안았으므로 괜찮다.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 노래가 끝난 뒤에도 끝까지 춤추는 것. 이것이 삶이라는 무대를 향한 이린아의 사랑이다. 이제, 또 한 번 이린아의 사랑을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