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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 나는 늘 부분이었다. 그래도 기록자 유목 울컥 이 세상 끝까지 텅 빈 주머니처럼 헐렁하게 고고학자인 당신께 실존 긴장 피붙이 자화상 눈물은 신이 주는 것 영면 직전에 운명 몸이 그렇게 슬픈 건데 꿈을 꿨어요 콧물이 흐르는 시간 황혼 누운 꽃도 아름다워 작품 그 손이 그립다 2부 | 안에서 만져지는 몽글몽글한 슬픔 살고 싶어서 흠 나의 가슴에게 사랑이라는 울먹임 당신은 품어야 당신인데 흠뻑 젖는다는 것 구름 너에게 낡은 부부 그의 얼굴 그게 다 사랑 때문이야 안에서 만져지는 몽글몽글한 슬픔 역사관 앞에서 생각하네 틈새 연분 종교적 3부 | 마음이 깊을수록 침묵의 바닥 위로 쌓이는 것들 어떤 인생 지금 보니 하산할 때 한 편의 다큐로 끝날 수 없는 봄날 그 사람 추억이 서로 다른 기일 더 여린 것들 우는 일도 일인데 등 뒤의 길 청춘에게 2020년의 침묵 간절하다 사람들 유언 4부 | 이제 우리는 멈춰야 한다는데 멍울 하나 낯선 사람 저녁에 찍히는 사진 유족의 밤 누구나 이별 꽃잎이 떨어지는데 어쩌다 깊은 생각 많이 아픈 당신에게 폐가의 기도 옛 무덤 발의 세계 그래요 이제는 이제는 이 꽃 그 끝에는 몸이 된 내가 5부 | 서로 마음이 마음에 닿을 때까지 내공 내 주소는요 미물 용산역 100번 버스 정류장에서 이 바닷가 카페 OMG! 문이 있던 집 알래스카 가는 사람들 끊임이 없이 귀가 꿈결 꽃 아닌 것들이 절대적으로 사랑한다 멍 한 덩이 해설 몸의 세상, 세상의 몸, 그 헐렁한 슬픔을 향하여 | 신수정 |
이사라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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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말년의 양식(late style)’이라고 할까. 예술가들의 노년에 종종 발견되는 비타협, 풀리지 않는 모순, 구조적 불협화음 등을 안정감이나 삶의 연륜, 지혜 등과 대비시키는 사이드는 조화와 해결의 징표 대신 예술가가 이제까지의 기존의 사회 질서와의 원활한 관계를 포기하고 과감하게 뜻밖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는 지점에 주목한다. 소위 ‘자발적 망명’으로 규정되는 노대가의 지배체제와의 비타협적인 면모가 성숙한 예술의 지양된 형식보다 예술의 실체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사라의 이번 시집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시집에는 2000년대 이후 시인의 작업, 이를테면 『시간이 지나간 시간』(2002), 『가족박물관』(2008), 『훗날 훗사람』(2013),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2018) 등의 여운이 없지 않으며 그것들을 심화하고 갱신하려는 의지도 두드러진다. 특히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일직선적 진화론의 시간관에서 벗어나 시간을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현재로 출몰하는 ‘진흙 덩어리’이자 파편 같은 ‘토막’, 그리고 그 토막들이 서로 엮인 ‘사다리’ 같은 것으로 감수하는 지점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번 시집이 그동안 엄숙하게 고수해온 미학적 절제에서 벗어나 나이 들어가는 자의 감정을 자유롭게 직설적으로 분출하는 대목은 새롭다고 할 만하다. 형이상학적 주체에서 몸의 실존으로 옮겨가는 정체성의 재구성 과정이 슬픔의 눈물을 통해 타자와 공감하는 장면도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시집이 나와 너의 공감의 가능성에 문을 열어놓고 있지만, 완전한 합치의 전체성에는 격렬하고 냉소적으로 저항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이 ‘헐렁한 틈새’의 시학은 말년에 이른 이사라의 시의 또 다른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둘 떠나고 익숙한 것들 사라지고 우리는 남은 것들 틈에 끼어 산다 뇌는 쪼그라들어도 생각은 많은데 그래도 살아남은 자가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자인데 이 어지러움과 불안과 책무가 떠나는 날이 오기는 오나 누구나 그렇듯 눈꺼풀이 닫히면 세상이 없어지는데 나 없으면 세상도 없는데 기억이 먼저 사라지기 전에 우리 헐렁하게 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 - 「텅 빈 주머니처럼 헐렁하게」, 전문 ‘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로 마무리되는 이 시는 이 시집의 궁극적인 전언으로 보아도 좋겠다. 하나둘 저세상으로 떠나고 익숙한 것들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남은 것들 틈에 끼어 산다’. 이 틈을 메울 방도는 없다. 틈이 초래하는 ‘어지러움과 불안과 책무’는 어쩔 수 없는 존재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연을 정리하는 어구, 즉 ‘(……) 떠나는 날이 오기는 오나’에 드러나는 핀잔 섞인 체념의 톤은 이를 가능하다고 믿는 모든 종류의 서정적 초월과 낭만적 허위에 유머러스한 냉소를 선사한다. 말년에 이른 노대가 이사라의 전언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나 없으면 세상도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세상의 부분일 뿐이다. 나와 너는 세상의 틈에 끼어 살아간다. 그러니 이 틈을 메우려 애쓰며 나의 몸을 소진하지 말자. ‘헐렁하게, 더 헐렁하게 사랑하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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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헐렁한 사랑’의 파토스는 정신의 형이상학과 무관하다. ‘틈새’의 수락, 헐렁한 존재로서의 몸의 실존은 의식의 균질적인 통제의 그물 바깥으로 주체를 내몰고자 한다. 이성의 그물에 걸리지 않게, 감시와 처벌의 시선에서부터 자유롭게. (……) ‘그냥 스쳐 가주세요, 주검으로 남고 싶어요.’ 근래 그 어떤 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정언명령이 여기 있다. 이사라의 시는 시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말한다. ‘그냥 스쳐 가주세요, 주검으로 남고 싶어요.’ 자발적 추방이 여기에 있다. - 신수정 (문학평론가, 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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